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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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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학생의 친구가 되었던 학생들을 기억한다

차별적 발언에 ‘모 아니면 도’로 처벌해야 하는 학교…
영국 학교의 평등법 같은 법 필요해
등록 2020-08-30 18:23 수정 2020-09-01 10:56
2018년 10월19일, 고국 이란에서 개종에 따른 박해 가능성을 우려해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학생(맨 왼쪽 검정 모자)이 법무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난민 인증 증명서’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2018년 10월19일, 고국 이란에서 개종에 따른 박해 가능성을 우려해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학생(맨 왼쪽 검정 모자)이 법무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난민 인증 증명서’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내가 올린 사진과 글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게 된 점 죄송합니다.” 지난 8월 가나 출신의 방송인 샘 오취리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과 글을 올려야 했다. 흑인 분장(블랙 페이스)을 하고 찍은 어느 고등학교의 졸업사진이 인종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는 이유였다. 처음 이 졸업사진이 화제가 되었을 때만 해도 ‘블랙 페이스’가 인종차별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지 못한 교사와 학교에 대한 아쉬움이 주로 이야기됐다.

샘 오취리는 사과해야 했을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차별의 의도’가 없고 그저 ‘장난에 불과한’ 고등학생의 졸업사진 하나 이해하지 못한 가나인을 성토하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인종차별이냐” “한국에서 돈 좀 벌었다고 오만하다”부터 시작된 혐오 발언은 “불만이 있으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은, 그곳에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사실 이러한 모습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느 초·중등학교 복도를 지나보면 ‘짱깨’ ‘애자’ ‘게이’ 등 소수자 집단을 차별하는 학생의 발언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문제의 원인을 교육 부재에서 찾는다. 그러면 학교는 정말 가르치지 않고 있을까? 아무리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학교에서 학생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장애 이해교육’ ‘다문화 이해교육’ 등(여전히 많은 경우 ‘이해’교육이라고 명명하는 점이 아쉽지만)의 교육을 받는다. 게다가 적어도 ‘차별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하지 말자’라는 이 간단하고도 명료한 명제가 참 지켜지기 어렵다.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일면 명쾌해 보이지만 차별이 발생하는 현실을 너무 납작하고 일차원으로 보게 한다. 과연 차별 인식은 지식의 전달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던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인종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블랙 페이스가 인종차별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면 되는 것일까? 차별의 원인을 단순히 ‘인식 부재’, 즉 무지에서 찾는 인식은 위험하다.

마치 영어단어를 암기하듯이 무엇이 차별에 해당하는지 하나하나 외울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물론 무지에 의해서 저지르는 차별 행위가 있다. 그러나 어떤 행위 하나를 금지한다고 본질적인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행위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차별을 만드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렇게 바라보게 하는 관점이 중요하다.

소수자 차별이 쉽게 인정되는 경우 없어

통상적으로 한 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처음부터 손쉽게 ‘차별’로 인정된 경우는 없다. 그 행위가 차별이라고 인정받기 위한 기나긴 ‘인정 투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그 행위를 멈춰달라고 주장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교육받을 권리나 참정권을 보장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차별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라는 오랜 인정 투쟁의 결과로, 겨우 여성에 대한 행위가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차별하면 안 된다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로 고민해야 할 것은 ‘가르치지 않음’이 아니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이다.

얼마 전 길을 걷다가 한 초등학생이 건널목을 건너가면서 손을 번쩍 들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손 들고 건널목 건너기’, 어린 시절 누구나 반복해서 들었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그 누구도 손을 들고 건널목을 건너지 않는다. 성인이 되었다고 더 이상 건널목이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손을 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무엇이 옳은지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 인간이 다른 존재에 대해 가지는 ‘혐오’ 감정의 원인을 ‘오염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것으로, 주체의 안과 밖 경계에 대한 자각에서 촉발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 혐오는 동성애가 이성애를 정상으로 규정한 사회의 정체성을 흔들어 자신의 경계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차별을 없애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어떤 소수자 집단에 대한 행위가 차별일 수 있다는 지식을 넘어서(물론 이러한 인식도 필요하겠지만) 그 소수자가 우리 사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2018년, 서울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이란 국적의 학생 A와 그 친구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A는 사업하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종교적 박해’를 이유로 2016년 난민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대법원까지 갔으나 패소해 강제 추방당할 위기에 놓인 상태였다. 그것을 본 같은 반 친구들이 나섰다. 친구들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A를 난민으로 인정받게 해달라”는 국민청원을 내고,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앞에서 집회를 여는 등 A를 위해 힘을 모았다. 결국 법무부는 A가 2016년 5월 처음 난민 신청을 한 이후 2년5개월 만에 난민 지위를 승인 했다.

‘난민 혐오’ 가장 심했던 시기의 어느 중학교

2018년은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로 오면서 한창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극에 달했을 때다. 사회의 차별을 학생들 힘으로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A를 그들 밖에 있는 난민이기 이전에 어려움에 처한 친구로 여겼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소수자를 안으로 들이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쩌면 답은 간단하다. 지식이 배움을 넘어서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교라는 공간은 끊임없이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육기본법 제2조에서는 우리나라 교육의 목적 중 하나로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꼽는다. 그런데 이 민주시민으로 필요한 자질은 민주적인 공간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쌓아가게 된다. 학생자치에 참여해 쌓은 경험이 곧 졸업 뒤 정치에 대한 참여의 기준이 되고,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와 환경 속에서 이 사회의 인권 척도를 내재화하게 된다. 그래서 학교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인권의 모습이 가장 잘 구현돼야 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헌법을 제외하고는 현재 우리 교육 현장에서 구체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차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찾기 어렵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학생이 울면서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친구가 ‘짱깨’라고 놀렸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학생을 ‘짱깨’라고 놀렸으니 차별적 발언이 분명했다. 상대방 학생을 불러서 그 발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화를 나눴지만 학교에서 ‘차별’적 행위를 규제할 명확한 법적 근거는 모호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상 ‘학교폭력’이 될 수도 있고, 아동복지법상 ‘정서적 학대’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차별에 대한 접근은 ‘모 아니면 도’가 된다.

인권 문제를 처벌의 언어로 접근하는 순간 문제는 더 꼬여버린다. 게다가 진짜 소수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거대한 폭력이 아니다. 늘 일상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고 미묘한 차별들이다. 학교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일상적 차별이 금지되는 평등한 공간이어야 한다.

“놀리는 행위… 협력 작업을 거부하는 행위”

밖을 잠시 둘러보자.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혐오표현 예방·대응 가이드라인 마련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선 ‘평등법’에 근거해 학교에서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덜위치 햄릿 교육 재단’ 소속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누리집에 ‘평등권 규정’(아래)을 명시했다.

2. 평등과 관련 법차별적 행위의 사례: 보호된 특성을 이유로 하는 신체적 폭행, 경멸적인 별명 사용, 모욕 및 농담, 성차별, 동성애 혐오 및 차별적인 낙서, 성차별이나 동성애 혐오를 표현하는 배지나 장신구 착용. 차별적인 의미가 담긴 물건의 반입과 사용, 언어 폭력, 보호된 특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괴롭히는 행위, 토론 과정에서 차별적인 발언, 차별을 위한 단체나 모임에 사람들을 가입시키려는 시도, 음악·종교·복장 등 차이를 지적하며 놀리는 행위, 종교· 장애·성정체성 등을 이유로 협력 작업을 거부하는 행위.

4. 정책 및 실천 과정에서 평등의 주류화: 학교는 영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개인의 자유와 상호존중,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용 등, 영국의 기본가치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극단주의자 및 영국의 가치에 위배되는 의견을 표현하는 학생이나 교직원, 학부모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학교는 평등법에 위배되고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차별적 행위를 규정하고 이러한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평등이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우리에게도 이제 영국의 평등법 같은 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신은 차별을 찬성하십니까?’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반대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나와 다른 존재를 차별하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가짐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타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망을 교육에서 찾는다. 앞으로 제정될 차별금지법은 학교를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경계 허물기의 경험과 시간을 선사해주는 인권의 공간으로 더욱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 공간에서 배움을 이어갈 새로운 세대는 이전과 다를 것이다. 친구의 난민 인정을 위해 함께 연대했던 그 학생들처럼 말이다.

박종훈 산청간디고등학교 교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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