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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끌고가는 사법농단 피고인들

2시간 동안 의견서 읽은 임종헌 전 차장… 일반 피고인들은 엄두도 못 낼 일
등록 2019-03-30 15:16 수정 2020-05-03 04:29
사법 농단으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월26일 보석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린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사법 농단으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월26일 보석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린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사법 농단’ 재판은 다른 재판에서 보기 힘든 낯선 장면이 잇따라 연출되고 있다. 피고인이 직접 검찰 수사의 적법성 여부를 시시콜콜 따지는가 하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도록 검찰을 압박하기도 한다. 일반 재판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지만, 모두 법에 보장된 정당한 권리에 따른 것이다. 검찰의 처지에서는 방어해야 할 ‘전선’이 더욱 넓어진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검찰에 대한 비난, 재판부는 듣기만</font></font>

3월26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3차 공판에서 검찰은 무려 2시간여 동안 피고인의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임 전 차장이 “구치소 독방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연필로 썼다”는 17장 분량의 의견서를 낭독하겠다고 하자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 재판장 윤종섭)가 허락한 것이다. 그는 311호 중법정이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의견서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의견서의 핵심 내용은 1, 2차 공판에서 이미 주장했던 것과 같았다.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있는 법원행정처 문건이 담긴 유에스비(USB)를 검찰이 압수한 것은 “헌법의 영장주의를 위반한 중대한 불법행위”였다는 것이다. 압수수색영장에 기재된 집에서 증거물을 찾지 못했다면 새로운 영장을 발부받아 사무실을 압수수색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임 전 차장의 압수수색영장에는 압수수색 장소가 ‘피압수자의 집과 그의 진술에 따라 증거물이 보관된 장소’로 적혀 있다).

의견서의 상당 부분은 ‘법률 강의’를 방불케 했다.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려면 영장을 피압수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여기서 제시라 함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장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압수수색 장소를 ‘피압수자의 진술에 따라 증거물이 보관된 장소’로 하면 검찰이 탐색적 수색을 통해 영장 집행 대상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수사의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임 전 차장은 당시 압수수색영장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관이 영장을 보여줬지만, 압수수색 때문에 어수선해서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무려 42쪽이나 되는 범죄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메모를 해도 되냐’고 물었지만 검사가 곤란하다고 했다. 그래서 암기를 시도했으나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이 몹시 억울한 듯 압수수색을 지휘한 검사를 공격하기도 했다. “○○○ 검사가 법무부 근무 시절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등 사적인 인연을 거론하면서 법조 선배라고 불렀다. 그의 친절한 태도에 내가 검찰 수사 대상이라는 신분을 잠시 망각했다. 그가 물어보는 말에 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검사가 대화 도중에 누군가에게 문자메시지를 계속 보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검사들끼리 단톡방에서 내가 한 얘기를 공유한 것이었다. 수사할 때 써먹으려고 기록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검찰의 공소장은 미세먼지에 반사된 신기루’(1차 공판)에 이은 2차 공격이었지만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사법 농단 재판 피고인들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 때보다 피고인의 권리를 더 보장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왼쪽 사진)과 이 전 대통령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 농단 재판 피고인들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 때보다 피고인의 권리를 더 보장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왼쪽 사진)과 이 전 대통령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박근혜·이명박 변호인들은 제지받아</font></font>

피고인이 법정에서 의견서를 낭독하는 것은 다른 재판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의견서를 내면 재판부가 공판이 끝난 뒤 판사실로 돌아가 읽어보는 게 보통이다. 임 전 차장처럼 2시간 동안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일반 피고인들은 쉽게 누리지 못한다. 재판의 신속한 진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검찰을 비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법정에서 ‘용기를 내어’ 비난하려고 해도 재판부가 제지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도 변호인들이 검찰 수사를 비난했다가 재판부의 제지를 받은 바 있다.

임 전 차장이 발언하는 동안 검사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검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피고인은 압수수색 현장에서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무실에 보관된 유에스비를 스스로 제출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압수수색이 매우 적법했기 때문이다.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못한 것이다. 형사소송법에는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고만 돼 있다. 피고인에게 영장 내용을 이해시켜줄 의무는 없다. 당시 피고인이 영장을 맘대로 볼 수 있게 했는데, 고위 법관을 지낸 피고인이 영장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걸 검사가 어떻게 해결해주라는 말인가.” 검찰은 한발 더 나아가 임 전 차장의 ‘꼼수’도 폭로했다.

“영장에 변호사 사무실을 특정하지 못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검찰은 당시 피고인이 법무법인 ○○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피고인이 변호사 사무실 주소를 집으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 근무 사실은 당일 임 전 차장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임 전 차장이 핵심 증거인 유에스비를 숨겨놓은 변호사 사무실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집에 사무실이 있는 것처럼 사무실 주소를 집으로 등록했음을 암시한 폭로였다. 검찰은 “재판부에 요청드린다. 피고인의 주장은 이미 여러 차례 했던 것으로 전혀 새로울 게 없다.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재판을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 빨리 압수물의 증거능력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린 뒤 이 사건의 실체를 따지는 공판을 진행해주시길 바란다”고 말을 마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양승태 구속 기한 내에 1심 끝내기 어려울 듯 </font></font>

하지만 검찰이 바라는 신속한 재판 진행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다. 임 전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현직 판사들이 ‘재판 진행과 준비 등의 문제로 지정된 날짜에 출석하기 어렵다’며 3주에서 한 달 이상 증인 신문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문제는 임 전 차장 쪽이 현직 판사를 무더기로 증인 신청했기 때문에 비슷한 사례가 잇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증인 신문 일정은 연쇄적으로 더 늘어질 수 있다. 검찰은 재판부에 “지나친 불출석 사유 주장은 재판부가 엄격하게 판단해 출석을 독려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 증인들은 공익적 성격의 목격자가 아니다. 피고인과 공모한 사건 관련자들이다. 혐의가 상대적으로 가벼워 기소가 안 됐을 뿐인데, 자신이 진행하는 재판을 이유로 증인 신문을 연기해달라는 건 지나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법 농단 재판의 장기화 조짐은 전날(3월25일)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구속)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공판준비기일에서도 나타났다. 피고인들은 출석하지 않은 이날 공판에서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 재판장 박남천)는 ‘수사기록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달라’는 변호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2차 공판준비기일을 3주 뒤인 4월15일로 잡았다. 임 전 차장이 네 차례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한 것을 고려하면 양 전 대법원장 등도 네 차례 이상 준비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식 재판은 5월 말이나 6월 초에나 가능하다는 얘기다.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만기가 8월10일이기 때문에 두 달 안에 심리를 마쳐야 구속 기한 안에 1심 재판을 끝낼 수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도 현직 판사들을 대거 증인으로 신청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 쪽은 이날 검찰이 입수한 대법원진상조사단의 조사 기록을 복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판사들 가운데 “대법원진상조사단에서 했던 진술을 뒤집은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있기 때문”(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이다. 대법원 조사 때 양 전 대법원장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다면 그 진술도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검찰이 공소 유지에 유리한 증거만 선별해서 재판부에 제출했다는 의심을 전제로 한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니 검찰이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 “대법원진상조사단 기록에서 재판에 필요한 부분을 뽑아서 증거 목록으로 제출했고, 나머지는 수사 기록에 다 있다. 또 수사 기록도 모두 제출했다. 문자메시지나 카톡 메시지 등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가 있는 것들은 증거로 제출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런 사정은 변호인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변호인이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은 수사 흠집 내기로 볼 수밖에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증거 제출 놓고 치열한 설전</font></font>

변호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수사 기록으로 제출하는 증거를 검사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증거물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지를 검사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날 증거 제출을 둘러싼 양쪽의 설전은 재판장의 제지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앞으로 공판 내내 치열한 공방이 이뤄질 것을 예고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감춰서는 안 된다. 이는 ‘공소 유지 기관’인 동시에 ‘공익의 대변자’라는 검사의 특수한 신분에 따른 의무다. 검사에겐 범죄를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실현할 의무도 있다. 무고한 피고인이 억울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하려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도 법정에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유독 사법 농단 재판에서 피고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상황은 왠지 불편하다.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에서도 부각되지 않은 것들이 새삼스레 강조되는 분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검찰 관계자는 “만약 검찰이 현직 고위 간부들을 수사하면서 ‘이제부터 피의자의 권리를 엄격하게 보장하는 방식으로 수사하겠다’라고 한다면 국민이 그 수사 결과를 믿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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