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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에게 버럭한 임종헌, 오버인가 방어인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공판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사법 농단 진실

재판 고수가 알려주는 ‘피고인의 권리 ABC’는 덤으로
등록 2019-03-23 11:27 수정 2020-05-03 04:29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3월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font color="#008ABD">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 농단 재판 피고인들은 재판 잘하기로 소문난 판사들이었다. 방대한 수사 기록에 묻힌 실체적 진실을, 증거를 토대로 발라낸 뒤 판결하는 일에 능숙하다. 하지만 이들도 막상 검찰 수사를 받아보니 억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판사 땐 몰랐던 부당한 수사 관행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재판에서 법에 보장된 모든 권리를 동원해 검찰 수사의 위법성을 밝히겠다고 벼른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농단 재판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피고인(피의자)의 권리를 일깨워주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재판에서 드러나는 사법 농단의 실체적 진실은 사법 개혁은 물론 검찰 개혁의 필요성도 부각할 것이다. 피고인들의 말처럼 판사를 상대로 하는 수사까지 위법했다면, 검찰은 더 이상 가만 놔둘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됐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 공방을 거친 뒤 피고인들의 유죄가 입증되면 사법 신뢰를 위한 개혁의 고삐를 바싹 당겨야 한다. 사법 농단 재판이 ‘세기의 재판’이자, 법원과 검찰의 ‘진검승부’라 하는 이유다. _편집자</font>

지난 3월11일 시작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은 ‘사법 농단’ 재판의 전초전 성격을 띤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가장 먼저 기소된 임 전 차장의 공판 태도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등 다른 피고인들의 재판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임 전 차장은 첫 공판부터 검찰에 포문을 열었다. “(검찰의) 공소장은 미세먼지에 반사된 신기루” “검찰 수사와 공소사실이 너무 자의적이다”며 날 선 공격을 했다. 그는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6부 재판장 윤종섭)에 “피고인의 주장과 증인 진술을 차분히 듣고 무엇이 사안의 진실인지 판단해달라”는 ‘당부’까지 하며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그의 태도는 양 전 대법원장 등 ‘윗선’들의 재판도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을 암시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검사님 웃지 마세요!” 소리친 피고인</font></font>

8일 뒤 열린 2차 공판(3월19일)에서 임 전 차장은 검찰과 직접 충돌했다. 검찰 공소장에 나오는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집행 혐의를 반박하던 중 검사에게 ‘선빵’을 날린 것이다. 그는 “대외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운영비 예산으로 편성하는 것은 각 부처 상황에 따른 예산 편성 전략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미스라벨링’(mislabeling·상품명이나 지명을 잘못 붙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때 갑작스레 튀어나온 영어 단어가 낯선 듯 한 검사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임 전 차장은 곧바로 검사석을 노려보며 “검사님, 웃지 마세요! 김○○ 검사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법정 분위기가 싸해졌다. 검사들은 물론 재판부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종섭 부장판사는 “피고인, 잠깐만요”라고 임 전 차장의 발언을 중단시킨 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 검사들은 재판부를 향해 “이건 주의를 시키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윤 부장판사는 고개를 들어 임 전 차장을 잠시 바라본 뒤 “그 말은 변론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지적은 재판부가 해야 할 일이다. 설령 그렇게 보였을지라도 앞으로 그와 같은 발언은 삼가달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주의를 시켰다. 임 전 차장은 “네, 알겠습니다”라며 나머지 발언을 이어갔다.

재판에서 누군가에게 웃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재판장뿐이다. 재판장에게는 재판 진행에 방해되는 모든 행동을 제지할 권한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재판장이 검사에게 이런 주의를 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말을 듣는 쪽은 주로 피고인이나 변호인, 증인, 방청객이다. 임 전 차장이 검사의 웃음이 거슬렸다면 재판부에 주의를 시키도록 요청하는 게 맞다. 그랬다면 ‘아직도 판사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임 전 차장의 발언을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 검사의 웃음을 지적한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지키려는 정당한 행위라는 설명이다. 검사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피고인이 변론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이는 방어권을 침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법원 출신 변호사는 “재판에서 검사가 직접 피고인을 야단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언론들이 그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법정에서는 검사도 피고인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임 전 차장의 발언은 ‘법원 야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가 2006년 10월30일 제주지법에서 열린 선거법 위반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7년 11월15일 김 전 지사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연합뉴스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가 2006년 10월30일 제주지법에서 열린 선거법 위반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7년 11월15일 김 전 지사에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연합뉴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위법한 증거 수집으로 무죄 받은 김태환 겨냥? </font></font>

임 전 차장의 발언 소동은 곧이어 벌어진 ‘유에스비(USB) 압수수색’ 공방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에 근무할 때 작성한 문건이 담긴 유에스비를 검찰이 적법하게 압수했느냐는, 임 전 차장뿐 아니라 다른 피고인들의 유무죄에 영향을 주는 핵심 쟁점 중 하나다. 임 전 차장의 문건은 사법 농단 수사의 밑그림 구실을 했다. 만약 재판부가 압수수색이 위법했다고 판단하면, 그의 문건은 증거능력을 잃어 재판에서 쓸 수 없다. 수십만 쪽 분량의 사법 농단 수사 기록이 자칫 ‘폐지 더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법하지 않은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수독과’ 이론에 따른 것이다. 이 이론은 위법하게 수집된 1차 증거는 물론 그 증거로 발견된 2차 증거까지 모두 증거능력을 잃는다는 원칙이다. 이는 수사기관의 별건 수사를 막기 위한 것이다. 수사기관이 수사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별건 수사까지 할 수 있다면 국민은 모두 ‘잠재적 피의자’가 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수독과 이론은 공권력에서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 같은 구실을 한다.

압수수색의 적법성을 가르는 핵심 기준은 영장에 적힌 압수수색 대상(장소와 물건)만 압수수색을 했는지 여부다. 현장에서 다른 수상한 증거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무조건 압수해서는 안 된다. 이를 압수하려면 별도의 영장을 법원에서 발부받아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압수된 증거물은 효력을 잃어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 이는 대법원 판례로 굳어진 압수수색의 대원칙이다.

제주지방검찰청은 2006년 김태환 당시 제주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수사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주도 소속 공무원들이 김 지사의 방송사 토론회 대담 자료를 만들고 예행연습까지 한 것 등을 고발한 사건이다. 검찰은 법원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도지사 비서실장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러 갔는데, 그때 한 비서관이 도지사 집무실에 있던 문서 꾸러미를 들고 나가고 있었다. 이 비서관과 맞닥뜨린 검사는 문서를 몽땅 압수했고, 이를 토대로 김 지사의 혐의를 보강하는 다른 증거물을 확보해 김 지사를 기소했다.

김 지사 쪽은 재판에서 ‘검찰이 압수한 문서는 압수수색영장에 기재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영장을 당사자에게 제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위법하다’고 주장했지만 1, 2심 재판부는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당시 주심 박일환 대법관)는 2007년 11월15일 대법관 9 대 3의 의견으로 김 지사의 손을 들어줬다. 위법하게 수집된 것을 증거로 써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그의 진술 따라가니 직원 파우치에서 USB 나와</font></font>

임 전 차장은 이 판례를 들어 검찰의 유에스비 압수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 공판에서 ‘변호사 사무실은 압수수색 대상이 아닌데도 검찰이 압수수색을 해서 유에스비를 가져갔다. 또 영장 내용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압수수색을 당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검찰 수사 기록은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2차 공판 말미에 압수수색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공개하며 임 전 차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앞서 박영수 ‘국정 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에 파견됐던 박주성 검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2018년 7월21일 오전 11시45분 임 전 차장의 집으로 가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했다. 그는 주방 식탁에 앉아 영장을 봤다. 양승태·박병대·이규진 등은 영장 기각 표시가 돼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내 영장만 발부된 건가요?’라고 검사에게 묻기도 했다. 그만큼 편안한 분위기에서 1시간 동안 꼼꼼하게 영장을 봤다.”

영장을 읽은 뒤 임 전 차장은 검사에게 법원행정처 문건이 담긴 외장 하드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다’고 했다 한다. ‘30여 년의 법관 인생 전부가 들어 있지만, 불명예 퇴진하는 마당에 이걸 갖고 있으면 뭐하나 싶어 폐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에 있는 컴퓨터를 디지털포렌식 기기로 조사했더니, 2018년 6월에 버렸다는 외장 하드를 그해 7월 열어본 흔적이 발견됐다. 또 유에스비로 복사한 흔적도 발견했다. 그래서 추궁했더니 ‘내 변호사 사무실(임 전 차장은 퇴임 후 중견 로펌에 들어갔다)에 유에스비가 있다’고 실토했다.”(박주성 검사)

검사와 수사관들은 임 전 차장을 데리고 그의 변호사 사무실로 이동했다. 임 전 차장은 순순히 캐비닛에서 유에스비 2개를 꺼냈다. 검찰은 그의 개인용 컴퓨터에 접속해서 포렌식 작업을 벌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임 전 차장이 제출한 두 개 외에 다른 유에스비를 사용한 흔적이 또 발견된 것이다.

임 전 차장은 검찰의 추궁에 ‘사무실 여직원에게 맡겨뒀다’고 말했다. 새로운 유에스비는 여직원의 화장품 파우치 안에 있었다. 여직원은 다른 2개의 유에스비도 추가로 검사에게 건넸다. 그는 “(임 전 차장이) 발견되지 않게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고 검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박주성 검사는 “압수수색영장에는 ‘피압수자의 집과 그의 진술에 따라 증거물이 보관돼 있는 장소’로 대상이 특정돼 있다. 검찰이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은 이처럼 그의 진술에 따라 간 것인데, 왜 피고인은 위법한 압수수색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말을 마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음 공판에서 다투겠다”며 역공 예고</font></font>

재판장은 피고인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반박할 것 있으면 하시죠.” 임 전 차장과 변호인의 얼굴은 약간 어두워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진실 공방을 벌이면 재판부가 곤혹스러울 것 같아서 다음 공판에서 다투겠다. 다만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만 말씀드리겠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마이크를 당겼다.

<font size="2">다음호에 계속</font>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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