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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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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응아이의 마지막 대학살, 밀라이

한국군의 숨겨진 과거와 미군의 유명한 전쟁범죄가 만나는 현장
등록 2019-02-23 14:06 수정 2020-05-03 04:29
살아남은 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집 현장에서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고도 기어나와 탈출한 쩐티오안이 당시 병원에서 꿰매고 이어붙였던 오른발을 보여주었다.

살아남은 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집 현장에서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고도 기어나와 탈출한 쩐티오안이 당시 병원에서 꿰매고 이어붙였던 오른발을 보여주었다.

“저는 응오아이마을에 살았어요.” “저는 랑마을에 살았어요.”

팜티투언은 스물아홉 살의 엄마였다. 쩐티오안은 여덟 살의 소녀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아침부터 포격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어요. 들판에 일하러 나갔던 엄마 아빠가 일찍 돌아왔어요.”

그날 미군이 들어왔다. 가족들은 긴장했다.

“방공호로 들어갔어요. 조금 뒤 잠잠해 나왔더니 헬기에서 미군들이 내리고 있었어요.” “아빠가 오늘은 밥을 빨리 먹자고 했어요. 8명이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두 개의 기적
쩐티오안.

쩐티오안.

생존자 2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날에 관하여.

“저와 아빠를 비롯해 가족 9명이 쫑마을로 피신하러 가다가 미군한테 잡혔어요.” “미군이 갑자기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쳐 밥 먹는 가족을 향해 총을 난사했어요.”

절체절명의 순간.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미군이 저희 가족을 비롯해 마을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도랑에 밀어넣었어요.” “할머니가 미군을 말리다가 오른팔 겨드랑이에 총을 맞았어요. 저는 오른발에 총을 맞았어요.”

사랑하는 혈육들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최소 5명 이상의 가족이 죽었다.

“미군들이 도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어요. 아빠, 언니, 여동생, 조카들까지 6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엄마, 아빠, 할아버지, 오빠, 남동생이 밥 먹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요. 할머니는 제 또 다른 남동생을 데리고 땅굴에 숨고, 저는 걸을 수 없어 침대 밑으로 숨었어요.”

50년 넘게 흘렀지만 침착할 수 없다. 말하다 말고 울먹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죽일 수 없었겠죠. 나중에 들으니 미군들이 총을 한 차례 쏜 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 또 총을 쏘고, 그렇게 세 차례나 일제사격을 했어요.” “침대 밑에 있는데 미군이 다시 집으로 와서 불을 붙였어요. 너무 뜨거워, 더 숨을 수 없었어요. 집이 불타 무너지고 엄마 아빠의 주검도 불에 탔어요. 기어서 탈출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생의 의지를 다졌다. 운도 좋았다.

“저와 두 딸은 사람들 맨 밑에 깔려 있었어요. 깨어보니 사람들이 떼로 죽어 있고 도랑이 온통 핏물이었어요. 셋 다 온몸이 피범벅이었죠. 미군을 피해 몸을 숨기며 윗마을로 도망쳤어요.” “오른쪽 발에서 피가 너무 흘러나와 진흙을 잔뜩 묻혔어요. 기어서 옆집으로 갔는데 다 죽어 있었어요. 다시 나와 고모 집으로 기어갔어요. 거기 가족도 다 죽어 있었어요.”

살았다. 살아서 오늘처럼 얼마나 많은 증언을 했는지 모른다.

“피를 뒤집어썼는데, 치료하려고 보니까 셋 다 멀쩡했어요. 이런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죠. 그 도랑에서 무려 170명, 170명이나 죽었어요. 생존자는 10명 남짓 되었지만, 우리를 빼면 다들 크게 다쳤다고 해요.” “오후가 돼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발목을 잘라야 한다고 했어요. 자신도 팔에 총상을 입은 할머니가 의사한테 울며불며 통사정했어요. 우리 손녀 고아가 됐는데 발목까지 자르면 어떻게 먹고사냐고. 너덜너덜한 발을 꿰매고 이어붙였어요.”

그 나무, 그 사진
선미증적 박물관 내 170명이 떼죽음당한 도랑을 재현한 곳에 선 팜티투언. 그는 미군의 세 차례 총격을 받고도 두 딸과 함께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선미증적 박물관 내 170명이 떼죽음당한 도랑을 재현한 곳에 선 팜티투언. 그는 미군의 세 차례 총격을 받고도 두 딸과 함께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선미증적 박물관 2층 전시실에 걸린 팜티투언과 작은딸 응우옌티리엔 모녀의 사진 앞에 선 딸 리엔. 사진 속 어머니를 빼닮았다. (왼쪽부터)

선미증적 박물관 2층 전시실에 걸린 팜티투언과 작은딸 응우옌티리엔 모녀의 사진 앞에 선 딸 리엔. 사진 속 어머니를 빼닮았다. (왼쪽부터)

2018년 12월31일, 밀라이에 갔다. 밀라이 박물관에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미에 갔다. 선미증적(證跡) 박물관(이하 선미 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장 까오티홍한(55)의 주선으로, 팜티투언(81)과 쩐티오안(59)을 만났다.

밀라이 혹은 선미는 20세기 전쟁범죄의 대명사다. 1968년 3월16일, 미 육군 아메리칼 사단 11여단 1대대 찰리중대원 70여 명은 이곳에서 4시간 동안 강간과 살인의 미친 파티를 벌였다. 노인과 여성, 어린이 504명이 희생됐다(다음날 상급 부대에는 적 128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박물관은 그 마을 한복판에 세워져 있다. 꽝응아이성(도) 선띤현(군) 띤케사(읍) 뜨꿍촌 케투언. 선미(Sơn Mỹ)는 띤케사에 있던 한 마을의 지명이고, 밀라이(Mỹ Lai)는 선미에 속했던 촌 이름이다. 미군은 이곳을 ‘밀라이 4구역’이라 했는데, ‘베트콩 거점’이라며 작전지도에 빨간 점을 찍었다는 의미에서 핑크빌(Pinkville)이라고도 했다. 베트남에선 지금 ‘선미’라 통칭한다.(뒤에서는 선미로 쓴다)

선미는 ‘남의 학살’이다. 예전에 선미 박물관을 두 번 방문한 적 있다. 관람객 마인드로 전시물만 쓱 둘러봤다. 전쟁범죄 충격은 국적을 뛰어넘지만, 관심의 거리엔 영향을 준다. 선미에 관한 그동안의 보도물도 대부분 외신이었다. 문득 선미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선미는 베트남전 학살 중에 가장 유명하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선미의 미군은 달랐을까. 한국군 학살 생존자 증언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언어가 안 통하는 외국인 병사들은 마을에 들어와 똑같이 불태우고, 파괴하고, 패고, 강간하고, 찌르고, 죽였다. 그렇게 총질해도 기적같이 목숨을 건지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다.

그 생사의 고비가 손에 잡힐 듯한 사진 한 장이 있다. 선미 생존자들과 인터뷰하다 그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무 앞에 바짝 붙은 한 무리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흐느끼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다. 당시 3소대에 배속된 사진병 로널드 L. 해벌이 현장에서 찍어 나중에 언론에 유출한 이 사진은 1970년 1월 미국 잡지 에 처음 실렸고 현재 선미 전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해벌은 이렇게 증언했다. “미군들은 13살 소녀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더듬으며 희롱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달려들어 할퀴고 저항하자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사진 속에서 맨 앞의 어머니 뒤에 숨은 소녀는 옷 단추를 잠그고 있다. 아이를 안은 오른쪽 여자도 윗옷 단추를 채운다. 해벌은 이들이 촬영 직후 M60 기관총에 몰살당했다고 전했다. 까오티홍한 박물관장은 사진 속 나무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희생자 75명이 잠들어 있는 묘지와 위령비.

희생자 75명이 잠들어 있는 묘지와 위령비.

탑 위에서 기관총으로 102명을 쏴죽인 발사지와 총을 맞은 들판.

탑 위에서 기관총으로 102명을 쏴죽인 발사지와 총을 맞은 들판.

박물관 마당 바로 옆에는 팜티투언이 살아남아 탈출한, 170명이 학살된 도랑을 재현해놓았다. 그날 무장 헬기를 조종하며 하늘에서 피로 물든 도랑을 보았던 브라이언 W. 리빙스턴 대위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옛날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는 성경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300여m 떨어진 마을로 들어서니 탑 위에서 기관총으로 102명을 쏜 발사 장소와 사람들이 총을 맞은 들판에 각각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그로부터 200m 거리에는 희생자 75명의 무덤과 위령비가 보였다. 전체 희생자 504명의 이름은 박물관 입구에 모두 적혀 있지만, 사건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학살이 집행된 현장마다 위령비가 따로 흩어져 있었다. 미군 사진병 해벌이 죽음 직전의 모녀를 향해 셔터를 누른 키 큰 나무 한 그루 앞에도 작은 비석이 15명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었다. 나무는 얼마 전 썩어가다가 수액을 맞고 회생했다고 한다. 비석 옆 대문으로 주민들이 드나들었다.

증언을 해준 팜티투언도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박물관 전시실에 남겨놓았다. 둘째 딸 응우옌티리엔이 10살 되던 1975년, 들에 나가는 엄마를 따라가다가 마을을 방문한 러시아(옛 소련) 조사단이 찍은 것이다. 딸 응우옌티리엔은 현재 박물관의 시설 관리 직원이다. 마침 근무 중이라고 해 전시실에 걸린 모녀 사진 앞에서 만났다. 그녀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의 저보다 훨씬 젊었죠. 사진 속 엄마와 지금의 저랑 똑같지 않나요?”

3살 때였지만 무서웠던 기억은 생생하다고 했다. “도랑에서 나온 뒤 엄마가 저를 안고 요만큼 가서 풀숲에 숨겨놓고, 또 저만치 살금살금 가서 6살이던 언니를 데리고 왔죠. 미군에게 들키지 않고 두 딸을 모두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셨어요. 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주검들을 지나치면서 계속 이렇게 말했대요. 엄마, 나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한국군 지뢰밭
미군 사진병 로널드 L. 해벌이 찍어 언론에 유출했던 총격 직전의 모습. 위키미디어

미군 사진병 로널드 L. 해벌이 찍어 언론에 유출했던 총격 직전의 모습. 위키미디어

미군 사진병 로널드 L. 해벌이 찍은 사진 속 나무가 오른쪽에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작은 비석이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었다.

미군 사진병 로널드 L. 해벌이 찍은 사진 속 나무가 오른쪽에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작은 비석이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었다.

선미가 널리 알려진 건 1969년 11월부터다. 사건 발생 20개월 만이었다.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M. 허시는 11월12일 미국 워싱턴의 작은 통신사 를 통해 첫 기사를 내보냈다. 그는 11여단 찰리중대 소속 군인 50여 명과 국방부, 국무부 관리에 이어 병사들 어머니까지 취재했다. 한국군 학살 생존자와 참전군인 증언을 담은 기사가 1999~2000년에 나온 점과 비교하면 정확히 30년 앞섰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느리게 온 탓일까.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지와 무관심을 고려하면 보도는 오히려 빨랐다고도 볼 수 있다.

선미는 본래 한국군 관할 지역이었다. 선미가 속한 선띤현의 다른 지역에서 선미 학살의 2배인 1068명이 한국군에 희생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99년 에 글을 쓴 구수정 호찌민 통신원(현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의 집계다. 해병제2여단(청룡부대)은 쭈라이에 본부를 두었던 1966년 8월에서 1967년 12월까지 꽝응아이성 선띤현과 빈선현에서 작전을 벌였다. 꽝응아이 전체로 보면 한국군 학살 희생자는 1700여 명이다. 특히 빈선현 빈호아사 9개 촌에서는 1966년 12월3일부터 6일까지 나흘 만에 43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빈호아 사건 현장에는 베트남에서도 몇 안 된다는 증오비가 서 있다.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글과 함께.

아이러니한 것은 찰리중대가 한국군 청룡부대로 인해 선미 학살 한 달 전 최악의 사고를 당했다는 추정이다. 찰리중대는 1968년 2월25일 선미 북쪽 부비트랩 지대를 지나다 6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중대는 발칵 뒤집혔고, 다들 베트콩에 대한 분노로 눈이 멀었다. 찰리중대 마이클 번하트 병장은 시모어 M. 허시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진실은 (두 달 전 이곳에 머물렀던) 한국군이 베이스캠프를 세우고 지뢰로 둘러쌌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린 그들이 지뢰를 설치해놓은 바로 그 지역으로 걸어 들어갔던 거고요.” 그는 “하지만 중대원들은 이 슬픈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식의 분노를 차곡차곡 충전하던 찰리중대는 한국군이 수십 차례 작전을 통해 1700여 명을 휩쓸었던 꽝응아이성에서 504명 통계를 더하며 대학살의 대미를 장식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 뿔뿔이 흩어졌던 선미 사람들이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왔다. 생존자 쩐티오안이 말했다. “고아가 된 뒤 스스로 살길을 찾았어요. 1975년에 돌아와 배상에 대한 기대를 했지요.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배상 책임을 져야 할 미국은 새 베트남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베트남은 ‘선미 회생’ 프로그램을 가동해 마을을 재건하고 1976년 박물관을 세워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기 시작했다. 1995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한 뒤에도 배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빈호아, 빈호아
선미증적 박물관 내 대형 조각상. 2016년 2월 한국 평화기행단이 방문했다.

선미증적 박물관 내 대형 조각상. 2016년 2월 한국 평화기행단이 방문했다.

그럼에도 선미 학살은 ‘팩트’로서 시빗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시간이 걸렸다. 1969년 이를 다룬 언론마다 ‘날조된 학살’이라는 공격을 당했다. “왜 공산주의자들의 학살은 다루지 않느냐”는 이들도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다. 미국에서 베트남전 논쟁은 끝났다.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조차 에서 “베트남전은 미국의 과오였다”고 인정했다. 한국에선 여전히 민감한 이슈다. 2019년 대한민국의 시계는 1969년 미국의 시간을 통과한다. 남의 나라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1980년 광주보다도 더 거짓말 취급을 당한다. 반대편에서 과거를 성찰하려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선미 박물관장 까오티홍한은 한국군에 의해 430명이 죽은 빈호아 이야기를 꺼냈다. “빈호아에 한국 시민단체가 많이 찾아와 위로하고 장학사업 등을 한다고 들었어요. 요즘은 선미가 빈호아를 부러워합니다.” 다만 그는 빈호아에 비와 무덤만 있어 황량하다고 했다. 선미와 비슷한 규모의 학살인데 방치돼 아쉽다고도 했다. 선미 학살보다 한 달 앞서 벌어진 꽝남성의 퐁니·퐁넛 학살도 언급했다. 박물관을 세워 자료를 전시할 사건이 많지 않느냐면서. 박물관은 방대한 기록물과 함께 품격 있게 희생자들을 추념하고 전쟁을 성찰하는 공간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이 벌어졌으나 허무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생존자 쩐티오안이 총을 맞았던 오른발을 보여주었다. 할머니의 애원으로 의사가 차마 자르지 못했던, 마구 꿰매고 이어붙여 변형된 발이다. 쩐티오안은 “결혼식날 오토바이도 없이 신랑 집과 신부 집을 걸어서 오가는데, 발이 불편했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살아남은 그녀의 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역사를 견뎌낸, 일그러진 그 발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띤케(베트남 꽝응아이)=글·사진 고경태 저자 humank21@gmail.com
취재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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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시모어 M. 허시의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시모어 M. 허시 지음, 김석 옮김, 세종연구원, 2009
《A LOOK BACK UPON SON MY,》 선미증적 박물관, 2009
《THE WITNESS FROM PINKVILLE,》 팜탄꽁 지음, 퍼스트뉴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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