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야수가 야수에게

베트남에서 침대에 실려 돌아온 병사가 퐁니에서 겪은 일
등록 2019-03-15 11:02 수정 2020-05-03 04:29
2018년 6월 만난 류진성씨. 두 번이나 병원에 후송됐던 그는 피해자이자 가해집단의 일원이었다. 고경태

2018년 6월 만난 류진성씨. 두 번이나 병원에 후송됐던 그는 피해자이자 가해집단의 일원이었다. 고경태

퐁니·퐁넛은 대한민국 법원의 현재진행형 소송 이슈다. 조금 복잡해서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봤다.
1. 2017년 8월2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베트남전 태스크포스’(이하 민변TF)는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1969년 11월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가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에 들어갔던 장교와 하사관 등을 조사한 문건들의 목록을 공개하라”는 내용이었다.
2. 14일 뒤 국정원이 비공개 결정을 내리자 민변TF는 2017년 11월3일 서울행정법원에 비공개 처분 취소소송(원고 임재성 변호사, 대리인 김남주·안지희 변호사)을 냈다.
3. 국정원은 ‘외교적 불이익’을 비공개 사유로 삼았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재판장 김용철)는 2018년 7월27일 1심 판결에서 민변TF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가 비공개 열람을 전제로 관련 정보를 보는 과정에서 1972년 8월14일 문제의 조사 문건 등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든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4. 국정원은 항소하며 ‘조사 대상 장교의 개인정보 침해’를 새로운 비공개 사유로 추가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김우진)는 2018년 12월20일 2심 판결에서도 민변TF의 손을 들어줬다.
5. 국정원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마이크로필름화된 조서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비공개 재처분 결정을 내렸다. 2심에서 추가한 비공개 사유로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전략이다.
6. 민변TF는 국정원의 비공개 재처분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2019년 3월 중 다시 낼 계획이다. 더불어 국정원의 비공개 재처분 자체가 무효라는 판단 아래 2심 판결 일자(2018년 12월20일)로부터 정보공개일까지 하루에 100만원씩 배상하라는 간접강제 신청도 준비 중이다.
이 재판의 출발점은 19년 전인 2000년 5월4일치 보도였다. 국정원이 ‘개인정보 침해’를 거론했던 장교 3명은 당시 인터뷰에 등장한 청룡부대 1중대의 세 소대장, 최영언, 이상우, 김기동이다. 이 중 1소대장 출신 최영언씨는 지난해 3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제5화는 퐁니·퐁넛에 들어간 한 병사의 이야기다.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으로서는 최초 실명 증언이다. 후속 증언을 촉발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1968년 못다 한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IMAGE2%%][%%IMAGE3%%]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한 장은 미군의 것이다. 적의 공격에 박살이 난 모양이다. 탱크 위에 후송 중인 부상자들이 널려 있다. 팔과 복부, 얼굴에 붕대를 감았다. 다리에서는 피가 흐른다. 후에 지역에서의 교전 직후라고 한다. 전장의 살벌한 긴장감, 소리 없는 절규가 손에 잡힐 듯하다. 미국 잡지 에 실렸다.

또 한 장은 한국군의 것이다. 백마부대(제9사단) 병사가 캄란의 한 마을에서 소이탄 연기를 뚫고 사지에서 헤매는 어린이를 껴안은 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한다. 군인들은 정의롭고 용감하고 유능해 보인다. 완벽한 프레임이다. 1968년 한국 신문에 실렸다.

두 사진의 대비는 상징적이다. 베트남전 기간, 한국 언론의 보도사진에서 부상병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군은 용맹한 전투를 하거나(전투 장면을 연출하거나), 베트콩 주검을 여유롭게 지켜보는 승자로만 그려졌다. 생사의 경계에 선 병사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환기해준 미국 언론의 보도사진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군 병사들은 그저 아무 걱정 없는, 늠름한 용사이거나 향수에 젖은 표정으로만 나온다. 보도사진보다 홍보사진에 가깝다. 베트남전 파병이 국가 부흥 프로그램의 하나였던 박정희 독재의 통제 시스템 아래에서, 남의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의 악몽과 비극을 드러내는 일은 일종의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행위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침대에 누워 귀국한 류진성(73)씨를 소개한다. 중환자로 분류돼 다낭 미 육군병원에서 수술받고 필리핀 클라크 미 공군기지에서 대구 비행장으로 이송된 그는 대구 공군병원을 거쳐 경남 진해 해군의무단으로 왔다. 1969년 봄의 일이다. 파병 기간(1965~73년) 한국군 전·부상자 통계에 잡히는 총 1만962명 중 한 명이다.

류진성씨를 만났다. 2018년 6월16일과 7월7일 서울 양천구 그의 집 근처에서 두 차례 인터뷰를 했고 2019년 2월24일 전화 통화를 했다. 1967년 10월 청룡부대(해병제2여단) 3진 10차로 베트남에 파병됐던 그는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마을에 진입한 1대대1중대(2소대, 당시 일병) 소속이었다. 그 경험을 처음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자리는 2018년 4월21~22일 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시민평화법정(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었다. 그러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굴을 모자이크로 가린 19분간의 영상 녹화 진술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만나 좀더 폭넓은 이야기를 나눴다. 전상(전쟁터에서 상처를 입는 것) 경험은 그 과정에서 접했다. 전쟁터의 류씨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집단의 일원이었다.

[%%IMAGE4%%]두 명의 1중대장

그는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첫 고비는 1968년 6월 초의 일이다. 2소대원들과 정글에서 2열종대로 수색과 정찰을 하던 중이었다. 측면 10m 거리에 있던 동료 병사가 부비트랩의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그도 파편을 맞았고 오른쪽 뺨이 찢어졌다. 다낭 미 육군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상처는 크지 않아 간단한 봉합수술로 치료를 끝냈다. 후송 며칠 뒤 중대장도 부비트랩을 밟아 다낭으로 실려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1중대장 은명수 대위였다.

“전임 김석현 중대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조기 귀국 조치를 당했다는 건 전 중대원이 아는 일이었죠. 김석현 중대장은 이북 출신이었는데 얼굴이 새카맣고 성정이 좀 잔인하다는 인상이 있었어요. 실제로 중대원들을 막 대해서 좋은 평가가 없었어요. 은명수 중대장은 미남에 신사였어요. 기지 안에다 배구 코트도 만들고, 겉멋이 든 면도 조금 있었지만. 해군사관학교 축구팀 골키퍼 출신이라고 했어요. 민가에 들어갔다가 닭장 발이라고 부르는, 대나무로 엮은 거, 마당 한가운데 놓인 그걸 아무 이유 없이 발로 찼는데 터져버렸다는 거야.”

은명수 대위는 1968년 3월7일 1중대장으로 부임한다. 전임 중대장 김석현이 3월 초 갑자기 귀국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1중대원들은 김 대위의 귀국이 2월12일 사건 때문이라 추측했다. 그날 1중대가 퐁니마을을 지나던 중 저격을 받아 마을에 들어갔다 나온 뒤 주민 수십 명이 주검으로 발견됐고, 이로 인해 잡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임 은 대위는 6월4일 작전을 나갔다가 부비트랩 폭발로 전신에 파편상을 입고 후송 도중 전사한다. 은 대위는 파병 기간의 전·사망자 5009명 중 한 명이다.

류진성씨는 다낭에서 치료받고 2주 만에 원래 부대인 1중대가 아닌 경비중대로 배치된다. 1대대 경비중대 2소대. 그는 새 부대의 주둔지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삼각주에서 매복을 서며 작전을 했다고 말했다. 투본강과 연결되는 호이안 근처로 추정된다. 1968년 12월께 그곳에서 두 번째 고비를 맞는다.

“사주경계를 하는 진지에서 임무 교대를 할 시간이었어요. 저는 진지에서 내려가고 다른 후임병들이 올라오는데 딱 소리가 나는 거야. 수류탄 뇌관이 딸각거리는 그 소리. 순간적으로 맨 앞의 후임병을 끌어안았어요. 덕분에 그 친구는 괜찮았어요. 그 밑에 있던 다른 애들 2명하고 제가 다쳤죠.” 누군가 진지 밑으로 기어와서 수류탄을 던진 것 같다고 했다.

“터질 때 몸이 붕 떴어요. 화약내가 코를 푹 쑤시고 들어왔지. 바닥에 떨어진 뒤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봤는데 왼손이 없어. 그래서 보니까, 왼손이 부러진 채 목 뒤로 해서 오른쪽으로 넘어가 있었어요. 그리고 왼쪽 다리에서 정말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 밀려왔지요. 100m 앞에 있는 방석(벙커)에서 조명탄을 쏘며 다들 뛰어나와 들것에 실어주었죠. 졸병들이 막 울더라고. 그렇게 헬기 타고 다낭으로 갔어요.”

왼쪽 팔과 다리만이 아니었다.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내장이 엉망이 되어 밖으로 삐져나왔다. 왼쪽 다리는 잘라야 할지도 몰랐다. 다낭 미 육군병원의 군의관들이 병상 위의 그에게 발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왼쪽 발이 본래 크기보다 두세 배로 부어오른 것 같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발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군의관에게 사정했다. “노 커트, 노 커트.” 군복을 입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한국말 통역자가 군의관의 말을 옮겨주었다. “지금 수술하면 무릎 아래를 자른대요. 하지만 며칠 경과를 지켜보다 더 썩으면 허벅지를 잘라야 한대요.” 그 정도가 되면 아예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무조건 다리 절단 수술은 안 된다고 했다. 개복수술을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가 빨리 되지 않아 추웠다. 어금니가 위아래로 심하게 부딪쳤다. 다리 걱정을 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엄지발가락

“일주일 만에 눈을 떴어요. 캄캄하고 조명등만 몇 개 있더라고. 중환자실이지. 근데 다리를 볼 수 없는 거야. 시트로 덮어놓았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 왼쪽 팔은 뼈를 늘렸다가 붙여야 하니까 쇠꼬챙이 끼워서 모래주머니로 고정해놓았지, 오른손은 항생제 링거가 꽂혀 움직일 수 없지, 발은 어찌 됐는지 아무 감각이 없지. 왼쪽 발을 봐야 하겠는데 불안해서 볼 엄두도 나지 않지만 방법도 없는 거야. 근데 어떻게 조금 시트가 살짝 움직이면서 엄지발가락만 살짝 보이더라고요. 그때같이 기뻤던 때가 없었어.”

그날의 발가락은 인생 최고의 환희였다. 군의관들은 갈라지고 부은 왼쪽 다리에 매일 드레싱만 해줬다. 침상에 누운 채 꾸이년 병원과 클라크 미 공군기지를 경유해 한국에 들어와서는 진해 해군의무단에서 피부이식수술을 했다. 그리고 상해2급 판정을 받았다.

1969년 10월, 목발을 짚고 제대해 고향 전북 전주로 내려갔다. 먹고살기 위해 준설 작업장에 나갔다. 당시 정부는 미국이 원조 물자로 준 밀가루를 풀어 하천 정비 사업을 하고 있었다. 흙을 실은 리어카를 손 하나 짚고 한 발로 껑충껑충 밀고 다녔다. 3일 일하면 밀가루 2포대를 줬다. 그러다 1970년 봄부터 대한상이군경회 전북지부에서 지도과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상이군경회 내에서 드센 회원들 군기를 잡는 역할이었다. 때로는 몸을 써야 하는, 악과 깡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악과 깡이라면 자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몸으로 겨루는 일에는 도가 텄다.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을 인정받아 일병 때부터 소대 첨병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용감함이 잔인함이나 무자비함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는 호이안에서의 초기 작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1968년 2월12일.

“2소대장하고 고참 한 명과 한 마을의 집 마당으로 들어갔어요. 나중에 그 마을이 퐁니인 줄 알았죠. 2소대장은 이상우 중위라고 육체미가 대단한 사람이었지. 집 동굴에서 허리춤이 다 내려가는 노인이 나와 애원하는 듯했어. 이 중위가 당황한 거야. 베트남 말로 디디디디, 그냥 가라고 했지. 한데 노인이 계속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니까 옆에 있던 상병 고참이 갑자기 ‘에이 씨발, 이런 것도 처리 못해’ 하면서 M16을 자동으로 놓고 쏴버린 거야. 총을 맞으면서 노인이 몽키춤을 추더라니까. 전신에 맞으니까 총알을 맞을 때마다 반동으로 펄떡펄떡 뛰더라고요. 그때 저 상병 놈은 지옥 간다, 하늘이 가만 안 둘 거다 했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귀국했어요.”

‘베트남 프렌즈’라는 한국의 청소년단체 회원들이 퐁니마을 위령비 앞에 피해자 이름이 새겨진 예쁜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위령비 아랫부분에 가장 어렸던 1967년생과 1968년생 희생자들의 이름이 보인다. 2018년 2월(왼쪽). 학살 사건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돈을 모아 2018년 퐁니마을 1번 국도 변에 새로 세운 사당. 이곳은 사건 당일 분노한 주민들이 주검을 늘어놓았던 바로 그 현장이다. 생존자 응우옌티탄이 사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9년 1월(오른쪽).    고경태

‘베트남 프렌즈’라는 한국의 청소년단체 회원들이 퐁니마을 위령비 앞에 피해자 이름이 새겨진 예쁜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위령비 아랫부분에 가장 어렸던 1967년생과 1968년생 희생자들의 이름이 보인다. 2018년 2월(왼쪽). 학살 사건 유가족들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돈을 모아 2018년 퐁니마을 1번 국도 변에 새로 세운 사당. 이곳은 사건 당일 분노한 주민들이 주검을 늘어놓았던 바로 그 현장이다. 생존자 응우옌티탄이 사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9년 1월(오른쪽). 고경태

2월13일의 소름

퐁니·퐁넛 사건의 공식 사망자 수는 74명이다. 대부분 노인, 부녀자, 어린이였다. 류진성씨는 지난해 4월21일 시민평화법정의 영상 녹화 증언에서 “집단사살은 1소대에서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소대장 출신 고 최영언(1942~2018)씨는 생전 인터뷰에서 후미에 있던 3소대를 언급한 바 있다. 류씨는 자신의 말을 바로잡았다. “최영언씨가 3소대라고 했다면 그게 맞을 거예요. 맨 후미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었거든요. 논바닥에 민간인들을 다 모아놓고 중대장한테 ‘어떻게 할까요’ 물었더니 중대장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대요.”

퐁니·퐁넛 사건 현장에서는 젖먹이들이 극적인 생존을 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0~3살 아기 생존자만 3명이다. 류진성씨 증언에 따르면, 불운한 아기도 있었다. “아기한테 젖을 먹이는 엄마를 쏘니까 아기가 총 반동으로 저 멀리 튀어 날아가더래. 총 쏜 소대원한테 들었어. 쏜 놈이 자랑 삼아 얘기했나봐요.”

류씨는 자유사격지대로 정한 작전지역에 들어가면 닭이든 돼지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아예 여단장 훈령으로 내려왔다. 그는 퐁니 사건 얼마 뒤 그 훈령에 충실하게 따랐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디엔반현 내 작전지역에서 우리 소대원들끼리 매복을 서고 있는데 여성 한 명이 아오자이 입고 개활지를 지나가더라고. 몇백m 앞이었지. 라이라이 하면서 오라고 소리쳤는데 도망가니까 집중사격을 했어요. 저도 방아쇠를 당겼죠. 인간사냥이었지. 그 여성이 총 맞고도 계속 일어나서 뛰려고 하니까 60mm 박격포까지 때렸어요. 결국 쓰러져 움직이질 않더라고. 근데 남베트남군 장교 부인이라고 금방 밝혀졌나봐요. 밤에 잘 묻어주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특공조를 짜 현장에 가서 주검에 거적때기 걸쳐주고 야전삽으로 땅을 파 묻어주었지.”

그러나 퐁니마을은 ‘다 쓸어버려도 되는’ 자유사격지대가 아닌 사격통제구역이었다. 퐁니에는 남베트남군 가족이 많이 살았다. 사건 뒤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남베트남 정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국군이 마을에 진입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근처 미군들은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했고 사진까지 남겼다. 미군 당국도 사건을 조사했다. 관련 문서는 2000년이 돼서야 공개됐다.

“1968년 2월13일 아침을 기억해요. 1번 국도를 수색·정찰하는데 퐁니 주민들이 시체를 거리에 늘어놓고 눈에 불을 켜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더라고. 소름이 끼쳤어요. 내가 중대 맨 앞에 선 첨병인데 저기를 어떻게 뚫고 나가나 했죠. 한국군이 오니까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고. 내가 험악한 표정을 지어가면서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길을 내고 간 거야. 누군가 칼로 등을 찌를 것 같았어. 전 왜 그런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고서 전날 일을 알게 된 거죠.”

그는 40년여간의 세월을 대한상이군경회 자장 아래서 보냈다. 전북지부 지도과장을 두 번, 중앙 대의원을 한 번 역임했다. 현재의 상이군경회에는 비판적이다. 2012년부터 3대째 회장을 맡고 있는 김덕남씨가 물러나야 할 적폐라고 생각한다. 그는 뜻 맞는 이들과 상이군경 적폐청산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 위원장으로서 청와대 앞 시민광장에 1인시위를 갔다가 우연히 ‘미안해요 베트남’ 1인시위를 하러 나온 젊은이들과 마주쳤다. 2017년 11월2일의 일이다. 그가 시민평화법정에 익명의 모자이크 영상 증인으로 참여하게 된 사연이다.

너와 나의 불행

지난해 4월22일 시민평화법정에서 재판장이었던 김영란 전 대법관은 “퐁니·퐁넛 사건 피해자인 원고들에게 피고 대한민국은 국가배상법이 정한 배상 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일종의 모의 법정이지만, 추후 실제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될 가능성도 높아 중요한 참고가 되는 판결이다. 이날 법정 주변엔 70대의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이 배회했다. 협박 전화를 하거나, 법정에서 난동을 피우려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이라는 자료집까지 만들어 “민간인 학살은 언어도단이며, 국군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국격 실추이고 국민 호도,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류진성씨가 말했다. “당시 3소대 병사들이 나와서 말해야 해요. 총 쏜 놈은 안 잊어버려요. 물론 내가 3소대원이었어도 그 상황에서라면 쏘았을지 모르겠지만.” 3소대원이 나오기 전에, 3소대장이 나와야 한다. 3소대장 출신 김기동씨는 2013년 10월의 어느 날 인터뷰 시간을 잡아놓고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현장 발포 책임이 있을 1중대장이 나와야 한다. 1중대장 출신 김석현씨는 2000년 4월 전화 인터뷰에서 “난 모른다”고 했다. 조기 귀국 사실조차 잡아뗐다.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니 중대장 이전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 중대장 김석현과 소대장, 하사관들의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행적을 조사한 1969년 중앙정보부 기록부터 공개해야 한다.

베트남전은 류씨에게 ‘불행한 인생의 한 토막’이다. 내가 당했고, 남들이 당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전쟁에서는 절대 승자가 없어요. 그곳에서 군인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야수예요. 전쟁은 야수들의 놀이터죠.” 야수들은 쉽게 불행해졌다.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거나 온몸이 벌집이 됐다. 그들을 야수로 만들었던 국가는 시시각각 병사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애써 숨기려 했고, 전쟁놀이하는 듯한 풍경만 언론을 통해 전시했다. 병사들이 매일 죽거나 다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숨기려고 해서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숨기려고만 한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불행하다. 다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진을 본다. 붕대로 얼굴을 감은 미군 병사보다 아이를 안고 뛰어오는 포즈를 취한 한국군 병사에게 더 진한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고경태 저자 humank21@gmail.com취재협조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문의 02-2295-2016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