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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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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용기에 응답하고 있는가

여전히 높은 사법의 장벽… 피해 형사고소해도 불기소 처분하거나,
1심 징역형이 2심에서 감형되는 경우 많아
등록 2021-03-01 13:12 수정 2021-03-03 15:53
2018년 4월, 서울 노원구 용화여고에서 학생들이 성폭력 교사를 비판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WITH YOU’ 등의 글자를 창문에 붙였다. 용화여고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스쿨미투’가 이어졌다.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 제공

2018년 4월, 서울 노원구 용화여고에서 학생들이 성폭력 교사를 비판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WITH YOU’ 등의 글자를 창문에 붙였다. 용화여고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스쿨미투’가 이어졌다.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 제공

“왜 그런 방법을 쓰는 거야?” 서지현 검사를 비난하며 검사들은 수군거렸다고 한다. 성추행 가해자를 상대로 형사·민사 가리지 않는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정반대의 이유로 공격받았다. “왜 형사고소는 안 하는 거야?” 질문을 빙자해 비난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성추행 사건을 정의당 내부에서 ‘공동체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사법적 해결’은 양가적이다. 사과하지도, 책임을 인정하지도 않는 가해자를 단죄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하지만 ‘보루’(튼튼하게 쌓은 구축물)가 ‘장벽’이 되기도 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어, 기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일관되게 진술해야 한다. 실제 피해 사실이 있었느냐와 무관하게 가해자에게 자칫 ‘무죄’라는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될지 몰라서다.

“왜 그런 방법을 써?” vs “왜 고소 안 해?”

첫 ‘스쿨미투’로 주목받은 서울 노원구 용화여고 사건은 ‘사법적 해결’이 얼마나 지난하고도 험한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2018년 4월6일, 용화여고 건물 창문에는 ‘#WITH YOU’ 등의 대형 글자가 나붙었다. 학생들이 포스트잇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앞서 졸업생을 중심으로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가 구성돼 페이스북 등에서 성폭력 사례를 모으는 것을 응원하는 움직임이었다. 졸업생과 재학생이 교사에게 당한 성희롱, 성추행 사례가 200여 건 접수됐다. 서울시교육청이 감사를 벌여 교사 18명이 징계됐다.

피해자 5명은 좀더 용기를 냈다. 가해 교사 ㄱ씨를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형사고소했다. 그러나 2018년 12월,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ㄱ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과 피해자들이 재고소와 탄원서 제출, 1인시위 등을 벌인 끝에 2020년 5월에야 ㄱ씨는 기소됐다. ‘창문 미투’ 이후 3년 가까이 지난 2021년 2월19일, 서울북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마성영)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고 ㄱ씨를 법정 구속했다. 징계받은 교사 18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가해자는 ㄱ씨뿐이다.

졸업생 김한나(가명)씨는 지난 3년간 이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왔다. 비슷한 피해를 겪은 친구들과 함께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를 꾸려 다른 피해 사실을 모으고 언론에도 알렸다. “(교사 성폭력이) 오랜 기간 학교에서 일어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다음이 더 힘들었다. “피해자이기도 한 우리가 다른 피해자를 찾아나서고, 경찰에서 진술하도록 안내하는 과정이 많이 어려웠다. 교육청이나 경찰이 했어야 하는 일을 피해자가 모두 감당해야 했다.”

진술을 포기한 피해자도 많았다. “재학생과 졸업생 전수조사에서 나온 피해사실 252건 가운데 186건이 ㄱ씨와 관련됐는데, 재판에서는 성추행 12건밖에 다루지 못했다.”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최경숙 활동가는 “재학생들이 성추행당했다고 신고한 계약직 교사는 형사처벌되지도 않고 계약 해지되는 데 그쳤다. 다른 교육기관에 재취업해도 사실상 막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스쿨미투 가해자 1심 징역 3년, 항소심 집행유예형

용화여고에서 쏘아올린 작은 공은 전국으로 날아갔다. 교육부가 파악한 교사-학생 간 성폭력 사건은 2018년부터 2020년 7월 사이에만 333건에 이른다(이은주 정의당 의원실 자료). 하지만 처벌은 미미하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낸 끝에 받아낸 자료에 따르면, 스쿨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 48명 가운데 직위해제된 교사는 12명에 그쳤다.

최경숙 활동가는 ㄱ씨가 항소심에서 감형될까봐 걱정한다. 앞서 충북여중 스쿨미투 사건에서 가해 교사 ㄴ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020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ㄴ씨는 학생 5명을 11차례 성추행했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양지혜 사무처장은 “스쿨미투는 익명 고발이 대다수여서 사법절차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고소할 의사가 있더라도 경찰이 ‘부모님을 불러와야 한다’고 해서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나 교육청이 (스쿨미투 이후에도) 통합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하지 못해, 청소년들이 사건화 이후 과정을 혼자 견디거나 고소·고발 뒤 정보에서 배제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57년을 기다렸지만 ‘사법적 해결’이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사법기관과 사법제도가 변하지 않으면 후세까지 나 같은 피해가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절박한 생각에 이 자리까지 왔다.” 2020년 5월6일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하며 최말자(75)씨는 말했다. 최씨는 1964년 성추행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잘리게 했다는 혐의(중상해)로 옥살이하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됐다.

최씨는 어렵게 용기를 냈지만, 재심 청구는 기각됐다. 2월17일 부산지법 형사5부(재판장 권기철)는 “성차별적 인식과 가치관이 지금만큼이라도 옅어져 있었다면, 청구인(최씨)을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최씨가 불법구금되고, 혀가 잘린 가해자가 베트남 파병 등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는 점 등은 ‘새로운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 최씨 변호인단의 김수정 변호사는 “시대 운운은 재판부의 변명에 불과하다”며 “즉시 항고하겠다”고 밝혔다.

강간·추행 형사재판 무죄율 5년 전보다 높아

“미투 운동 이후 용기 내는 피해자가 많아졌지만 사법기관이나 제도, 조직문화 등이 피해자의 용기에 어느 정도 응답하고 변화하는지는 의문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는 일부 판결이 나오고 국회에서 강력한 처벌 조항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법이라는 장벽은 높다”고 했다. “강간·추행 관련 형사재판에서 무죄율이 5년 전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일상적인 문화와 권력관계가 법과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진전된 법·제도가 피해자에게 오히려 더 큰 장벽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를 지낸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가 정의당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민했던 지점이다. “형사사건에서는 법조항의 엄격한 해석 탓에 피해자의 권리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해결 방식은 사법적 해결보다는 조직 내부에서의 해결을 통해 더 가능하다고 본다.”

“왜 피해자라는 좁은 틀로만 (나를) 규정하려는 거죠?” 김한나씨는 물었다. “‘나 억울해요’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스쿨미투 활동가, 공익제보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인다. 무력한 피해자 이미지 대신 주체적인 우리 모습이 좀더 비쳤으면 좋겠다.” 피해자들은 장벽을 스스로 깨고, 한 걸음 더 앞장서 나아가는 중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기획 - #미투 그후 3년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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