축사하는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알앤디(R&D·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하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대통령경호처 경호원은 손으로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 신민기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학사복을 입고 주위에 앉아 있던 또 다른 경호원들은 신씨의 사지를 들고 나갔다. 농구경기장 2개 크기를 넘는 체육관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윤 대통령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신씨는 2024년 2월16일, 자신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강제 축출당했다.
축출만이 아니다. 경호원들은 별실에 신씨를 머무르게 했다. 신씨가 들려 나오는 중에 잃어버린 학사모를 찾으러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경호원에게 제지당했다. “대통령의 동선과 겹치면 안 된다”며 세 차례나 장소를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30분 동안 갇혀 있었다. 법적 근거도 없는 강제 구금이었는데, 신씨는 되레 경찰에게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체포됐다. 카이스트의 졸업식 업무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얘기한다. 우선 경호원이 신씨의 입을 틀어막은 행위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신씨는 2월19일 <한겨레21>과 만나 “민주적인 나라에서 정권의 근원이 되는 시민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며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건 헌법에서 정한 내용인데,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둘째, 경호원들이 신씨의 몸을 제압하기 전 손팻말을 빼앗고 입부터 틀어막았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중요한 건 대통령의 신체 경호가 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법한 말이 퍼지는 일이었다. 신씨는 “대통령의 안전보다 심기 중심으로 과잉 경호를 하는 단면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셋째, 경호원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학사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한때 졸업식장에서 신씨를 들고 나간 이들이 동료 학생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아울러 경호원들이 학사복을 무더기로 대여하면서 정작 졸업생이 빌릴 수 있는 학사복이 모자라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는 “1980년대 사복을 입고 학생 사이에 숨어 있던 사복경찰처럼 경호원들이 졸업식 복장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었다”며 “지금이 2024년이지, 1980년대 군사독재 시대냐”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과잉 적용된 형사법과 체포 요건에 대한 문제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박한희 변호사는 “대통령 보호는 필요하지만 법을 적용하는 범위는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라며 “백번 양보해서 행사장에서 격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행범으로 체포하려면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야 한다. 졸업식에 온 학생에게 무슨 도주 우려가 있느냐. 어차피 다 (영상으로) 찍혀 있으니 증거인멸 우려도 없다”고 말했다.
경호처의 ‘과잉 경호’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2023년 6월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축사한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항의했던 문화예술인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같은 해 11월엔 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 건물 밖 건너편에서 손팻말을 들고 과학기술계 알앤디 예산 삭감에 항의하던 이들의 앞을 대형버스 3대를 동원해 막아선 일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과잉 경호는 2024년 들어 ‘심기 경호’로 진화했다. 1월18일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에서 강성희 진보당 의원(전주을)이 윤 대통령에게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다 ‘입틀막’을 당한 일이 시작이었다. 문화방송(MBC) 보도에 따르면, 2월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의료개혁 민생토론회 행사장에서도 윤 대통령에게 필수의료와 관련한 의견을 전달하려던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이 경호원들에게 입틀막을 당하고 쫓겨났다.
경찰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2월8일 서울 용산 엘지(LG)유플러스 사옥 앞에서 손팻말 시위를 하던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엘지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들은 윤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갈 예정이니 시위 장소를 이동해달라는 경찰의 요구를 받았다. 경찰은 이들에게 ‘피켓이 바람에 날아가면 경호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률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 사회가 민주사회로 가려고 한다면 대통령을 절대적 성역으로 간주하는 틀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경호처의 심기 경호는 저항을 부르고 있다. 신민기씨가 윤 대통령에게 호소하려던 “알앤디 예산 복원” 메시지가 되레 동료 카이스트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의 대학원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신씨는 알앤디 예산 삭감으로 “피해를 보지 않은 연구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며 “카이스트에선 예산 삭감 때문에 연구실에 소속된 대학원생들의 인건비를 낮추거나 아예 덜 뽑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원 ㄱ씨도 “연구 네댓 개를 동시에 하는데, (예산이) 안 깎인 과제가 없다”며 “다른 연구자들은 80~90%까지 깎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장기간 연구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한다. 삭감된 예산에 맞춰 연구 규모를 축소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지만, 연구 목표를 변경하려면 별도 위원회를 소집해 타당성 여부를 평가받는 절차 등을 거쳐야 한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2월19일 낸 성명에서 “‘과학 강국으로의 퀀텀점프를 위해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카이스트 졸업식) 축사가 생색이라는 주장은 합리적”이라며 “(알앤디 4조6천억원 삭감) 예산을 짠 대통령과 축사를 한 대통령이 같은 대통령인가, 아니면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것인가”라고 밝혔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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