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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단한 자들만 누리는… 사법 정의의 역설

‘형소법 교과서대로’ 진행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 농단 재판

피고인 권리 따박따박 따지며 재판 지연… 구속 만료 전 종료 불투명
등록 2019-06-08 13:24 수정 2020-05-03 04:29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사법 농단 재판은 ‘형사재판의 교과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양 전 대법원장과 공범으로 기소됨)은 물론 앞서 재판이 시작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 모두 법(형사소송법)에 보장된 절차에 따라 ‘교과서대로’ 진행된다. 이는 피고인들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피고인들은 법에 관한 한 자타 공인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법부 기득권 세력을 대표한 최고위급 법관들이었다. 실력에다 ‘전관’의 권위가 더해진 이들의 주장이 재판부에 주는 무게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 피고인들은 재판부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들도 이들은 당당하게 주장한다. 과거 자신이 재판장일 때는 모른 척하고 넘어갔던 것들도 시시콜콜 따진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마다 ‘현미경’ 조사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대법관은 5월31일 공판에서 검찰이 수집한 증거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검찰이 제출한 각종 수사기록이 증거로서 자격(증거능력)을 갖췄는지 따지는 절차(증거조사)에서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주요 혐의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강제징용소송 등의 재판 개입과 판사 사찰 문건을 작성하도록 시켰다는 것(직권남용)이다. 검찰이 이를 입증하기 위해 낸 증거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다. 임 전 차장에게서 압수한 유에스비(USB)에서 나온 문건과 법원행정처가 검찰에 임의 제출한 문건이다.

변호인들은 증거조사에 앞서 이 문건이 원본과 동일한지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가 작성한 문건인지는 기본이고, 애초 작성된 상태에서 압수했는지, 아니면 중간에 누가 수정한 뒤 압수했는지가 확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피고인별로 공소사실이 특정되고 이를 기반으로 유무죄를 다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디지털 증거(컴퓨터 출력물)가 원본과 동일한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디지털 증거는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해 조작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도 “‘임종헌 유에스비’에서 출력한 문건이 원본과 동일한지 입증하는 것은 (검찰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법원행정처 문건의 동일성 여부였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임의 제출한 문건의 원본 동일성까지 확인하라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임종헌 유에스비 문건과 법원행정처 문건의 내용이 똑같으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 또 앞서 변호인들에게 검찰에 와서 파일을 다 확인하도록 했다. 그땐 뭐하고 지금 와서 딴소리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맞은편 피고인석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방대한 양의 파일을 검찰청 사무실에서 한정된 시간에 다 확인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그때 시간이 모자라서 다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건의 내용이 같다고 해서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건 서증조사 취지에 맞지 않다. 디지털 증거 조사 자체가 그런 불편한 점이 있는 거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도 거들었다. “(검찰이) 수고스럽겠지만 법원행정처에 임의 제출한 문건의 원본이 무엇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검찰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건 말이 안 된다. 피고인이 증거로 동의하지 않으면 문건 작성자를 증인으로 불러다 심문하면 된다.” 결국 재판장인 박남천 부장판사가 중재에 나섰다. “피고인 쪽에서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재판 진도를 나갈 수 없다. 임종헌 유에스비 출력물의 원본이 무엇인지 그걸 (검찰이) 확인해주면 해결될 것 같다.” 검찰은 “그렇다면 재판부에서 특별 기일을 잡아달라. 법정에서 파일을 다 공개해서 (피고인 쪽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재판마다 검찰-변호인 날 선 신경전

검찰과 변호인의 신경전은 증거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재연됐다. 검찰이 ‘사법 농단’ 사건의 물꼬를 튼 이탄희 전 판사의 사직서를 증거로 제시했을 때였다. “이 전 판사는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학회 소속 판사들을 뒷조사해왔다는 말을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서 듣고 충격을 받아….”(검사) “이의 있습니다! 사직서에는 그런 내용(사직 이유)이 없습니다. 검사의 발언을 중단시켜주십시오.”(변호인) “형소법에 따르면 검사는 증거의 취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전 판사의 사직 배경을 설명하는 건 허용돼야 합니다.”(검사) “아닙니다. 검사는 서증에 쓰여 있는 것을 낭독하거나 내용을 고지하는 것만 허용됩니다.”(변호인) 양쪽의 공방을 지켜보던 재판장이 또 나섰다. 박남천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소송지휘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증에 적혀 있는 내용을 벗어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며 피고인 손을 들어줬다.

증거조사에서 검찰의 증거 설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재판부가 예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재판부는 오로지 법정에서 다룬 진술이나 증거만 보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해야 한다. 이 전 판사가 왜 사직했는지는 그를 증인으로 불러다 직접 심문해서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절차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다른 재판에서는 이런 엄격한 절차가 대부분 무시된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정도 되니까 원칙을 지키는 재판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일반 피고인들은 재판을 빨리 진행하려는 재판부를 자극할까 두려워 절차를 지켜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했다.

절차를 제대로 지키면 재판이 늘어지게 마련이다. 이 추세라면 양 전 대법원장의 1차 구속 기간 만료일인 8월10일 이전에 1심 재판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판이 지연되면 피고인에게 좋을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사법 농단 재판은 사정이 좀 다르다. 재판이 지연되면서 법원 내부의 여론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는 사법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탈탈 털린’ 것에 대한 반감에다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실망감이 더해진 결과다. 한 지방법원 부장급 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검찰 수사를 받아들였으면 법원 개혁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8월30일 ‘양승태 대법원’의 주요 과거사 판결 중 일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임종헌 피고인(오른쪽)은 5월31일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연합뉴스

헌법재판소는 2018년 8월30일 ‘양승태 대법원’의 주요 과거사 판결 중 일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임종헌 피고인(오른쪽)은 5월31일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연합뉴스

지연될수록 피고에 유리해지는 법원 여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듯 임종헌 전 차장은 뜬금없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다. 임 전 차장은 5월31일 낸 신청서에서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윤 부장판사는) 소송지휘권을 부당하게 남용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면서, 어떻게든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 내지 투철한 사명감에 가까운 강한 예단을 가지고 극히 부당하게 재판 진행을 해왔다.” 피고인이 신청서에다 재판장을 콕 찍어 비난한 것은 드문 일이다.

재판부 기피신청은 피고인의 정당한 권리다.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는 때’ 피고인은 재판부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검사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임 전 차장처럼 재판이 한참 진행된 뒤 기피신청을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임 전 차장이 ‘부당한 재판 진행’의 근거로 삼은 것은, 재판부가 5월13일 그의 구속 기간을 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추가 기소된 것을 근거로 그의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임 전 차장에게 추가된 혐의는 △서영교·전병헌·이군현·노철래 등 정치인 관련 재판에 개입한 것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동시 계류된 사건의 조기 선고를 위한 검토 보고서를 재판연구관에게 작성하게 한 것 등 두 가지였다.

재판부는 이 가운데 한 가지 혐의(정치인 재판 개입)만 추가 구속영장에 기재했다. 피고인의 추가 혐의 중 몇 가지를 적용할지는 전적으로 재판부의 권한이지만, 임 전 차장에게는 2차 구속 기간(6개월)이 만료되면 나머지 혐의로 또 구속을 연장하겠다는 의도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판사 출신의 또 다른 변호사는 “윤 부장판사의 결정이 위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고인 처지에서는 불공정한 재판 진행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호사(판사 출신)는 “검찰이 ‘쪼개기 기소’를 해서 피고인의 구속을 연장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행이다. 법원이 이런 관행을 막아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은 또다시 언제 열릴지 기약할 수 없게 됐다. 법원은 기피신청 자체에 대한 재판을 따로 열어야 하므로 진행 중이던 원래 재판은 중지된다. 기피신청 재판은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맡는다. 신청 사유가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재판부가 교체된다. 이 경우 새 재판부가 기록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기피신청이 기각되면 임 전 차장은 항고와 재항고 등 불복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어떤 경우라도 기소된 지 7개월이 지난 임 전 차장의 재판은 장기화가 불가피하다.

‘바로미터’ 임종헌 재판 장기화 불가피

임 전 차장의 재판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그는 물론이고 다른 피고인에게도 좋을 게 전혀 없다. 그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그의 ‘윗선’도 유죄를 피하기 쉽지 않다. 임 전 차장의 판결은 다른 피고인들의 재판에 ‘바로미터’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법 농단 재판의 지연은 피고인들 모두가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그들은 내년 총선 이후까지 버텨보고 싶은 게 아닐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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