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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게임회사 대변인인가

WHO 게임중독 질병 분류에 ‘게임산업 위축’ 우려 반대

2004년 재정경제부의 담배규제기본협약 반대와 닮은꼴
등록 2019-06-11 18:02 수정 2020-05-02 19:29
서울 성동구 응봉동의 한 피시(PC)방 풍경.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서울 성동구 응봉동의 한 피시(PC)방 풍경.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15년 전인 2004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발효를 1년 앞두고 국제회의를 열었다. 세계 각국 대표가 모여 전세계 시민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금연 정책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한국에선 당시 담배사업법 주무 부처였던 재정경제부(현재 기획재정부)의 과장이 한국담배인삼공사(KT&G) 직원과 함께 참석했다.

재경부 과장은 “금연 사업은 각 나라의 경제 사정에 따라 알아서 하는 것”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국제회의를 모니터링하던 비정부기구 담배규제연맹(FCA)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담배회사 직원임을 밝힌 한국 대표단에 더러운 재떨이 상 중에서도 최악의 상인 ‘말보로(담배 이름) 상’을 드립니다.” 국민 건강보다 담배사업을 통한 세수를 중시한 한국 사회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순간이었다.

문체부 “과학적 검증 없다”며 WHO에 반기

“게임중독 질병코드를 국내 도입하는 데 반대한다. 수긍할 수 있는 과학적 검증 없이 내려진 결정이어서 WHO에 이의를 제기할 방침이다.” 이번엔 게임산업 진흥에 관한 법 관련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WHO의 ‘게임중독’ 질병 분류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WHO는 5월25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고 질병코드 ‘6C51’을 부여한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1)’을 의결했다. 지난해 6월 국제질병코드(ICD)에 게임중독을 포함하는 안을 논의했던 WHO가 회의를 열어 정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WHO가 채택한 질병 분류 기준은 2022년부터 적용된다.

1990년 적용된 제10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0) 이후 30년 만에 개정된 ICD-11은 좀더 다양한 문제를 보건 영역으로 끌어들여 건강 문제에 정부와 사회의 책임을 확대했다. 1만4천여 개인 ICD-10의 질병코드 숫자도 ICD-11에서는 5만5천여 개로 크게 늘었다. 게임중독뿐만 아니라 음란물에 집착하는 ‘섹스중독’도 질병으로 분류됐다.

WHO 의결 이후 보건복지부는 범부처 정부기관과 학부모, 게임산업 관계자 등을 포함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고,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포함하는 안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지만 문체부는 게임산업 위축을 우려하며 복지부가 주도하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5월29일 출범한 ‘게임 질병코드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문체부를 거들고 나섰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면 게임산업의 위축이 불가피하고 2023년부터 3년간 11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볼 것이다.”

공대위는 게임산업이 입을 경제적 피해를 추산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보고서 ‘게임과몰입 정책과 변화에 따른 게임산업의 경제적 효과 추정’을 근거로 인용했다. 이 공대위가 인용한 보고서를 입수해 살펴본 결과, 연구진은 크게 ‘한국 게임산업계 종사자의 인식 조사’와 ‘미국의 흡연 질병 분류 이후 담배산업 위축’에 근거해 손실액을 계산했다. 게임업계는 “게임은 중독 물질과 질병에 대한 연구 결과가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기 때문에 게임과 담배는 다르다”면서도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포함할 경우 게임산업계 위축 규모는 담배산업을 기준으로 분석한 내용을 인용했다.

재경부와 KT&G가 담배사업 세수를 근거로 국제적인 금연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문체부와 공대위는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에 반대한다. 담배산업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흡연으로 생기는 건강 문제를 간과했던 대가는 비싸다. 높은 흡연율을 유지했던 한국 사회는 시간이 흘러 노인의 높은 만성질환 유병률, 심혈관 질환율 등 더 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게임중독도 한국 사회에서 실재하는 건강 문제다. 게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신체 활동이 부족하고 영양 섭취도 빈약해, 또 다른 건강 문제로 이어진다. 전국에 게임과몰입 상담치료센터가 이미 운영 중이다. 게임업계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청소년 4% 중독… 게임행동과 중독은 달라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WHO도 세계 게임산업계의 반발을 예상했다. WHO 정신건강 및 약물 남용 분야 담당자인 블라디미르 포즈냐크 박사는 WHO가 제작한 영상 프로그램에서 “게임중독은 일반적인 게임행동과는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게임중독과 게임행동을 분리함으로써 게임산업계에 큰 타격이 미치지 않고 건강한 게임 활동까지 침해하지는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WHO가 제시한 게임중독 분류 기준을 보면 ‘게임이 일상생활보다 우선순위에 놓여 가족, 사회, 교육 등 중요한 개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등 부작용이 나타남에도 게임을 중단할 수 없는 상태가 최소 12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로 정의해 통제 가능성과 일상생활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정도로 심각하게 게임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 연구 논문마다 차이는 있지만 청소년은 4% 정도가 게임중독으로 분류되고, 어른은 그보다 낮은 것으로 보고됐다.

이러한 설명에도 게임산업계를 주축으로 한 공대위는 강경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렸던 ‘셧다운제’(심야 시간 게임 제한)까지 다시 언급하면서 게임산업 위축만을 우려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게임산업 규모 1위인 중국도 2007년 일주일 가까이 계속 게임하다 숨지는 사고가 벌어지자 게임 시간을 제한하는 등의 제도를 운영한다. 중국 정부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한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세계적 게임기인 엑스박스(Xbox)의 제조사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데이브 매카시는 영국의 일간지 인터뷰에서 WHO의 결정에 관해 “게임중독과 관련해 전세계가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건강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무작정 책임을 부정하는 한국 게임업계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문체부, 복지부와도 충돌

게임중독의 질병 분류를 놓고 복지부와 문체부가 충돌하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정리에 나섰다. 이 총리는 5월2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관계 부처들은 향후 대응을 놓고 조정되지도 않은 의견을 말해 국민과 업계에 불안을 드려서는 안 된다”며 “몇 년에 걸쳐 각계가 참여하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건전한 게임 이용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게임산업을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해결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무조정실이 게임중독 질병 분류와 관련된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문체부는 참석 쪽으로 선회했다. 총리가 나서서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게임중독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흡연으로 훼손되는 국민 건강보다 담배사업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한국은 게임중독에 대해서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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