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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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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태일] 이주 여성 노동자가 꿈꾸는 ‘진짜 통역’

이주여성 돕는 이주여성 노동자, 상담자 대변하고 싶지만 현실은 ‘제3자’
등록 2020-10-24 12:21 수정 2020-11-03 11:00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22살 청년은 불타는 몸으로 절규했다.“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도록 법 11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하라.”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하라.”

50년이 지난 2020년 가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는 22살 청년의 이름을 다시 부르짖는다. ‘전태일 3법’을 만들자고 국회를 압박한다. 왜, 다시 전태일일까. “50년 전 전태일 노동자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일터는 달라지지 않았”(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기 때문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절규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시원스레 답하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은 올해 ‘투명 노동자’에 주목하는 ‘6411프로젝트’(제1323호 참조)를 진행 중이다. ‘6411’의 연장선으로 노회찬재단은 ‘2020년 전태일들’의 목소리를 듣는 프로젝트를 9월 한 달 동안 진행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와 이철 작가가 일터·나이·성별은 각각 달라도 전태일과 ‘닮은 얼굴’을 한 8명을 전국 곳곳에서 만났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르포와 일기 등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한겨레21>은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10월 매주 이들의 기록을 전한다._편집자주

*‘2020 전태일의 일기’ 도움 주신 분들강언주(부산 에너지정의행동) 권순대(경희대학교) 박미경(전태일재단) 박상희(원전 노동자) 박정훈(라이더유니온) 솔가(뮤지션유니온) 안연정(청년허브) 오승은(공공운수노조) 오진아(소셜디자이너Doing) 이자스민(전 국회의원) 이정기(봉제인노조) 홍진아(빌라션사인)

외국인 콜센터 노동자는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한다. 흉악한 말에도 도움을 구하는 말에도 마음을 드러낼 수 없다.

박한나(가명)씨는 외국인 콜센터 노동자다. 태어난 나라를 떠나 한국에 들어온 지 19년, 콜센터에서 일한 지는 11년이 넘었다.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옛 외국인력지원센터)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월급을 떼이거나 공장에서 몸이 상한 외국인 노동자의 말을 들었다. 이들의 말을 한국어로 옮기는 건 이들이 겪는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이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일이었다. 센터는 일요일마다 붐볐다.

“결혼해서 처음 한국 들어와서 애 낳고 키우고 집안일 했어요. 한국어 배울 시간 없었어요.”

한국어 공부는 여린 삶을 지키는 일

그러다가 이혼했고 애를 키우며 살아야 했다.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어가 짧으니 일할 데가 공장밖에 없었다. 공장일은 힘들었다. 받을 돈을 못 받는 것도 같았다. “어려서 내가 생활(처신) 잘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했다. 시간 나는 대로 이주여성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와 ‘활동’을 함께했다. 남편의 손찌검에 피멍 든 이주여성을 찾았다. 통역은 폭력에서 여린 삶을 방어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상담사도 없고, 통역사도 없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었어요.”

콜센터 일은 기회였다. 공공기관이 운영했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었다.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급여가 적어 다른 돈벌이를 병행했다. 공부도 이어갔다. 공장이 문 닫았을 때, 밀린 임금을 떼였을 때, 아이와 피신할 장소를 찾아야 할 때 등 상황과 처지에 따라 법률정보, 행정절차, 지원정책 등 알아야 할 게 많았다. 의사, 변호사, 경찰, 은행원, 공무원 등의 말은 어려웠다. 기댈 사람 하나 없이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2011년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콜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주여성의 인권과 관련한 상담 업무였다. 명함이 근사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주여성에게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고 필요한 정보를 안내했다. 긴급한 상황일 경우 경찰에 직접 신고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과 피해자인 이주여성을 즉각 분리하는 일은 중요했다. 피해자의 남편과 통화하는 일도 잦았다. 아내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렸다.

“민원이 많았어요. 옛날에는 상담원들이 싸웠으니까요. 우리도 이주여성 입장을 얘기할 수 있으니까.”

2013년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여러 사업을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 위탁했다. 1년 뒤 이주여성의 인권 문제를 지원하는 콜센터와 다문화가정에 생활정보를 안내하는 콜센터가 통합됐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등을 긴급 지원하고 사후관리하는 일부터 부부 상담, 가족 내 의사소통과 갈등 해소, 자녀 지원, 의료·법률·검찰·경찰 서비스 연계, 체류·국적·법률·노동·취업 정보 제공, 심리상담, 생활안내 등 담당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하지만 기관은 민원에 민감했다.

피해자 말을 기계처럼 옮겨야

“우리 예전에 일반법률, 가정법률, 상담 매뉴얼, 개인정보 보호, 아동학대, 성폭행, 성추행 많이 공부했어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올해부터 우리 공부는 그냥 통역 활동하는 것만 해요. 목소리를 이렇게 해라, 상대방이 욕해도 감사합니다, 답하는 거. 강사가 와서 태도, 인사, 감정 이런 걸 가르쳐요.”

많은 사람이 다양한 사례로 전화해 상담을 요청했다. 언젠가부터 모든 상담은 3자 통화가 원칙이 되었다. 문화 차이로 갈등을 겪는 부부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지만, 부부 상담을 맡는 기관을 연결해 그들의 말을 서로에게 통역해 옮겼다. 매일 남편의 폭력을 받아내는 상담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경찰에 신고하라는 안내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찰의 말을 피해자에게, 피해자의 말을 경찰에게 기계처럼 옮겼다.

“어떤 사람은 아내한테 불만이 있다고 저희한테 계속 전화해요, 3년 동안요. ‘야 이년아, 너네 나라 이렇게 더러운 나라였냐’, 전화하자마자 이렇게 말해요. ‘네가 해결해’, 아내한테 청소를 시키라는 거예요. 결국 아내가 이혼소송을 했는데 남자가 우리한테 민원을 넣었어요. 우리가 아내한테 이혼 절차를 가르쳐줬다고. 근데 우리는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럴 수가 없어요.”

이혼을 결심한 이주여성이 이혼 뒤 어떤 일을 겪는지 물을 때는 난감했다. 하지만 직접 답해도 괜찮은지, 도움을 얻을 기관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마쳐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우리끼리 언어’로 답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민원이 들어오면 기관은 녹음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뽑아내서 문제를 찾을 것이었다. 매해 근로계약을 갱신하는 처지가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다. 사례 회의를 할 때마다 상담 유형에 따른 대응 수준을 관리자와 조정했다. 매뉴얼이 늘었다.

“지난해에도 전화 많이 왔어요. ‘일터에서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거 성추행인가 성폭력인가’ (묻는) 전화 와요. 강간도 많이 있었어요. 강간은 검사해야 하니까 2시간 정도 계속 통화해요. 병원으로 이동할 때까지 계속 통역해야 하잖아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전화 정말 많아요. 주간엔 한 상담원이 150건 통화할 때 있었어요.”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이면 전화벨이 그치질 않았다. 처음엔 원칙대로 외국인 입국자와 질병관리청을 연결해서 3자 통화를 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시설격리 동의, 임시생활 시설과 생활수칙 안내 등을 직접 전달했다. 자가격리 중인 외국인을 모니터링하고 연락하는 업무도 맡았다. 영어를 쓸 줄 아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출신 상담원에게 일이 몰렸다. “오래 일한 경찰은 우리한테 전화해서 ‘미란다원칙 말해주세요’ 해요. 우리가 다 외우는 걸 아니까. 어떤 경찰은 자기가 먼저 말하고, 내가 말하고 이렇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관리자도 있어요.”

통역 너머의 통역을 꿈꾸지만

매해 민원이 줄었다. “우리 일 재미없다, 재미없어 이제.” 오랜 시간 함께 일한 동료가 말했다. 고국을 떠나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연약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이 많다. 빼앗기고 상처받은 사람이 많다. 박한나씨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아는 만큼, 그리고 느끼는 것만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통역은 빼앗긴 권리를 찾는 일, 폭력에서 삶을 방어하는 일이었다. 시나브로 통역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그저 옮기는 일이 돼버렸다.

이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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