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이한 제사’. 주민들이 한날한시에 드리는 가족 제사를 이렇게 부르는 마을이 있다. 베트남 중부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 하미마을의 ‘따이한 제사’는 1968년 음력 1월26일이다. 한국군 학살로 희생된 135명의 넋을 기린다. 2024년 하미마을의 따이한 제사일은 3월4일(학살일보다 이틀 앞당겨 제사)이다.
<한겨레21>은 베트남전 파병 60년을 맞은 2024년 1월, 디엔반현 인민위원회의 하미 학살 조사보고서를 번역해 살펴봤다. 1994년 12월 인민위원회 공무원 응우옌흐우동이 하미 학살 생존자들의 진술을 듣고 정리한 ‘하미: 뼈와 피로 가득한 모래’ 보고서다. 그간 <한겨레21>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하미 학살 피해자의 증언과 대부분 일치하며, 학살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한베평화재단이 보유한 원문 자료를 정리나 하노이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 박사과정생이 번역했다.
“조사하거나 심문하지도 않았다. 누가 민간인이고, 누가 비엣꽁(베트콩)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에게 무차별로 남조선군은 기관단총, M79 개인 박격포(M79 유탄발사기), 수류탄을 하미마을 주민 148명에게 쏘고 던졌다. 피가 흘러넘쳤고 모래를 붉게 물들였다. …병사들의 야만적인 고함 속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여성들의 비명이 참혹했다. 시체들이 쌓여갔다. ‘청룡’(Rồng Xanh) 병사들이 배를 찌르거나 척추를 부러뜨려 (시신 더미에서) 몇몇 머리가 풀썩거리며 빠져 나왔다.”
학살을 기록한 보고서 내용의 일부다. 조사자는 “무신년 음력 1월26일” 아침 7시께 남조선군 “청룡” 여단의 약 2개 대대가 각 거점에서 올라와 하미마을의 ‘떠이’와 ‘쭝’ 두 개 부락을 포위했다고 기록했다. 마을 사람들을 총으로 위협해 떠이 부락의 3개 지점으로 몰았다. △응우옌디에우의 집 앞(12명)과 △레티토와이 부인 집의 땅굴(46명) △응우옌빈의 집(74명)이다. 이 외에 동쩨 부락의 나머지 16명은 까오티즈엉 부인의 집으로 모였다. 그 뒤 한국군이 마을 주민을 일제히 학살했다.
조사자는 보고서에서 두 명의 생존자를 소개한다. 팜티호아(당시 40살, 보고서의 괄호는 모두 당시 나이)와 응우옌꼬이(당시 23살)다. 팜티호아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벽녘에 일어났을 때 군인이 많이 와 있는 것을 봤다. …나는 응우옌티씨(5), 응우옌펀(9) 두 아이와 임신 중이던 응오티깟(며느리)과 함께 응우옌마이(응우옌빈)의 집으로 갔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총탄이 쏟아졌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려는데 수류탄이 날아와 터졌다. 두 발이 잘려나갔다. …아이들과 며느리 기척에 귀기울여보았지만 사위가 조용했다. 죽었다. 모두 죽었다. 나는 천천히 기었다.” 생존자 팜티호아는 2013년 6월 87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그 전까지 마을을 찾은 한국인들에게 꾸준히 하미 학살을 증언했다.
방공호에 몸을 숨겨 살아남은 응우옌꼬이의 진술도 보고서에 남아 있다. “1월26일 저녁 6시께, 비밀 땅굴에서 올라왔는데 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몰라 무서워 수풀가를 따라 숨었다. …울음소리가 들려 기어갔는데 레티토와이(응우옌꼬이의 어머니) 집 땅굴에 남아 있던 응우옌탄(5)이 목이 잠길 정도로 울부짖고 있었다. …응우옌티탄(11)이 검댕으로 뒤덮인 얼굴로 울며 말했다. ‘다 죽었어!’ 어머니는 죽었고, 남동생 응우옌떰(8)은 정강이 뼈가 잘렸고 피부만 조금 남아 대롱대롱 붙어 있었다.”
꼬이는 서둘러 다친 떰을 데리고 땅굴 입구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치료받을 때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부상자 10명은 치료를 받으러 이송되기까지 만 하루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중 응우옌떰과 응우옌티씨(5)는 수술을 받으러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몇몇 사람은 감염됐으며 궤양이 생겼다.” 생존자들은 조사자에게 “다친 다리가 구더기로 변하고 나서야 겨우 치료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꼬이는 가족의 주검을 직접 수습해야 했다. 보고서에는 꼬이를 비롯한 8명이 유격대 대원이었다고 적혔다. 다만 꼬이 자신은 남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 어느 쪽도 아니었으며, 징집을 피하려 방공호 등에 숨어 지냈다고 2018년 시민평화법정에서 밝힌 바 있다.
응우옌꼬이가 언급한 생존자 가운데 “아래턱을 잃은 응우옌쭝씨의 딸 응우옌티봉(4)”도 있다. 이 아이는 목이 말라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려고 했지만 마실 수 없었다. 2023년 2월 <한겨레21>이 만난 응우옌티본의 동생으로 추정된다.(제1451호 [영상] ‘초콜릿 주던 ‘얼룩무늬’ 군인이 어느 날 총질을…’ 참조)
이들의 증언은 생존자들이 그간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에 제공한 증언과 대부분 일치한다. 주민을 세 그룹으로 나눠 사살했다거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수류탄을 던졌다는 증언이 공통적이다.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은 “이 자료는 베트남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생존자 진술을 자세하게 복원하려 노력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한국 사회에서 학살이 최초로 논란이 된 시점(1999년)보다 훨씬 전부터 베트남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 갖고 기록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바라보는 조사자의 시선도 담겨 있다. “전략의 대결, 세력 간 분쟁의 한가운데에서 하미는 필연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름으로든 선량한 주민들에게 총을 쏠 수 없다. 그것은 죄악이다! 그리고 미국의 무기와 전략을 가진 조선군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주민들의 피를 뒤집어쓴 죄악은 더욱 끔찍하다.”
하미 학살 외의 다른 학살도 언급한다. “디엔반에는 디엔즈엉뿐만 아니라 디엔토, 디엔안 등이 있었다. 디엔안 주민들의 죽음도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참혹하다. ‘국도1A’에는 간이 서늘할 정도로 산산이 망가진 주검들이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
‘국도1A에 늘어선 주검들’은 1968년 2월12일 발생한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퐁녓 마을 학살(희생자 74명) 직후 주민들이 한국군에 항의하려고 1번 국도에 주검을 늘어놓았던 사건으로 추정된다.
조사자는 이 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깨닫게 하기 위해, 아픔이 현재의 행복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 과거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미 학살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2018년 응우옌티탄의 한국 방문과 시민평화법정 증언, 하미 유족들의 청와대 청원,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등 한국 사회에 과거사 해결을 꾸준히 촉구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신청이 각하된 뒤인 2023년 8월, <한겨레>와 만난 응우옌티탄은 이렇게 말했다. “이 학살은 역사다. 한국 정부가 이 학살의 진실을 받아들이든 그러지 않든 상관없이 명백한 진실이다. 후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을 끝내지 않을 생각이다.”
글·사진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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