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직장인 박지현씨는 출퇴근에 부쩍 신경 쓰입니다. 최근에 어렵게 임신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안합니다. 지하철의 나쁜 공기도 걱정이고 전쟁 같은 출퇴근과 빡빡한 직장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걱정입니다.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임신 환경이 아이에게 중요하다는 말은 고릿적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얼마나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지현씨처럼 걱정하고 오늘을 보내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만 25만 명입니다.
지현씨의 고민은 경제학자에게도 중요한 관심 분야입니다. 만일 임신 환경이 태아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면, 엄마와 태아를 보호하는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임신 환경이 태아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은, 100년 전 스페인독감이 대유행할 때 엄마가 독감에 걸린 태아의 삶을 연구한 2006년에 비로소 과학적으로 입증됐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경제학자 더글러스 앨먼드는, 1918년 가을부터 대유행해 당시 세계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5억 명이 감염됐고 최대 5천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독감에 주목했습니다(
Almond·2006). 임신부의 독감 감염이 태아 삶에 미치는 영향을 미국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를 활용해 수십 년 추적 조사했습니다.독감 감염이 태아 삶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유전적 요인, 부모 성향, 사회경제적 수준 등 모든 특징이 비슷한데 오로지 엄마가 독감에 걸렸다는 점만 다른 사람들을 찾아 비교해야 합니다. 앨먼드는 미국에서 1918년 8~9월 독감 사망자는 극소수였으나 10월에 무려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착안했습니다(그림1). 팬데믹 직전에 태어난 아이들과 팬데믹 중에 태아인 아이들을 비교했습니다. 1918년 9월 이전에 태어난 아이들과 10월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임신 중 독감에 걸릴 확률은 매우 다릅니다.
연구 결과는 임신 환경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림2는 출생연도별 고등학교 졸업률을 표시한 것입니다. 점점 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가운데 움푹 파인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독감 대유행 시기에 태아였던 사람입니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독감 대유행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습니다.
이들이 60대가 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림3은 출생시기(분기)별로 1980년에 신체적 장애 비율을 보여줍니다. 점들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건 나이가 적을수록 장애 비율이 낮다는 걸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불쑥 튀어나온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독감 대유행 시기에 태아였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독감 대유행 전후 태어난 사람들보다 노년기의 장애 비율이 상당히 증가했습니다.
또한 독감 유행은 주별로 크게 달랐습니다. 가령 캔자스주는 위스콘신주보다 인구당 사망률이 10배가량 높았습니다. 이렇게 팬데믹 기간에 독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주와 적게 받은 주를 비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임신부가 독감에 걸린 경우 태아의 고등학교 졸업 가능성은 15% 낮았습니다. 남성의 임금은 5~9% 낮았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이는 15% 많았습니다.
이 결과를 코로나19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스페인독감과는 많이 다릅니다. 스페인독감은 ‘사이토카인 폭풍’(인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면역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 분비돼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현상) 같은 신체 반응으로 인해 젊은이(25~34살)의 사망률이 현격하게 높았습니다. 반면 코로나19는 젊은 임신부에게 대체로 큰 증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한 100년 전에 비해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비슷한 결과를 암시하는 연구는 이미 10년 먼저 나왔습니다. 영국 의사 데이비드 베이커는 100년의 먼지가 잔뜩 쌓인 병원의 출생 기록을 조사해서 도출한 결과를 1995년 <영국의학저널>에 발표했습니다. 출생체중이 큰 태아가 60대가 됐을 때 만성질환(심혈관 질환과 당뇨병) 발생이 현격하게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그는 출생체중이 임신 환경을 보여주는 지표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성인 질병의) 태아 기원 가설’(Fetal Origin Hypothesis)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는 한동안 ‘가설’로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관성과 인과성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죠(팁 참조). 노년기 만성질환 발병이 임신 환경이 아니라 다른 것에 기인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유전적 요인으로 무겁게 태어나고, 동시에 좋은 유전자 덕분에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한편 엄마 탓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담배를 피우는 임신부 아이는 저체중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흡연자 엄마는 건강·교육 등 다양한 측면에서 아이를 제대로 돌볼 확률이 낮지요. 결국 엄마로 인해 몸무게가 작게 태어나고, 성장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는 늙어서도 만성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임신 환경과 노년기 질환은 연관성은 있지만 인과성은 없는 셈입니다. 한동안 태아 기원 가설은 심증은 있으나 정확한 물증이 없었습니다.
더글러스 앨먼드는 스페인독감 논문 이후, 체르노빌 사건을 분석해 임신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금 보여줬습니다(Almond, Edlund, and Palme·2009). 1986년 4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능이 유출됐습니다. 누출된 방사성물질 중 세슘-137과 아이오딘-131 등이 대기권으로 방출됐습니다. 이 중 일부가 빗물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사람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바람이 서쪽으로 불었던 탓에 체르노빌 서쪽 지역이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수천㎞ 떨어진 북유럽의 스웨덴도 피해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그림4는 체르노빌 사건 당시 스웨덴의 시·군·구별 세슘-137 노출 정도입니다. 방사성물질에 많이 노출된 곳은 진한 색, 적게 노출된 곳은 연한 색으로 표시됐습니다. 세슘 노출 정도는 바람 방향과 사건 당시 강수량으로 결정됐습니다. 체르노빌의 원자력 바람이 불어오던 때, 마침 사는 곳으로 바람이 불면서 동시에 비가 내린, 가장 불운한 지역이 진한 색으로 표시됐습니다. 세슘-137에 가장 많이 노출된 곳이지요(이런 상황을 자연실험이라 합니다).
이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출생체중이나 유소년기 질병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부터 차이가 났습니다. 스웨덴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합격률이 90%에서 87%로 낮아졌습니다. 중학교 졸업 학점의 전국 평균이 12.78인데, 많이 영향받은 지역 아이들의 평균이 12.24였습니다. 가장 차이가 큰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전국 평균이 11.96인데, 피해 지역 아이들은 11.29였습니다. 아버지 학력이 전문대 졸업 이하인 아이들에게 부정적 효과가 집중됐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3년제 이상 대학을 나온 집 아이들은 태아기 방사성물질 노출로 인한 영향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쁜 영향이 성장 과정에서 희석됐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전쟁도 태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Lee·2014). 서울대 경제학과 이철희 교수는 1951년 전쟁이 한창일 때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학력이 더 낮고 좋은 직업을 가질 확률도 상당히 낮아졌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림5는 2006년 조사한 출생연도별 전문직·비숙련 노동자 비율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전문직 종사자 비율이 늘어나고, 비숙련 노동자 비율은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존재합니다. 바로 1951년생입니다. 이들은 전쟁 전후 세대에 비해 전문직 비율이 더 낮고 평생을 비숙련 노동자로 어렵게 산 사람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겪은 아이들의 삶은 전쟁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더 고달팠습니다.그런데 독감 감염, 방사성물질 노출, 전쟁은 너무 극단적인 사건이 아닐까요?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후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태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했습니다. 라마단(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식사·흡연·음주·성행위 따위를 금함) 관습은 임신기에 불충분한 영양 섭취로 이어지는데, 이에 영향받은 태아는 성인이 돼서 장애인이 될 확률이 20%나 높아졌습니다(Almond and Mazumder·2011). 균형 잡힌 영양 섭취는 태아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임신 환경은 물질적 요인뿐 아니라 심리적 요인도 중요합니다. 임신 중에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은 산모의 아이는 어떨까요? 청소년기에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에 걸릴 확률이 25% 늘고, 성인이 되어 불안장애·우울증 약을 먹을 확률이 각각 13%, 8% 늘었습니다(Persson and Rossin-Slater·2018).
좋은 정책은 아이들의 삶을 개선합니다. 1970년 제정된 미국 대기오염 방지법(1970 Clean Air Act)은 획기적인 규제였습니다. 공해물질 감소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법안이 도입된 뒤 총부유입자(Total Suspended Particles·공기 중 100㎛보다 작은 모든 입자)가 95.9㎎/㎥에서 8~12㎎/㎥가량 줄었습니다. 줄어든 공해물질의 혜택을 본 태아는 30년 뒤 어른이 되어 소득이 1%가량 늘었습니다(Isen, Rosin-Slater and Walker·2017). 공해물질이 뇌발달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교육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반면 나쁜 정책은 아이들의 삶을 악화합니다. 1967년 스웨덴 정부는 다른 술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은 맥주를 더 장려하려 했습니다. 몇몇 주에서 맥주를 일반 슈퍼에서도 팔 수 있게 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다른 술 소비의 변화는 없었는데, 젊은이들 사이에 도수 높은 맥주의 소비가 무려 5배 늘었습니다(그림6). 깜짝 놀란 정부는 황급히 정책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정책을 펼친 시기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전국 평균 83.4%보다 낮은 77.1%였습니다. 대학 졸업 비율도 19.3%에서 16.1%로 줄었습니다. 성인이 됐을 때 임금은 무려 24% 줄었습니다. 이 끔찍한 결과는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Nilsson·2017).
임신 환경은 태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태아기는 뇌를 포함한 중요한 장기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또 부모에게 유전자는 이미 받았지만 후생유전학적 변화가 큰 시기입니다. 최근 자연실험을 활용한 연구로 우리는 태아를 바이러스 감염, 음주, 흡연, 영양 불균형, 스트레스, 대기오염 등에서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됩니다. 그렇기에 임신한 여성과 태아를 지켜주는 정책은 불평등 개선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태아 보호 정책은 상당히 미흡합니다. 2021년 지현씨와 배 속 아이는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아를 위한 정부 지원은 출산 비용 지원이 사실상 전부입니다. 정부 지원은 대부분 출산 이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현씨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직장은 중요한 환경 요인입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가운데 업무 환경이 가혹한 편이지요. 노동시간이 길고, 출퇴근이 고단하며, 불필요한 회식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적극적으로 덜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임신 기간에 노동시간 단축은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만 가능하고, 하루 2시간뿐입니다. 그조차 눈치가 보이지요.
임신부는 모든 임신 기간에 휴가를 유연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육아휴직을 임신 기간에 쓸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된다고 합니다. 긍정적 변화입니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육아휴직 기간을 출산 뒤 1년이 아닌, 임신 뒤 2년으로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상적인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상징적 구호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무덤까지’로 다시 쓰여야 합니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미국 코넬대학 정책학과 교수
*‘사람을 위한 정책, 배 속에서 무덤까지’는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 미국 코넬대학 정책학과 김현철 교수가 다양한 인적자본(보건·교육·노동) 정책을 연구, 평가하는 칼럼이다.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의사이자 경제학자로 사회실험, 자연실험, 빅데이터 연구를 하고 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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