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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엔 관심 없나요

반성폭력 활동가가 펴낸 사법절차 지침서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9년간 피해자와 연대하며 현장에서 배운 지식 담아 사법시스템 비판
등록 2022-07-06 01:10 수정 2022-07-06 09:57
2022년 6월27일 <한겨레21>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한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의 뒷모습. 김진수 선임기자

2022년 6월27일 <한겨레21>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한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의 뒷모습. 김진수 선임기자

“성폭력 피해자는 형사사법 절차에서 당사자가 아닙니다.”

2020년 6월1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의 미국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이 열린 이날,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또 연대자로서 재판 방청 노하우를 배우러 온 일반 시민들 앞에서 그는 무엇이 가능한지보다 무엇이 불가능한지부터 설명했다. “피해자라도 피고인만큼 사건 기록을 볼 수 없어요.” “법정에 피해자 자리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알려주는 것으로 교육은 본격 시작됐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다. 그리고 연대자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어떻게 소외되는지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사법절차를 선택하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사법절차가 그런 피해자를 밀어내지 않는지 감시하고 비판한다. 그는 <한겨레21>에 2년째 쓰고 있는 ‘끝장 프로젝트 너머n’ 연재를 포함해 13년여 동안 직접 몸으로 부딪쳐온 ‘사법 연대기’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동녘)의 출판을 앞두고 있다.

2022년 6월2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만난 마녀는 “분명 200쪽 정도 되는 에세이로 시작했다”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책은 560쪽 내외의 사회과학 서적으로 분류돼 있다. 북펀드 참여자에게 제공하는 굿즈(부록) <성폭력 피해자X의 형사사법 절차 따라잡기>는 320쪽 안팎이다. ‘어떤 법조인이 쓴 책보다 전문적인 성범죄 법률 지침서’라는 한 변호사의 추천사가 이 책의 성격을 설명한다.

2010년 마녀는 ‘법대로’를 선택한 성폭력 피해자였다. 성폭력 피해자는 범죄 피해를 당한 실질적 당사자다. 그러나 수사기관부터 법원에 이르기까지 주변인의 위치에 머무른다. 법원만 해도 검사가 피해자를 대리해 피고인과 다투고 이를 지켜보던 재판부가 결론을 내리는데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그저 증거로서 추궁당할 뿐이다. 사실관계가 잘못된 공소장을 작성한 검사, “피해자라면 저렇게 침착할 리 없다”던 피고인(가해자)의 변호인과 이를 방치한 판사, 출소한 가해자에게 위협을 받았으나 “당하면 오라”던 경찰까지. 마녀는 홀로 싸웠다. 가해자는 여섯 종류, 여덟 건의 보복성 고소까지 걸었다.

‘마녀’의 빼곡한 2022년 다이어리 일정표. 김진수 선임기자

‘마녀’의 빼곡한 2022년 다이어리 일정표. 김진수 선임기자

승소 판결문 외에 모든 게 폐허

모든 민형사 소송이 4년여 만에 마무리됐다.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게 폐허였다. 인간관계가 단절됐다. 직업을 잃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건강이 악화했다. 특히 언어체계가 붕괴됐다. 말하고 글 쓰는 일을 해왔는데 그 말과 글이 무너져 내렸다.

“문장의 주술 호응이 안 맞는 거예요. 억울하고 분하니까 내 얘기를 빠르게 전달하고 싶어서 어구나 단어부터 일단 뱉고 보는 거죠. 내 머릿속에 많은 이야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상대방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요. 상당수 피해자가 겪는 후유증이에요.”

2013년 겨울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 당시 트위터 최대 입력 글자 수는 140자. 단문이어서 오히려 좋았다. 문장 하나에 생각 하나를 전달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가해자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조롱하듯 붙인 ‘마녀’를 아예 활동명으로 삼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내 이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디엠(DM·다이렉트 메시지)이 하나둘 쌓였다. 또 다른 성폭력 피해자였다. ‘재판에 증언하러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변호사 도움을 받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피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공유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에 피해자의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다. 2014년 피해자와 본격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연대활동에 나선 구체적인 그 마음이 궁금해요.

“제가 혼자 되게 외롭고 서러웠거든요. 내가 지금 하는 게 맞는지, (가해자 처벌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고 그동안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컸어요. 매 순간 긴장 상태인 거예요. 다른 피해자는 그때의 저와 같지 않기를 바랐어요. 사법절차를 잘 몰라서 불필요하게 억울해하는 부분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판사가 소송 지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추가 가해를 방치하는 것과 재판상 필요해서 관련 절차를 밟는 건 다르거든요. 피해자들이 후자를 억울해하지 않도록 설명해줄 수 있는 거죠.”

각 절차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 같은데요.

“전문가들은 (그런 정보를) 그들의 시각과 입장에서 툭툭 던져놔요. 당연한 것 아니냐, 그것도 모르냐 하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게 아니거든요. 알 수도 없고요.”

과거 본인의 경험이 바탕이 됐네요.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엄벌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사법절차에) 참여시켜주고 이해시켜달란 거죠. 결과를 수용할 수 있도록요.”

온라인 특성상 공격도 받았다. 법을 전공했다는 사람들이 전문성을 걸고넘어졌다. ‘변호인과 변호사의 차이가 뭔지는 아냐.’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잘못 알고 있다.’ 그런 시비들은 성폭력 가해자에게서 받은 직접적인 위협에 비하면 “우스웠다”. 주장의 출처를 찾아가며 반박하거나 모르는 정보는 “고맙다”고 수긍했다. 오히려 공부의 기회로 삼았다.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높은 이해도, 설득력 있는 비판으로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사법 시스템을 통한 연대는 전문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제가 전문가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요. 해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적어도 어떤 상황인지 피해자에게 설명해줘야 하잖아요. 피해자 옆의 전문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요. 각 잡고 공부한 게 아니라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마녀의 첫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표지 이미지(왼쪽). <성폭력 피해자 X의 형사사법 절차 따라잡기>는 지연고소와 보복성고소 대처법을 320쪽에 걸쳐 담은 실용서다. 온라인서점 알라딘 북펀드의 참여자에게 제공하는 굿즈(부록)다.

마녀의 첫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표지 이미지(왼쪽). <성폭력 피해자 X의 형사사법 절차 따라잡기>는 지연고소와 보복성고소 대처법을 320쪽에 걸쳐 담은 실용서다. 온라인서점 알라딘 북펀드의 참여자에게 제공하는 굿즈(부록)다.

“돈 개입되면 시비 생겨” 후원도 거절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 사건, 문화예술계 성폭력 폭로, 2018년 미투 운동이 연달아 일어났다. 침묵하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가해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보복성고소로 응대했다. 마녀의 연대도 ‘지연고소’(성폭력 피해로부터 시간이 흘러 고소하는 것)를 지원하거나 ‘보복성고소’에 대응하는 두 분야에 집중됐다.

전국의 법원과 수사기관을 돌아다니며 피해자의 ‘그림자’를 자처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에는 ‘n번방 사건’이라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배우 조덕제를 둘러싼 사건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건의 진행 상황이 빼곡히 적혀 있다. 모두 1인 활동가로 연대한 기록이다. 얼굴, 이름, 직업 모두 철저히 비공개인데 후원도 일절 받지 않았다.

연대활동만으로도 벅찰 텐데 어떻게 본업과 병행할 수 있나요.

“다들 궁금해해요. 다른 활동가들은 코인이나 주식 하는 거 아니냐 농담도 하고요.(웃음) 2018년까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본업 끝나고 집에 오면 자정이 넘는데, 피해자와 소통하다보면 새벽 4~5시가 돼요. 2~3시간 쪽잠 자고 다시 일 나가고. 틈틈이 아르바이트 두 개 뛰고. 주말도 없었죠. 다시는 그렇게 못해요.”

후원을 받아도 되잖아요.

“귀찮았어요. 돈이 개입되면 시빗거리가 생겨요. 그런 일에 시간 빼앗기느니 피해자에게 집중하는 게 낫죠. 고맙다고 편지에 뭘 끼워주는 피해자도 많았는데 다 돌려줬어요. 그 돈이 피해자들한테 어떤 돈인지 알거든요. 단돈 얼마가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니까요.”

수사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형사사법 절차의 전 과정을 들여다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피해자 신변보호, 주거와 생활비 등 경제적 지원, 의료 지원, 직업교육 등 사회 복귀 지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일상의 재구성에 사회는 관심이 없어요. ‘회복적 사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도 피해자에게는 실질적인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렇다면 ‘응보적 사법’은 제대로 하나요? ‘법대로’ 하는 건 피해자에게 여전히 잃을 게 많은 선택지일 수밖에 없죠.”

철옹성 같은 검찰·법원을 움직이다

철옹성 같던 사법부나 수사기관의 담장에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 건 2019년이다. 담장 내부에서 변화의 동력이 감지됐다.

2019년 9월 한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한 판사가 보낸 것이었다. 그 보수적인 집단에서 자격증도 없고 직함도 없는 개인 활동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2019년 12월 그는 법원 내 연구모임인 젠더법연구회 판사 20여 명을 만났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자 연대자로서는 최초였다. 그 자리에서 피해자 증인신문 시나리오를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피해자 친화적으로 보완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뒤 전문가와의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2020년 9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포럼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보호법익, 재판실무, 시민사회의 시선으로’ 발제자로 참여하거나 2021년 2월과 7월 법무연수원에서 진행된 신임 검사 교육에 초빙되는 식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본 형사사법 절차를 이야기한다.

“익명의, 더구나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를 외부 강사로 초대하는 속내가 어떻든 제안은 다 받아들여야죠. 변화는 타이밍이잖아요. 내부에서 변화의 동력이 있을 때 외부에서 함께 가줘야죠.”

그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피해자 보호 및 지원제도에 대한 실질적 검토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 일례로 피고인과 피해자의 접촉을 차단한다고 할 때 법조인들의 인식은 차폐막으로도 충분하다는 데 그친다. 피해자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그를 통해 피해자의 목소리가 담장 안으로 공유되면서 법정 풍경이 달라진다.

질문받던 피해자에서 질문하는 피해자로

마녀는 그의 책이 형사사법 절차 전문가들이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가교가 되길, 피해자에게는 사법절차의 안내서가 돼주길 바란다. 6월22일 시작한 북펀드는 일주일 만에 500명 넘게 참여해 목표액의 5배(1천만원)를 훌쩍 넘겼다. 7월20일 출간 예정이다.

그렇게 비판하면서도 형사사법 절차 개선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어린 나이에, 주변의 지지 기반이 없는 가장 취약한 피해자는 어디를 찾아가야 할까요. 결국 그런 피해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스템(형사사법 절차)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 형사사법 절차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건 그 절차를 신뢰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활동 방향은요.

“피해자는 계속 질문을 받던 위치잖아요. 역으로 질문을 계속할 거예요.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말 자체가 옳은지에 대해서요. 너무 당연하다고 단언하는 명제를 뒤집는 거죠. 결국 형사사법 절차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으로 나아가겠죠. 사람 생각이 쉽게 바뀌겠어요? 그 사람들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그런 질문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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