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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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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서 온 ‘그놈’ 편지…성폭력 피해자는 살려고 이사해야

성범죄 피해자 정보, 가해자에게 보내지 않게 막는 민사소송법 개정안 통과
손해배상 청구하면 가해자에게 주소·주민등록번호 노출돼 범죄 우려
등록 2023-06-30 12:05 수정 2023-07-05 08:30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성범죄 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약 26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유튜브 채널 ‘문재인 정부 청와대’ 갈무리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성범죄 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약 26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유튜브 채널 ‘문재인 정부 청와대’ 갈무리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라고 합니다.”

10여 년 전 성폭력 가해자의 ‘구치소 동기’라는 자로부터 자필 편지를 받았다. 가해자가 구치소에서 내 이름, 주소 등 개인정보를 늘어놓으며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며 본인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재판이 진행되던 중, 옮기지 얼마 되지 않은 주소지로 배달된 편지였다. 곧바로 해당 구치소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고, ‘가해자와 서신을 보낸 자 모두 서신검열대상자 및 접견입회대상자로 선정해 관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나는 또 이사해야 했다. 그조차 가해자가 수감된 상태에서 민사소송이 종료된 이후, 그것도 승소하고서 배상받기를 포기한 다음에야 가능했다. 이사하거나 배상받으려면 가해자에게 변경된 주소 정보가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시스템은 피해자에게 ‘안전’과 ‘배상’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난 살고 싶었다.

안전이냐 배상이냐, 양자택일 강요하는 사법시스템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어떨까. 형사사건의 경우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한 여러 장치가 생겼다. 수사과정에서 가명조서가 보편화됐고, 인적사항의 일부 혹은 전부를 기재하지 않거나 이미 기재한 정보도 이후에 삭제할 수 있다. 민감한 정보가 담긴 병원 진단서와 진료기록에 대해 정보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도 공소장을 비롯한 각종 기록물의 열람·등사시 개인정보 보호를 조치할 수 있다. 2022년부터는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몰라도 ‘형사공탁’이 가능하게 했다.

그래도 여전히 수사·재판 중 열람·등사 과정에서 피해자 개인정보 보호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피고인 쪽에 넘어간 피해자의 각종 정보를 피고인이나 그 가족, 변호인까지 피해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는 문제가 발생한다. ‘형사배상명령’도 희박한 확률로 인용되더라도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다. 배상명령의 신청과 각하에서는 개인정보 보호가 가능하지만, 인용되는 경우 개인정보 보호 규정이 없어 신청인(피해자)의 정보가 피신청인(가해자)에게 넘어가 보복 협박을 받는 피해 사례가 발생했다.

민사는 더 심각하다. 피해자가 소장을 쓰는 첫 단계부터 개인정보가 노출된다. 소장에 원고(피해자)의 성명(실명), 주소, 연락처, 주민등록번호 등을 기재해야 하고, 그 소장이 그대로 피고(가해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법원이 작성하는 문서(판결·결정·명령서 등)에도 피해자 정보가 기재된다. ‘형사공탁’과 달리 ‘민사공탁’은 공탁자(가해자)가 공탁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피공탁자(피해자)의 주소를 모르면 주민센터에서 피공탁자의 주민등록초본 발급을 신청할 수 있는데, 이때 3개월 이내의 것을 제출하도록 돼 있어 피해자가 민사소송 과정에서 주소를 이전해도 바뀐 주소 등 정보가 가해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를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들은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하거나, 형사소송 과정에서 별도로 민사소송 등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합의나 공탁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위장 전입하거나 법인 주소로 돌리는 등 ‘살기 위해’ 불법행위에 내몰리기도 한다. 이사, 이직, 퇴사, 전학, 자퇴, 개명, 주민등록번호 변경, 전화번호 변경 등 별개의 비용 부담을 강요당하는 것은 물론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 단절 등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피해자 몫이다.

민사소송에서 개인정보 노출 막는 법안, 국민청원 5년 만에 통과됐지만

2020년 사법정책연구원이 낸 ‘민사소송 및 집행 절차에서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연구’를 보면, 국외에서는 민사에서도 주소 등 개인정보 비공개 제도를 운용하며 ‘보복범죄’ 가능성을 낮추려 한다. 프랑스는 일정 요건을 갖추면 범죄 피해자는 제3자의 동의하에 그의 주소를 피해자의 주소로 소장에 기재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피해자의 개인정보는 비밀유지로 얻는 이익을 설명할 수 있으면 법원에 별도 서면으로 제출해 보호할 수 있다.

한국도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있었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에 한 피해자가 ‘성범죄 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해 약 26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이 피해자의 노력으로 제20대 국회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제21대 국회에서도 박주민, 김남국, 서일준, 김영배 의원 등이 유사한 내용의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제20대 국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법안이 계류되다 폐기되는 게 아닌가 했지만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피해자가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사재판의 한계 탓에 부득이하게 선택한 민사소송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넘어가 보복 위협을 받았음이 알려지면서(제1467호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다는 말’ 참조) 피해자 정보 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2023년 6월21일 드디어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소송관계인의 생명 또는 신체에 대한 위해의 우려가 있다는 소명이 있는 경우 해당 소송관계인의 신청에 따라 법원이 소송기록 열람·복사·송달시 소송관계인의 개인정보가 공개되지 않도록 조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계는 있다. 미공개되는 개인정보 범위, 소명 방식, 소송관계인(피해자)의 신청에 의하지 않는 개인정보 보호 방법, 전자소송이 보편화된 민사소송의 특징에 따른 시스템 변화, 배상 집행 절차에서 당사자 특정 문제 등 실무상 다듬어야 할 지점이 존재한다. 피해자 보호를 내세웠던 ‘형사공탁 특례제도’가 오히려 피해자 의사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처럼 개정안이 실무상 어떻게 적용되는지 계속 지켜봐야 한다.

사회는 피해자가 피해를 구제받도록 지원해야

한국에서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 개인정보가 갖는 힘은 매우 크다. 나 역시 가해자가 나와 가족의 개인정보를 쥐고 협박했기 때문에 사건 직후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가해자가 출소한 뒤에는 보복 위험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아졌다. 여러 핑계로 사법시스템 정비를 미루는 사이 많은 피해자가 ‘정보’라는 ‘무기’를 휘두른 가해자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죽음 뒤에야, 혹은 많은 피해자가 죽음에 직면해서야 겨우 입법적 보완의 첫 단계를 밟았을 뿐이다. 성폭력은 생 전반을 흔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에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은 피해자의 권리고, 그 권리를 안전하고 제때 주장할 수 있게 조력해야 하는 것이 시스템의 역할이다. ‘살기 위해’ 소송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없게 노력할 의무가 사회에 있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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