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와 시민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건설 영구 중단 여부가 결정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10월20일이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위원장 김지형)가 시민대표참여단 500인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판단한 결과를 정부에 전달한다. 이들의 결정은 문재인 정부의 탈핵 정책은 물론 한국 사회가 장기적으로 고민해가야 할 에너지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공론조사’란 개념은 무엇인지, 공론화위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됐고, 두 달 넘게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등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짚어본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영구 중단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문 대통령은 6월19일 고리 1호기 영구 중단 기념식에 참석해 신고리 5·6호기에 대해 “안전성과 함께 공정률과 투입·보상 비용, 전력 설비 예비율 등을 종합 고려해 빠른 시일 내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겠다”고 밝혔다. 공약 내용을 밀어붙이는 대신 ‘사회적 합의’를 거치겠다는 선언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로부터 8일 뒤인 27일 국무회의에 참석해 사회적 합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론조사’를 제안했다. 이후 정부는 공론조사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정부와 독립된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공론조사 설계 및 관리를 맡겼다.
문 대통령이 제안한 ‘공론조사’란 1988년 제임스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안한 여론수렴 방법이다. 국민을 대표할 수 있게 표본추출된 소수의 시민들이 자료집과 전문가 강연 등을 통해 논의 주제를 학습한 뒤 토론 같은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수립한다. 시민들은 숙의 과정을 거치기 전 1차 의견조사에 임하고 숙의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2차 조사에 응한다. 숙의에 참여한 시민 의견이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는 것이 핵심이다.
문 대통령 제안으로 ‘공론화위’ 출범신고리 5·6호기 사업 주체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이사회는 공론화위가 출범한 뒤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사를 “3개월 동안 잠정 중단하겠다”고 결정했다. 신고리 5·6호기의 종합공정률은 5월 말 현재 28.8%(실제 시공률 10.4%)였고, 이미 집행된 예산이 1조6천억원이나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사가 진전되고 ‘매몰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정부는 공론화위 출범을 서둘렀다. 공론화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7월17일 국무총리훈령(690호)을 신설했고, 훈령 신설 일주일 만인 7월24일 공론화위가 공식 출범했다.
정부는 중립적인 공론화위 위원을 구성하기 위해 인문사회·과학기술·조사통계·갈등관리 등 4개 분야 전문기관·단체를 정해 후보자를 추천받았다. 이후 핵발전 찬반 단체의 제척 의견을 받아 9명을 최종 선정했다. 정부는 “핵발전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이고 균형적인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은 한국의 미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매우 엄중한 사안이다. 당연히 보수 언론과 핵발전 찬성 단체의 흔들기가 시작됐다. 이들은 핵발전소 건설 공사 백지화 여부를 검토할 위원회가 핵발전을 잘 모르는 비전문가로 구성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론화위는 평범한 시민으로 구성된 시민대표참여단이 신고리 5·6호기와 핵발전을 충분히 학습한 뒤 공사 중단 여부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공론화 과정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역할만 담당한다. 공론화위가 오히려 핵발전과 이해관계가 없는 ‘비전문가’여야 하는 이유다. 김지형 공론화위 위원장은 출범 기자회견에서 “절차적 정의를 지켜내겠다. 가장 필요한 덕목은 ‘중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론화위는 출범 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놓고 혼선을 빚었다. 출범 사흘 뒤인 7월27일 처음 열린 정례회의 결과 발표 자리에서 공론화위 대변인단은 “위원회가 공사 백지화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권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혼란을 부추겼다. 정부는 이에 앞서 “공론화위가 구성한 시민참여단이 내리는 결정을 그대로 정책에 수용하겠다. 시민참여단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최종 결정권자는 그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논란은 이낙연 국무총리가 7월31일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책임과 결정의 주체라는 건 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일단락됐다. 즉, 시민참여단의 권고가 나오면 정부가 이를 참고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설명이었다.
공론화 과정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에 의견을 내는 주체는 시민이다. 공론화위는 출범 한 달이 됐을 무렵인 8월25일 만 19살 이상 2만 명을 대상으로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여부 등에 관한 1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국에 있는 성인 남녀를 대표할 수 있도록 성·연령·지역을 고려해 2만 명을 뽑았다. 공론화위는 설문에 응한 사람의 성별·연령·태도(건설 중단·재개) 비율을 다시 고려해 500여 명 규모의 시민참여단을 최종 선발했다.
공론화위원은 공론화 과정 ‘설계자’시민참여단은 한 달 동안 자료집과 온라인 동영상 강의 등으로 신고리 5·6호기 문제를 학습한 뒤 최종적으로 2박3일 합숙 등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 특히 2박3일 합숙 기간에는 수면 시간을 빼놓고 거의 하루 종일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사실관계 △핵발전(원자력)의 안전성·위험성·경제성·에너지원으로서의 비전 △핵폐기물 처리 △대체에너지 가능성 등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다. 중단·재개 쪽 전문가의 강연을 듣고 질문도 한다. 공론조사는 주제에 대한 충분한 학습을 거치면 일반 시민도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조사 방법이다.
공론화위가 서서히 방향을 잡아가자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공론화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해관계자들이었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를 주장하는 한수원 노동조합은 8월1일 지역 주민, 핵발전계 교수와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공론화위 활동중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고, 8일에는 서울행정법원에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 구성 취소 및 국무총리훈령에 대한 취소·효력정지 신청을 냈다. 법원은 9월 초 한수원 노조가 낸 활동중지 가처분 신청을 각하했고, 노조 쪽은 즉시 항고했다. 훈령에 대한 취소·효력정지 신청에 대해서도 법원은 9월28일 각하 판결했다.
공론화위 시민대표참여단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500명의 표본집단으로 구성돼 있지만 한수원 노조, 신고리 5·6호기 인근 지역인 울산 울주군 서생면 주민 등 직접 이해관계자는 제외돼 있다. 공론화위는 8월28일 처음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지역 주민을 만나기 위해 직접 서생면을 찾아갔다. 그러나 건설에 찬성하는 서생면주민협의회와 범군민대책위는 ‘공론화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펼침막을 들고 공론화위 일행을 맞았다. 김지형 위원장은 지역 주민 대표와 선 채로 5분 남짓 대화를 나눠야 했다. 이에 견줘 공사 중단을 원하는 지역 주민과의 만남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시민참여단 2박3일 합숙 뒤 최종 의견 조사논란이 이어지자 일각에선 공론화위 시민대표참여단에 지역 주민을 일부 포함시켜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공론화위는 9월6일 “특정 지역에 가중치를 부여하면 시민참여단의 ‘국민 대표성’이 무너져 신뢰성이 훼손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대신 공론화위는 시민참여단의 2박3일 합숙 프로그램 때 이해당사자들이 시민참여단과 만나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할 계획이다. 그 밖에도 공론화위 시민참여단 운영과 관련된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탈핵 단체들 쪽에서 하나의 문제제기를 하면, 원전에 찬성하는 쪽에서 또 다른 문제를 들고나오는 식이다. 이 때문에 시민참여단에 제공돼야 할 자료집 제작이 늦어지고 순회 토론회가 연기되는 등 여러 차질이 빚어졌다.
시민참여단이 참여하는 2박3일 합숙은 10월14일부터 시작된다. 합숙 마지막 날인 10월16일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의견 등을 묻는 최종조사에 응한다. 공론화위는 시민참여단의 최종조사 결과를 분석해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정리한 뒤 10월20일께 정부에 권고안을 낼 계획이다. 이윤석 공론화위 대변인은 “최종보고서에는 시민참여단이 밝힌 중단 및 재개 비율도 나오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이유 때문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지 등 우려 사항과 대안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시민참여단의 의견을 받아안은 공론화위가 정부에 어떤 방식의 권고를 내놓을지다. 일단 공론화위가 정부에 최종 제출할 보고서엔 공사 중단과 재개에 대한 시민참여단의 의견 비율이 명시된다. 물론 공론조사의 취지에 따라 숙의를 거친 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의견을 바꿨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의 내용이 포함된다.
문제는 찬반 비율이다. 80 대 20과 같이 시민들의 의견이 한쪽으로 압도적으로 쏠릴 경우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49 대 51처럼 중단·재개 의견이 팽팽한 경우엔 또 다른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이 “(중단·재개 의견) 편차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유의미한지 평가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기준을 정할지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다.
공론화위는 최종조사를 마친 뒤 구체적인 권고안 형식을 확정할 예정이다. 시민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설 경우 공론화위는 명확한 방향성이 담긴 권고안을 내기 어렵다. 이 경우 결국 공은 정부에 넘어간다. 정부는 공론화위 출범 당시 “공론조사 결과가 나오면, 국무회의에 보고해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단·재개 의견이 근소한 차이를 보일 땐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정부로선 상당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찬반 비율 팽팽하면 정부에 부담지금까지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찬반 의견이 한쪽으로 쏠리기보다는 팽팽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8월11∼12일 전국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건설 공사 백지화 여부에 대해 ‘향후 공론화 과정을 지켜보고 판단하겠다’며 당장 찬반 입장 표명을 미룬 사람이 전체 시민의 43.2%나 됐다. ‘원전을 계속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은 28.8%로 건설 중단(20.9%)보다 높았다. 이후 나온 다른 여론조사기관의 결과를 보면, 중단과 재개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올까. 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대규모 공론조사의 결과는 500명 시민참여단 손에 달렸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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