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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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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된 섬, 잊힌 섬, 따이한을 기억하는 섬

등록 2019-02-03 00:58 수정 2020-05-03 04:29
이것은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어느 섬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귀신도 잡는다는 대한민국 해병이 자랑스럽게 여겨오던 어떤 신화의 이면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한국인들과는 관계없어 보이던 세계적 초대형 학살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어느 마을의 사진 한 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그 마을에 들어간 베테랑,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한국군 참전군인의 이야기다.
1968년 전후 베트남전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오늘은 그 첫 회다.
나는 4년 전 (한겨레출판)이라는 책을 냈다. 베트남의 한 마을을 무대 삼아 전쟁에서 흔히 벌어지는 집단살해 사건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탐구했다. 창간 멤버였던 내가 20년 전인 1999년부터 베트남전 보도를 담당하지 않았다면, 2013~2014년 에 ‘1968년 그날’을 1년간 연재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책이다. 이 연재는 책에서 못다 한 이야기다. 대단한 탐사취재의 산물은 아니다. 관심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소소한 수확이다. 책을 내고도 나는 해마다 1, 2월이면 베트남으로 갔다. 따뜻한 날씨가 그리웠고, 살짝 궁금한 몇 가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과 인물과 사진을 만났다. 때로는 이미 알던 사건이 다른 각도로 다가왔다.
8년간 32만 명을 보낸 이국의 현장에서 수십 년 전 비극이 끝없이 발견되고 발굴되는 것은 파병의 업보다. 그 비극의 뿌리와 결은 저마다 다르다. ‘1968년 못다 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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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베트콩들 천지였다면서요?”

“@#$%^&*_+=.”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쥔 레흥 할아버지가 하얗고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뭐라 뭐라 답했다. 치매를 앓고 있다는 94살 노인의 발음은 이 지역 특유의 억센 사투리와 섞여 베트남인조차 해독 불가능했다. 분홍색 스카프를 매고 ‘라이방’을 머리 위에 올려 쓴 레흥 할아버지의 열 번째 멋쟁이 딸 레티트엉(40)이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통역’을 해주었다.

“다 죽었어 다 죽었어, 하시네요.”

다 죽었다. 이 섬의 베트콩들은 다 죽었다. 베트콩이 아니라도 죽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가는 여행지이자 제2차 북-미 정상회담 후보지로 떠오르는 다낭에서 남쪽으로 25㎞. 오래된 무역도시 호이안에서는 서쪽으로 5㎞. 사방이 투본강에 둘러싸인 내륙 섬, 고노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베트남전 당시 이 섬에서 상상하기 힘든 대규모 융단폭격과 한·미·월(한국군·미군·남베트남군) 합동 초토화작전이 2년 동안 집중됐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섬의 한 마을에 ‘미군의 이름 아래 한국군을 기억하는’ 작은 비석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비석에 새겨진 사실관계를 증언해줄 레흥 가족이 생존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고노이는 잊힌 섬이다. 뭉텅이째 빠진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사의 한 퍼즐 조각이다. 해병제2여단 청룡부대 병력은 섬에 출몰하는 적을 성공적으로 섬멸했다는 기록을 파월한국군전사에 남겼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망각됐다. 참전군인들의 파편적인 회상과 1960년대 신문의 몇몇 짧은 기사로 전해질 뿐이다(가수 남진이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소총수로 고노이 지역에서 근무한다는 1969년 8월23일치 보도가 눈에 띌 정도). 현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상임이사인 구수정 박사가 1999년 집계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집단학살 사건 통계 ‘5개 성 80여 개 마을 9천여 명’에서도 고노이는 비어 있다. 그런데 비석이 존재한다니, 한국군은 이곳 주민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놓고 떠난 것일까. 2019년 1월1일, 호기심을 품고 고노이섬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구글맵에서 고노이(Gò Nổi)를 검색하면 가로로 길게 누운, 사람 입술을 닮은 섬의 형상과 만난다. 인구는 1999년 기준 2만5729명.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10배에 이르는 35㎢. 행정구역상 주이쑤옌현(군) 주이쩌우사(읍), 디엔반시 디엔꽝사, 디엔쭝사, 디엔퐁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호이안이 속한 꽝남성(도) 소속이다. 레흥 할아버지의 집은 동쪽 디엔반시 디엔퐁사 안하촌이다. (디엔반은 최근 시로 승격. 뒤에서 1960년대 상황을 설명할 때는 현으로 표기.)

레흥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기 전, 말로만 들었던 근처 위령비부터 찾아갔다. 베트남인들은 보통 망자들이 세상을 떠난 장소에 위령비를 짓는다. 비문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68년 2월20일(무신년 정월 9일) 아침 9시, 1번 국도에서 디엔퐁사까지 수색한 미군이 쩐티또 할머니 집 마당에 민간인을 몰아넣고 R15, R16 총으로 32명을 쏘아 죽였으며, 5명은 인근 비밀 방공호 안에서 수류탄으로 죽였다. 쩐티또 할머니 집 마당 학살은 고노이 땅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 증거와 흔적 중 하나다.”(R15, R16은 옛 모델명이 AR15, AR16이었던 M16 소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광차 고노이섬에 들른 한국인이 베트남 통역자의 도움으로 위령비를 읽는다면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 미군 짓이었네.

폭격과 섬멸
레흥(왼쪽)과 그의 열 번째 딸 레티트엉. 레티트엉은 알아듣기 어려운 레흥의 말을 친절하게 옮겨주었다.

레흥(왼쪽)과 그의 열 번째 딸 레티트엉. 레티트엉은 알아듣기 어려운 레흥의 말을 친절하게 옮겨주었다.

“(앞 생략) 나는 이해(1969년) 4월에 들어서면서부터 20여 년 동안 공산군의 아성으로 전초기지를 담당하고 있었던 ‘고노이섬’에 대한 작전을 감행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즉, 이 섬은 미 해병대가 단독으로 작전하다가 70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물러선 아주 험악한 지역이었던 것으로서 내가 이 작전을 단행하기까지에는 아주 고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미해병대와 합동으로 이 ‘고노이섬 작전’을 감행하기로 다짐하고 (중략).”( 제7권, 해병제2여단장 이동호 준장)

일본 오키나와와 미국령 괌에서 발진한 미 공군전략사령부 폭격기 B52가 날아와 비를 뿌리듯 융단폭격을 했다. 인도차이나반도 동해에 떠 있는 미 해군사령부 제7함대가 함포사격을 가했다. 인근 포병부대는 105㎜ 곡사포 등으로 집중 포격을 했다. 미군이 지원한 전차, LVT(수륙양용 장갑차), 불도저가 총동원돼 정글을 밀고 들어갔다. 병사들은 뒤따라 수색 활동에 나섰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그려본 한국군의 고노이 작전 모습이다.

이 섬은 ‘불멸의 아성’으로 불렸다. 그 자체로 거대한 요새이자 기지였다. 지형은 평평했으나 갈대 등이 우거진 섬 곳곳에 미로 같은 크고 작은 동굴과 땅굴이 투본강과 연결돼 있었다. 여기엔 북베트남 정규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군대, 지방 게릴라 등 1천여 명이 ‘분산 암약’한다고 여겨졌다. 미군은 이 섬을 ‘다지시티’(Dodge City)라 일렀다. 서부 개척 시절 무법이 횡행했던 캔자스주 서남부 아칸소강 근처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불온한 섬은 다낭, 호이안과 너무 가까웠다. 그게 문제였다.

미 해병1사단 예하 부대는 1968년 5월4일부터 8월24일까지 고노이섬에서 ‘앨런 브룩’(Allen Brook) 작전을 펼쳤다. 5~8월은 베트남의 우기다.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듯 뜨거워’ 초주검이 되는 때다. 미군은 고노이섬 정글의 폭염과 폭우 속에서 악전고투했다. 미 해병대 기록을 보면, 5월 한 달에만 138명이 목숨을 잃고 686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까지 미군 172명이 죽고 1124명이 다쳤다. 전과는 적 917명 사살. 그러나 ‘고노이 요새’는 섬멸되지도, 평정되지도 않았다.

미군은 이듬해인 1969년 5월26일부터 11월7일까지 재차 이곳에서 ‘파이프스톤 캐니언’(Pipestone Canyon) 작전을 펼쳐 적 852명을 죽였다(미군 사망 71명). 같은 해 6월3일부터 8월15일까지는 한국군도 고노이에서 승룡12-1, 12-2, 13호 작전을 실시했는데 이는 ‘파이프스톤 캐니언’의 일부였다. 해병제2여단은 이 작전에 1대대, 2대대, 3대대, 5대대, 포병대대 등 거의 전 병력을 동원했다. 는 적 566명을 사살하고 17명을 포로로 삼는 전과를 올렸다면서 아군의 전사는 10명뿐이라고 적었다.

“아, 폭격은 정말 엄청났어.”

레흥이 말했다. 옆에 있던 딸 레티트엉이 아버지 말을 또박또박 옮겨주면서 덧붙였다. “저도 알아요. 어릴 때 흙보다 탄피와 폭탄 잔해가 더 많았어요. 그걸 아무리 모아도 다 모을 수 없었어요.” 레티트엉은 전후 세대인 1979년생이다. 그녀가 성장기를 보낸 1980년대에도 고노이섬의 전쟁은 계속됐다. “도랑을 파다 불발탄이 터져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저도 음식을 만들던 엄마를 등 뒤에서 껴안고 있다 땅에서 불발탄이 터져 죽을 뻔했어요. 며칠 동안 귀가 안 들렸죠.”

레흥이 또 입을 열었다. “땅굴은 부비트랩 천지였어. 미군에 저항하려고 만든 거니까 남베트남 군인들한테는 절대 땅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 레티트엉이 다시 덧붙였다. “저 어릴 적 집 앞 둔덕에 미군 초소가 남아 있었어요. 그 초소 바로 밑 땅굴에까지 베트콩이 숨었을 정도였대요.”

폭격이 한창이었는데도 레흥은 떠나지 않았다. 집 기둥을 잡고 엎드려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밤쭈’라 했는데, 그가 밤쭈였다. 레흥은 대대로 한의사 집안이었다. 한약재로 쓰는 약초를 비롯해 지킬 재산이 많았다. 키우는 소가 31마리에 이를 정도였다. 레흥은 베트콩에게 소를 2마리 빌려준 뒤 못 받았다며 웃었다. 드디어 그가 따이한(한국군을 이르던 말) 이야기를 꺼냈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우리보고 빨리 이 지역을 떠나 다른 데로 가라고 했어. 자기들이니까 살려주는 거라며, 여기 따이한이 들어오면 다 죽는다고 했어. 따이한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남자들은 다 산으로 도망쳤지. 잔인하다는 소문, 다 쏴죽인다는 소문.”

“요 앞 위령비엔 미군이 민간인을 죽였다고 나오던데요.” “미군? 아니야, 따이한이야.” “근데 왜….” “이 전쟁은 미국과의 전쟁이었고 따이한은 미군을 돕기 위한 용병이었잖아. 결국 미군이지.”

미군이었다. 동시에 따이한이었다.

위령비의 팩트
32명이 죽은 고노이섬 집단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레티빈. 그녀가 증언하던 중 울먹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32명이 죽은 고노이섬 집단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레티빈. 그녀가 증언하던 중 울먹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들이 사건을 겪은 날은 양력으로 1968년 2월7일이다. 위령비에 적힌 2월20일은 계산 실수인 듯하다. 2005년 꽝남성 인민위원회가 이곳을 역사문화유적지로 공인한 뒤 비는 세 번째로 세워졌다. 두 번째로 세워진 옛 비석은 현 위령비 옆에 방치돼 있었다. 드러누운 옛 비석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더니 1월8일로 적힌 음력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비의 1월9일과 하루 차이가 난다. 레흥 가족을 비롯한 유가족들이 실제 제사를 지내는 날짜에 근거해볼 땐, 현 위령비에 쓰인 음력 1월9일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양력 2월7일.

레흥은 그날 아침을 기억한다. 옥수수밭에서 물소를 데리고 일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에 폭격기가 나타났고,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폭탄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투본강변으로 급히 달려 몸을 피했지만, 등과 정수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따이한들이 동네 사람들을 죽이고 빠진 뒤, 다시 왔다고 하지. 처음에 잘 숨어서 살아남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남의 피를 일부러 자기 몸에 뒤집어쓰고 죽은 척했다는 거야. 두 번째로 온 한국군들은 남베트남 통역병을 대동했다고 해. 그 통역병이 ‘이 사람들은 민간인’이라고 말해줘서 그냥 간 거야.”

레흥은 당시 자신을 제외한 처자식들을 안전지대에 속하는 섬 밖 디엔민사 누나 집에 기거하도록 했는데, 그날 하필 임신한 부인과 두 딸이 고노이에 와 있었다. 임신한 부인과 막내딸이 희생됐다. 생존했다면 90살이었을 부인 레티응옷의 사진이 세워진 제단은 집 안쪽에 놓여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첫째 딸 레티빈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한국군의 집단 총격을 받은 32명 중 유일한 생존자다.

1968년 2월7일은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총봉기를 한 ‘뗏 공세’(구정 대공세) 직후로 해병제2여단이 호이안 인근에서 ‘괴룡 작전’을 벌일 때다. 뗏 공세 실패 뒤 패퇴하는 적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작전이었다. 남베트남 전역엔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2월7일 청룡부대 병력이 고노이섬에 갔다는 기록은 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고노이섬이 베트남을 남북으로 잇는 1번 국도와 가깝고 한국군 책임 지역인 디엔반현 내에 있었기 때문에, 괴룡 작전 기간 중 수색·정찰 활동을 벌이다 섬 안에 진입했을 여지는 충분하다.

“내 기억으로는 미군과 한국군이 같이 들어왔어.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고노이섬 안에 주둔했고, 한국군은 섬을 잇는 육지의 철교 부근에 주둔했어. 이 섬엔 폭격도 잦고 베트콩도 많아 사람들이 다 떠났는데, 우리같이 남은 사람들을 유격대가 굉장히 귀하게 대했지. 내가 다쳤을 때도 혁명군 의사가 치료해줬어.”

레흥이 말했다. 레흥의 새부인에게서 태어났을 레티트엉은 5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장난을 쳤다. 턱수염을 손으로 쥐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연로해 좀 오락가락하시는데 오늘은 좀 기억을 잘한다”고 했다. 레흥은 갑자기 허공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 가사를 읊듯 길게 중얼거렸다. 뭐냐고 했더니, 살아남은 유격대원이 희생된 부대원들에게 바치는 시라고 했다. 그의 기억력은 명징할까? 51년 전 사건에 대한 구순 노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첫째 딸 레티빈(61)이야말로 진짜 목격자다. 소재를 물었다. 차로 1시간 걸리는 섬 밖 다이록현에 산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무서워서 한국군을 감히 볼 수 없었어요. 그들은 손에 총을 쥐고 있었고, 옷은 얼룩덜룩한 무늬였어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는데 ‘비씨(베트콩), 비씨’라는 말만 또렷해요. 저는 그들에게 ‘옹런(ông lớn·큰아버지), 옹런’이라 부르며 사정했어요. 손을 비비면서 제발 쏘지 말라고 했어요.”

“옹런, 옹런”
꽝남성 고노이섬 지도.

꽝남성 고노이섬 지도.

레흥 집 앞의 위령비(왼쪽)와 사당. 위령비엔 미군이 한 할머니 집 앞에서 32명, 비밀 방공호에서 5명을 죽였다고 돼 있다. 주민들은 한국군이 미군을 도운 용병이라 미군이라 적었다고 말한다.

레흥 집 앞의 위령비(왼쪽)와 사당. 위령비엔 미군이 한 할머니 집 앞에서 32명, 비밀 방공호에서 5명을 죽였다고 돼 있다. 주민들은 한국군이 미군을 도운 용병이라 미군이라 적었다고 말한다.

레흥의 딸이자 레티트엉의 큰누나 레티빈. 그녀는 한국인 앞에서 처음으로 증언하는 따이한의 고노이섬 학살 생존자다. 그날 아침 8시께, 10살 소녀였던 레티빈은 군인들이 차 타고 오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있던 엄마 레티응옷(39), 막내 여동생(3)과 함께 집 마당에 있던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여동생의 정식 이름은 없었고 ‘엠바이’(일곱째)라고만 불렀다. 임신 3개월의 엄마는 배가 조금 부른 상태였다. 한국군이 방공호 앞에서 나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엄마와 동생은 나오자마자 총을 맞았다. 피투성이가 된 동생은 숨이 끊어지기 전 즉사한 엄마의 몸 위에 올라가 젖을 빨려고 했다. 레티빈만이 현재 위령비가 있는 그 자리로 50여m를 끌려갔고, 모인 주민들 무리에 섞였다. 살려면 빌어야 했다. 병사들을 향해 빌었다. “옹런, 옹런.”

“한국군이 총을 쐈어요. 그리고 수류탄을 던졌어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다른 사람들 밑에 깔려 있었어요. 피를 철철 흘려 목이 말랐어요. 주변을 맴돌며 물을 찾았어요. 아무도 없어 마을을 향해 기어갔어요. 아는 동네 오빠를 만나, 그 집 엄마의 도움으로 방공호에 또 숨었죠. 불을 피워 밥하면 연기 때문에 발각될까봐 물만 조금씩 먹어야 했어요. 그땐 거의 의식이 없었어요.”

내가 만나본 학살 생존자들은 예외 없이 증언을 하다 울었다. 레티빈도 마찬가지였다. 말하던 중 눈자위가 붉어졌다. 한기가 끼친다며 위 겉옷을 가져와 입었다. 요즘도 그날 꿈을 꾼다고 했다. 그날의 순간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다. 50년이 지나도 고장난 녹음기처럼 계속 재생되는 그 기억, 그 트라우마는 죽어야 끝날지도 모른다.

레티빈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뒤 디엔반 병원에서 수혈받아 생명을 건졌다. 1975년 해방된 뒤에는 사이공에서 가장 큰 쩌라이 병원에서 진료받을 기회를 얻었다. 부자 아버지를 둔 덕분이었다. 서양인 의사가 얼굴을 검사하더니 신경이 다 끊어져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오른쪽 눈은 실명, 왼쪽 뺨엔 총알이 스쳐간 자국, 다 날아간 왼쪽 어금니, 그리고 엉덩이와 허벅지와 왼쪽 손목에 남은 수류탄 파편. 레티빈은 흉터가 새겨진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사건 사흘 뒤 집에 왔어요. 그제야 현장에 가서 주검들을 보았어요. 관은커녕 돗자리도 없이 주검을 땅에 묻고, 나무를 꽂아 표시를 해두었죠. 우리 가족은 결국 섬을 떠나 디엔안사의 남베트남 관할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1972년에 돌아왔어요.”

레티빈의 집은 꽝남성 다이록현 다이떤사 푸퐁촌이다. 한의사 레흥은 이 지역으로도 환자를 보러 오곤 했는데, 훗날 사위도 진찰하게 되었다고 한다. 레티빈의 남편은 뼈가 곱아드는 증세가 있는 장애인이다. 아버지가 둘을 맺어주었고, 결혼 뒤 이곳에 정착했다.

전쟁의 아웃소싱
1969년 6월 이후 승룡12-1호 작전 중 투본강을 건너는 한국군 청룡부대원들. <대한민국 해병대-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족보>

1969년 6월 이후 승룡12-1호 작전 중 투본강을 건너는 한국군 청룡부대원들. <대한민국 해병대-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족보>

1968년 5~8월 고노이섬에서 전개된 ‘앨런 브룩’ 작전. 미군 병사들이 전차를 앞세워 적 은거지로 의심되는 지역을 수색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1968년 5~8월 고노이섬에서 전개된 ‘앨런 브룩’ 작전. 미군 병사들이 전차를 앞세워 적 은거지로 의심되는 지역을 수색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제럴드 웨이트 교수가 1970년 미 해병제1사단 민사장교로 고노이섬에서 지낼 때의 모습. 전략촌의 베트남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제럴드 웨이트 제공

제럴드 웨이트 교수가 1970년 미 해병제1사단 민사장교로 고노이섬에서 지낼 때의 모습. 전략촌의 베트남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제럴드 웨이트 제공

고노이섬에 위령비가 있다는 사실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어느 참전군인 출신 미국 교수의 논문 때문이었다. 이름은 제럴드 웨이트(72). 미국 인디애나주 먼시의 볼주립대학 강단에서 2010년 은퇴한 인류학자이며, 현재 이 대학의 ‘평화와 분쟁연구센터’ 비상근 연구원이다. 그는 2014년 8월 발행된 (IJWP)에 ‘전쟁의 외주화: 용병의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Outsourcing a war: What you get for your mercenary dollar)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전쟁의 아웃소싱이 끼치는 심각한 폐해에 대해 말하며 자신이 겪은 실례를 든다. 고노이섬 이야기다.

웨이트 교수는 1969년 12월 말부터 1971년 1월까지 미군 해병제1사단 민사장교로 고노이에 파견됐다. 그는 고노이 전략촌 건설 프로젝트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연구 목적을 포함해 베트남을 총 16차례 방문하는데, 주 관심사는 고노이섬 마을이 어떻게 변했고 주민들이 전쟁의 그늘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였다.

그는 레흥 집 근처 위령비의 존재를 2004년에 알게 된다. 2000년 이후 현 위령비 자리에는 최초로 세워진 자그마한 비석과 사당이 있었다. 다만 비문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전우 한 명이 부비트랩으로 살해된 장소를 찾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비석이 있는 자리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을 모아놓고 죽였다고 말했다. 한데 2008년 학생들과 함께 다시 방문해보니 새로 단장한 위령비엔 미군의 학살로 기록돼 있었다. 주민들은 한국군을 미군과 동일시했다.

웨이트 교수는 내가 만난 레흥, 레티빈 부녀를 2004년 인터뷰했다. 이 지역이 꽝남성 역사문화유적으로 공인받기 전이었다. 논문에는 사건일의 양력과 음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레흥 가족과 논쟁을 벌이다 좌절하는 대목이 흥미롭게 나온다. 한데 사건 연도가 1970년 닭띠 해다(실제 닭띠 해는 1969년이다). 내가 전자우편으로 웨이트 교수에게 1970년이 정말 맞냐고 하자, 나름의 근거를 대며 1969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레티빈에게 수차례 확인했다. 1968년인가, 1969년인가, 1970년인가. 위령비는 육십갑자(무신년)까지 병기하며 1968년이라고 했다. 레티빈 역시 1968년이라고 답했다.

논문에는 그가 고노이섬에 있던 시절 두 명의 한국군 해병대원들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왜 당신들 부대엔 포로가 없는가”라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당신들이 베트콩 죽이라고 돈을 줬잖아.” 그는 “용병의 전과를 측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검을 세는 것이었다. 주검만 있다면 전투를 잘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누가 사법적 측면에서 한국군을 통제했느냐”고 묻는다. 이런 용병 윤리가, 불분명한 지휘체계와 함께 전시 잔혹 행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분석이다. (베트남에서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행사한 한국군을 용병이라 단순히 정의할 수 있을까? 웨이트 교수는 전자우편에서 “용병이냐 동맹군이냐는 대가의 지급 여부가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논문에서 외주화한 전쟁의 비인간성과 책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이라크 전장에서 활동한 민간군사기업(PMC)을 예로 들며, 이런 방식이 전쟁을 종식하고 효과적인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중심에 한국군이 관여한 고노이섬 사례가 있다.

이 사건은 베트남전쟁 기간에 벌어진 전체 잔혹 행위에서 어떤 비중과 의미를 지닐까. 웨이트 교수는 “당신이 만약 베트남전쟁의 수많은 희생자를 고려한다면 고노이섬 학살은 양동이 또는 연못의 물 한 방울”이라고 논문에 썼다. 연못의 물 한 방울!

한국군과 관계된 유사한 사건이 고노이섬에서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생존자 레티빈의 증언이 맞다면, 한국군 청룡부대는 1968년 2월부터 고노이섬에 발을 들였다. 1969년에는 승룡12, 13호 작전을 하러 갔다. 섬이 폭격으로 모래밭처럼 황폐화한 1970년에도 갔다(웨이트 교수가 한국군과 대화를 나누는 논문 내용으로 미뤄 짐작하면). 그러나 날짜별로 한국군 활동을 기록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는 부실하고 안일하다. 미담과 혁혁한 전과만 고색창연하다. 전과와 손실 면에서 (오히려 미군보다) 대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고노이섬에서의 1969년 승룡 작전을 베트남인들은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1968년에 여러 번 갔다면 그 역시 어떻게 비쳤을까. 근접 학살이 아니더라도, 포병부대가 가장 많은 폭탄을 소비했다는 이 섬에서 포격으로 무고하게 죽은 사람은 또 얼마일까.

가 전하지 않은 베트남전의 많은 이야기는 1999년 4월부터 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만 20년이 된 시점에, 고노이는 이제야 드러난다. 나는 단 하루 섬에 머물며 단 한 가족을 만났다. 아직은 연못의 물 한 방울 수준이다.

고노이(베트남 꽝남)=글·사진 고경태 저자 humank21@gmail.com취재협조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문의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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