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만큼 보상받는다’는 일견 공정하다고 느껴집니다. 능력주의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0대의 대학 졸업 시절은 운이 좋았습니다. 학점이 낮아도, 자격증 하나 없어도 좋은 직장에 안착했습니다.
반면 20~30대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치열한 입시와 학점 경쟁, 끝없는 자기계발 뒤에도 취업이 어렵습니다. 이들이 간단한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세대가 요직을 차지하는 게 부당하다고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오늘은 능력주의 사회의 보상이 정말 능력에 따른 것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능력주의의 부작용도 생각해보겠습니다.
쑥스럽지만 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능력주의의 요소 중 하나인 시험을 가장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의사이자 경제학자로,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코넬대학 교수이자 아시아 정상권 학교인 홍콩과학기술대학 교수입니다. 의학과 경제학의 최전선에서 전쟁하는 기분으로 치열하게 연구하며 살았습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꽤 괜찮은 학문적 성취도 이뤘습니다. 이 성취는 오직 제힘으로 이룬 걸까요?
저는 1996년 의과대학에 (거의) 꼴등으로 합격했습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야 합격증을 받아, 신입생 환영 엠티(MT)에 겨우 시간 맞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막히게 운이 좋은 축에 속했습니다. 뒷문을 닫고 들어갔지만 의과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아픈 걸까” 고민하던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박사 과정을 지원했습니다. 제게 선망의 대학이던 미국 컬럼비아대학은 보통 좋은 대학의 학부 과정 학점이 4.0 넘는 수재들만 입학합니다. 그러나 제 의과대학 성적은 그보다 크게 낮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컬럼비아대학으로 한국인 교수가 부임해 박사 과정 입학을 주관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의과대학이 특별히 경쟁이 심하니 제가 학점이 좀 낮아도 뛰어난 학생일 거라 추측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은 한 번 더 바뀌었습니다.
박사 과정에서 저는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재들로 인해 주눅이 들었습니다. 첫해 성적은 하위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스트레스는 성적이 낮은 하위 20% 정도의 학생을 퇴학시키는 박사 종합시험이었습니다. 저는 합격과 불합격의 경계를 맴돌았지만, 마지막에 극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면서 코넬대학 교수로 채용됐습니다. 지원자 수백 명 중에 최종 후보자 4명을 선발해 사흘에 걸쳐 압박 면접을 합니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던 일, 너무 긴장해서 먹은 것을 호텔방에 다 토했던 일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제가 최종 낙점된 데는 지도교수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제가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던 중 안식년으로 코넬대학에 초빙교수로 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엔 지도교수를 만나기 힘들다고 불평했습니다. 이후 저희 과는 제 지도교수를 채용하려 했는데, 지도교수는 그 자리에 자기 대신 저를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이렇게 행운의 연속이었습니다. 대입 시험과 박사 종합시험에 겨우 합격했으며, 박사 과정 입학과 아이비리그의 교수가 된 것은 저를 도와줄 누군가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운은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태어나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운은 ‘어디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세계은행 출신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태어난 나라가 평생 소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Branko Milanović, , 2015). 태어난 나라의 평균소득과 불평등지수만으로 성인기 소득의 최소 50%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저개발 국가에서 태어나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성공할 가능성이 작습니다.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고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직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업가로 성공하기도 매우 힘듭니다. 자본도 부족하지만 부패와 법 집행의 자의성, 불합리한 규제, 인프라 부족 등 넘어야 할 산이 많고 높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만나는 운은 ‘부모’입니다. 사람의 성취와 행동에서 유전 요소와 환경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본성과 양육’ 논쟁이라고 합니다. 유전 요소가 중요하다면 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환경 요소가 중요하다면 아이의 운명을 바꿀 여지가 더 많을 것입니다.
부모는 유전·환경 요소를 모두 제공하므로 둘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입양된 아이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다트머스대학의 브루스 새서도트가 홀트아동복지재단을 통해 미국에 입양된 대한민국 출신 아이들을 추적 조사한 연구가 유명합니다(Bruce Sacerdote, , 2007). 양부모가 입양할 아이를 고를 수 없으므로 아이들은 사실상 무작위로 입양가정에 배정됐습니다. 입양자녀는 부모에게 환경만을 제공받고, 친자녀는 유전과 환경을 모두 받으므로 이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친자녀들 간의 상관관계는 교육수준이 0.378, 소득이 0.277인 데 비해 친자녀와 입양된 아이의 상관관계는 이보다 낮은 0.157(교육), 0.110(소득)입니다(표1). 이것은 환경이 동일하더라도 유전 요인이 교육과 소득에 상당히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논문은 유전이 교육 연한의 44.3%를, 소득의 32.4%를 설명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또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유전자를 물려받고 부모가 어린 시절 환경도 상당 부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자기가 결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도 명백히 운입니다. 그렇기에 “인생 성취의 8 할이 운이다”는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성취의 또 다른 척도인 ‘건강’도 운이 중요합니다. 우선 태어난 나라가 기대수명을 크게 좌우합니다. 그 나라의 소득수준과 의료시스템 등이 기대수명에 영향을 주지요. 몇 년 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은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18가지 주요 암의 발생 요인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Tomasetti, Li, and Vogelstein, , 2017). 크게 유전, 환경, 세포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요소가 암 발생 요인입니다. 연구 결과 암 발생의 50% 이상이 우연에 기인합니다. 게다가 부모가 물려준 유전도 운이지요. 사람의 노력으로 예방할 수 있는 환경 요인은 4분의 1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의 건강도 운이 8할을 좌우합니다.
다음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칠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입니다. 칠레대학과 칠레가톨릭대학은 칠레의 명문대학인데, 인문계의 경우 경영학과 법학 전공이 인기가 많습니다. 입학 자격은 철저히 시험 성적으로 정해집니다. 이곳을 졸업한 1.8%가 주요 기업 요직의 41%를, 상위 0.1% 소득자의 39%를 차지합니다.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나라도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임원의 25%가 이른바 ‘스카이(SKY)대학’ 출신입니다. 여기까지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이 틀린 거 같지 않아 보입니다.
세스 지머먼 미국 예일대학 교수의 연구는 명문대 진학의 과실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Zimmerman, , 2019). 그림1은 칠레의 명문대에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로 입학한 학생과 간발의 차이로 탈락한 학생의 졸업 뒤 상위 0.1% 고소득자 혹은 기업 임원이 될 확률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다른 특성들은 매우 비슷하나 특정 사건(입학 커트라인)으로 운명이 바뀐 사람을 분석하는 것을 ‘회귀 불연속 설계’(Regression Discontinuity Design)라 합니다.
윗줄 왼쪽 그림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각 점은 고소득자가 될 확률을 입시점수별로 본 것입니다. 가운데 붉은 선이 명문대 입학 커트라인입니다. 아깝게 탈락한 학생은 붉은 선 바로 왼쪽에 있고, 운 좋게 간발의 차이로 합격한 학생은 붉은 선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붉은 선 바로 양옆에 있는 학생들은 대입 시험 점수 차이가 거의 없어 능력은 비슷합니다. 유일한 차이는 커트라인으로 인한 명문대 합격 여부입니다. 그래서 명문대 합격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볼 수 있죠.
‘명문대 효과’도 사립고 출신 남성에 쏠려왼쪽 그림에서 초록색 네모는 전체 평균 효과이고, 붉은색 동그라미는 남학생, 푸른색 마름모는 여학생의 경우입니다. 명문대 입학은 고소득자가 될 확률을 50%가량 상승시킵니다(1.4%에서 2.1%로 증가). 그런데 이 효과는 남자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여성이 고소득자가 될 확률은 남자보다 낮고, 명문대에 진학하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출신 고등학교별로 나눠본 것입니다. 초록색 동그라미는 학비가 비싼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이고, 붉은색 마름모는 일반 공립학교를 나온 학생입니다. 놀랍게도 명문대 진학 효과는 사립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아랫줄 두 그림은 기업 임원이 될 확률을 분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명문 사립고등학교 출신 남자만이 명문대에 진학한 효과를 독차지함을 보여줍니다.
칠레의 연구는 인생의 성공에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줍니다. 시험 점수 1점 차이로 고소득자가 될 확률이 50%나 증가하니까요. 그리고 사회에서의 보상이 결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칠레만의 일일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혀 이런 분석을 할 자료를 정부가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서울대 진학의 효과가 인생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는지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실은 일부 명문고 출신에 집중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코넬대학 동료인 로버트 프랭크 교수는 2016년 낸 책 <성공과 운>(Success and Luck)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 부작용이 큽니다. 자기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 믿을수록 세금 납부에 더 적대적입니다.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실패한 사람을 운이 나쁘기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므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소극적입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성취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런 믿음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던 것은 8할 이상이 공동체와 다른 사람 덕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제시한 제비뽑기에 의한 대학 입시 방안에 적극 찬성합니다. 명문대 지원 학생 중 합격자 대비 세 배수 정도는 우열을 쉽게 가리기 어려울 만큼 모두 훌륭합니다. 이들을 더욱 촘촘히 줄세우기보다 제비뽑기로 입학시킴으로써 본인 인생에 얼마나 운이 크게 작용하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도와주고, 성공이 스스로 얻은 게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명문대생의 태도와 인식을 바꾸는 건 우리나라가 장기적으로 복지국가로 가는 데 도움이 될 터입니다.
오늘은 제가 오래 재직했던 코넬대학을 사직하는 날입니다.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를 스스로 그만두는 결정은 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오는 느낌이지요.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것이 대부분 내가 이룬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젯밤 침대에 함께 누운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수온아, 인생 성공의 8할이 운이래. 아빠의 별거 아닌 성취도 사실 대부분 운이야. 내 힘으로만 이룬 게 아니니까 겸손하게 살아보자. 그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좌절하지 말자. 운이 좀 나빴던 것뿐이야. 또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살자꾸나. 혹시 성취를 스스로 이룬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렴.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니까.”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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