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22살 청년은 불타는 몸으로 절규했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11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하라.”
50년이 지난 2020년 가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는 22살 청년의 이름을 다시 부르짖는다. ‘전태일 3법’을 만들자고 국회를 압박한다. 왜, 다시 전태일일까. “50년 전 전태일 노동자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기 때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절규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원스레 답하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은 올해 ‘투명 노동자’에 주목하는 ‘6411프로젝트’(제1323호 참조)를 진행 중이다. ‘6411’의 연장선으로 노회찬재단은 ‘2020년 전태일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젝트를 9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와 이철 작가가 일터·나이·성별은 각각 달라도 전태일과 ‘닮은 얼굴’을 한 8명을 전국 곳곳에서 만났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르포와 일기 등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한겨레21>은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10월 매주 이들의 기록을 전한다._편집자주
*‘2020 전태일의 일기’ 도움 주신 분들
강언주(부산 에너지정의행동) 권순대(경희대학교) 박미경(전태일재단) 박상희(원전 노동자) 박정훈(라이더유니온) 솔가(뮤지션유니온) 안연정(청년허브) 오승은(공공운수노조) 오진아(소셜디자이너Doing) 이자스민(전 국회의원) 이정기(봉제인노조) 홍진아(빌라션사인)
오대희(33)씨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장애인활동지원사다. 7년차 베테랑이다.
오후 2시 교대 시간이다. 아침 8시부터 일한 파트너는 복대를 차고 있다. 20대 후반 남자인 파트너가 허리에 무리가 왔다고 했다. 그가 퇴근하고 내가 밤 10시까지 뇌병변 1급 지체장애인(48)과 함께한다. 교대로 오전 근무를 맡는데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8시엔 도착해야 한다. 밤새 꼼짝 못했을 돌봄이용자(이용자)가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목욕, 양치, 옷입기 모두 활동지원사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동할 때마다 50㎏ 넘는 성인 남자를 둘러메야 하니 파트너의 허리가 아플 만도 하다.
지금, 여기, 내가 반드시 필요했다
“장애인 코로나 사진 공모전이 열린대요. 우리도 내볼까요?” 내가 광고를 보여주니 좋다고 한다.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든 그가 이런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다. 나는 그가 세상과 접촉하는 창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탓에 집 근처 산책 외엔 거의 외출도 못했다. 이용자에게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자가격리돼 활동지원이 끊기는 일이다.
이용자가 사진을 직접 고르도록 기다린다. 자칫하면 나한테 휘둘릴 수 있다. 중요한 건 내 욕구가 아니라 그의 욕구다. 초보자 시절엔 내 열정이 앞서기도 했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일은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가족 부담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는데, 요즘 ‘자립’이나 ‘주체적인 삶’이란 말을 자주 고민한다. 장애가 있건 없건 누구도 관계 밖에서 살 수 없으니 자립엔 조율과 협상이 필요하다. 이용자가 고른 사진은 아무래도 코로나19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 같다. “마스크를 쓰고 사진 찍어보면 어때요?” 그가 동의했다. 이 사진과 대비되도록 지난해 11월 함께 간 춘천 여행에서 찍은 사진도 같이 골랐다. 골목길 나비 벽화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그의 어깨 위로 날개가 돋아난 것 같다. 이 일을 오래 할수록 사소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이용자의 귀가 가려울 때 시원하게 파주는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순간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공과대학 4학년 때 전공 관련 기업에 다녔는데 미래 내 모습이 뻔했다. 계약이 끝나고 나답게 사는 것을 고민했다. 어느 날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 친구가 다급하게 도와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고 갔다. 40년 넘게 시설에 살다 탈시설한 60대 중증장애인을 지원하게 됐다. 당시엔 나도 이용자도 활동지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여기, 내가 필요했다. 한 사람에게 세상을 향한 기회의 창을 여는 일이었다. 장애인활동지원사 자격증을 따고 3년간 자립생활 주택에서 함께 살았다. 40시간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함께 이수한 사람들은 대체로 50대 이상 여성이었다. 소외도 느꼈다. “젊은 사람이 왜?” “평생 직업 할 수 있겠어?” 대놓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여전히 열에 아홉은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뭔지 모르고 막연히 도우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거세게 반대했다. 아직도 내 일 이야기는 서로 안 한다.
공모에 낼 사진을 고르고 이용자가 병원 갈 채비를 한다. 물리치료 받는 날이다. 속옷부터 보여준다. 그가 파란색 점퍼를 골랐다. 병원 수속부터 침대 눕히기 등 병원에서도 일이 끊이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뒤 그는 텔레비전을 봤다. 대기 중에도 완전히 딴청을 피울 수는 없다. 이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바로 물을 먹이거나 소변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때로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자꾸 말을 걸면 양쪽 모두 감정노동을 하는 수가 있다.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너무 친해지면 상대의 반응이 예상돼 이용자가 되레 편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방호복 입고 땀에 절어 24시간 교대근무
저녁밥을 차리고 먹이지만 내가 함께 먹지는 않는다. 나는 따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니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민간 영역에서 일할 때는 민간 기관에서 ‘매칭’해주고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이용자와 활동지원사가 ‘알아서’ 조정했다. 시급제로 일하다보니 이용자나 활동지원사나 서비스가 언제 끊길지 몰라 불안했다. 중증장애인은 노동강도가 세서 활동지원사를 구하기 더 어려웠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받으려면 공공영역에서 활동지원 서비스를 끌어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9년 10월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 생겼을 때 지원한 까닭이다.
공공기관이 아니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거다. 코로나19가 터지고 ‘자가격리 장애인 긴급돌봄지원단’이 꾸려졌다. 자원했다. 3월31일 센터장이 급하게 전화했다. 탈북자인 엄마가 코로나19에 확진돼 20살 발달장애 아들이 자가격리해야 하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지능은 3살 수준이라 반드시 누군가 곁에 있어야 했다. 바로 짐을 싸고 격리시설에 동반 입소했다. 그 집 앞에서 벨을 누르자 아들만 문밖으로 나왔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아줬다. 내가 입소한 2주 동안, 동료가 내가 맡아온 이용자를 돌봤다. 팀제로 운영돼 내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발달장애 특성상 ‘정서적 안정’이 중요했다. 규칙적인 일과가 필요했다. 아침 6시에 체조하고 8시부터 11시까지 풍선 놀이, 클레이, 종이접기 등을 했다. 방호복을 입고 있으려니 땀에 절었다. 함께 입소한 동료 1~2명과 24시간 교대로 일했다. 아이 모습을 찍어 불안해할 엄마에게 틈틈이 보냈다. 감염 위험을 걱정할 새가 없었다. “자가격리인데 왜 동반 입소해요?” 활동지원사가 뭔지 모르는 그곳 담당자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게 힘들었다. 힘이 돼주는 존재는 이용자들이다. 벌써 일곱 달이 되는데 그 친구 카톡 프로필 사진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대희 형님, 사랑해.”
당위만으로 설득 어려운 돌봄노동의 현실
잠옷으로 갈아입혀 이부자리에 눕히고 밤 10시에 퇴근한다. 몸이 무겁다. 집에 도착하면 밤 12시가 다 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힘들 때도 많았다. 처음 맡았던 60대는 너무 오랜 세월 시설에서 살다보니 스스로 결정하는 걸 어려워했다. 내가 하나하나 정해주길 바랐다. 다른 40대 이용자는 반대로 시설에서 마음껏 다니지 못한 한을 풀듯 아침부터 밤까지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한 이용자의 이웃이 대놓고 장애인 혐오 낙서를 벽에 해놓은 적이 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이용자는 그 사람 앞에선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쌓인 감정을 나한테 짜증으로 쏟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삶을 이해하면 감수할 수 있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도 해야 한다. 장애 스펙트럼은 넓다. 전문 인력이 늘어나야 하는데, 월 200만원 정도 받고 시도 때도 없이 달려나가야 하는 노동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질까? 당위만 가지고 설득할 수 있을까? 장애 유형에 맞는 서비스 체계 등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가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도 나는 ‘일개’ 활동지원사인데, 너무 큰 꿈을 꾸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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