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스타트라인에서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지만 단거리 육상 선수 기선겸(임시완)은 뛰지 않았다. 만년 2등이지만 유명 부모와 ‘잘생김’ 덕에 셀럽(유명인) 위치를 점한 기선겸은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속에 말했다. “제가 후배들을 폭행했습니다.” 드라마 <런온>의 한 장면이다.
국가대표 운동부 내에 존재하지만 결코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 선수 간 폭력과 지도부의 묵인을 알리기 위해 주인공은 자신의 (만들어낸) 폭행을 자진 신고했다. 드라마 설정상 뭘 잃어도 아쉬울 게 없는 인물이지만, 신고 이후 그는 선수 자격과 선수로서 유지해온 일상을 박탈당한다. 반면 그가 알리려 했던 다른 가해자들의 일상은 그저 잔잔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내부 공익신고자들이 떠올랐다. 내부 공익신고자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신고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카메라 세례 속에 있는 것처럼 신원이 까발려지고, 배신자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내부 신고자는 양심 등 여러 이유로 신고하지만, 상사 지시로 혹은 관행적으로 자신도 불법행위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신의 처벌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공익신고자 보호법은 내부 공익신고자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한 보호·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보상금은 내부 신고자만 신청해서 받을 수 있다. 공익신고나 부패 신고를 해 국가의 재정 회복 등이 이뤄진 경우, 그 금액의 30%까지 보상금으로 받을 수 있다. 내부 신고자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변호사를 통해 대리 신고하는 비실명대리신고 제도도 2018년 도입됐다.
비실명대리신고를 하면, 변호사가 공익신고자 인적사항 등을 봉인해서 신고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에 제출한다. 봉인된 인적사항은 국민권익위원회도 신고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열어볼 수 없다. 위원회가 해당 신고 건을 다른 행정기관이나 수사기관으로 이첩할 때도 신고자 동의 없이 봉인된 인적사항은 전달되지 않는다. 법이 정한 신고와 처리 절차만 읽어보면 비실명대리신고는 얼핏 신고자 신분 보호의 절대반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수많은 허점이 있다. 그 허점은 꽤 결정적이다. 공익신고자 신원 노출은 사실 신고 접수 단계가 아니라 접수 이후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한다. 특히 수사기관의 수사 단계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그런데 공익신고자 보호법은 위원회가 접수하는 과정까지만 의무조항으로 세세하게 다룬다. 그 이후는 모두 재량사항이다. 하기 나름이란 말이다.
처리하며 신원 노출 우려, 신고자가 비용 지급…비실명대리신고 변호사 제도를 통해 회사의 불법행위를 신고한 사건이 있었다. 신입사원이던 신고자는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불법행위를 감행해야 했다. “들키지 않도록 몰래 할 것”을 신신당부하는 증거들도 있었다. 경기도는 행정조사로 조사 당일 일어난 불법행위를 확인하고,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 단계에서 신고자 신분은 보장됐을까. 신고자 신원은 수사기관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검찰은 신고자를 참고인으로 불렀다. 경우에 따라 피의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내부 신고자 본인도 근무표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조사에 참석하는 신고자의 진술을 비실명대리신고 변호사가 조력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신고자 본인이 비용을 내야 한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비실명대리신고 변호사의 업무를 신고 접수, 상담, 필요시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 자료 제출과 진술까지로 정한다. 그러나 변호사 수당을 줄 수 있는 업무는 신고를 접수하고 상담하는 데까지라고 한다. 수사기관에서 진술 단계는 국민권익위원회 업무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수당 지급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비실명대리신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서울시나 경기도는 자체 규정으로 수사기관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변호사가 진술을 조력할 때 비용 지급을 할 수 있도록 운영하지만, 이 부분은 국가 차원에서 제도를 개선할 지점이다.
익명 공익신고가 수사기관으로 넘어갔을 때 신고자를 보호해야 할 신고 접수 기관이 할 수 있는 조처는, 수사기관에 이 신고가 공익신고임을 알리고, 신고자가 불법행위에 가담했지만 공익신고자 보호법 제14조에 따라 “공익신고 등과 관련하여 공익신고자 등의 범죄행위가 발견된 경우에는 그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는 ‘책임의 감면’ 조항이 적용된다고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신고 접수 기관이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세부 규정도 없기 때문에 신고 접수 기관이 굳이 수고를 들여 수사기관에 해당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알린다 하더라도 ‘책임의 감면’을 적용할지는 온전히 수사기관의 재량사항이다. 재판 과정으로 넘어가면 사법부 판단에 달리는 것은 물론이다. 모든 것이 재량인데 신고자 보호를 장담할 수 있을까.
“혹시 신고하면 제가 신고한 사실이 드러나는 건 아닌가요?” “제 신원 보장은 확실히 되는 거죠?” 경기도청 공익제보 상담전화로 걸려오는 꽤 많은 전화가 이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법이 정하는 여러 보호조치도 설명하고, 비실명대리신고 변호사 제도도 설명하지만, 내부신고의 경우 특히 사안 조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신고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 있게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하기가 어렵다.
공익신고에 대해 수사기관이 수사할 때 신고자를 보호·배려하기 위한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 공익신고자 책임 감면 조항을 둔 법의 취지는 ‘내부신고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기관의 부패 등에 대한 신고를 장려하기 위해서’라고 국민권익위원회는 밝힌다. 법 취지는 그런데 법을 실행할 방안은 없고 모든 것은 신고자가 감당해야 한다면 누가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박수진 경기도 공익제보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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