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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칠기삼 법의 탄생

5당 국회의원 ‘정책통’ 보좌진 5인이 말하는

널리 이로운 법안이 빛을 보기 어려운 까닭
등록 2017-09-28 04:20 수정 2020-05-03 04:28
2015년 3월3일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 법안을 꺼렸던 국회의원들은 압도적인 찬성여론에 밀려 결국 통과시켰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2015년 3월3일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 법안을 꺼렸던 국회의원들은 압도적인 찬성여론에 밀려 결국 통과시켰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다면. 양심에 따라 군복무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적당한 전세금과 월세를 내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면. 소수의 기간제 노동자마저 1년이 지나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시민의 삶을 지금보다 덜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상상이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관련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아직도 시민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가 상상의 영역에 머무는 것은 국회가 관련 법을 십수년 동안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획연재 <font color="#C21A1A">‘국회는 대나무숲’</font>을 통해 제안한 몰래카메라 판매규제법, 양육비 대지급법, 원금 초과 이자 금지법 역시 시민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왔으나 국회로부터 외면당한 법안들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역구 법안’, 죽기 살기 통과 노력</font></font>

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법안들은 빛을 보기 어려운 걸까. 그 과정을 가까이서 목격한 국회의원 보좌진 5명에게 이유를 물었다.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 등 원내 5개 정당 소속인 이들 보좌진은 당이나 의원실에서 10년 넘게 입법 과정을 담당한 ‘정책통’으로 불린다. 대화는 9월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2시간 가까이 이뤄졌다.

15년간 보수·진보 정당을 두루 경험한 ㄱ 보좌관(자유한국당·4급)은 ‘공동발의를 해달라’고 다른 의원실에서 가져오는 법안을 훑어보면 대충 ‘감’이 온다고 했다. “공익을 위한 법안인지, ‘업자’(이해관계자)를 위한 법안인지” 말이다. 기업·기관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나 지역구 주민의 요구사항을 담은 ‘민원성 법안’으로 의심될 때는 해당 의원실에 전화해 따져묻기도 한다. “그러면 그쪽에서 민원성 법안이라고 시인하기도 합니다. 지역구 주민들이 정말 불편해하는 민원이라면 (우리가) 들어줄 만도 하지만, 순전히 사적 이익으로 된 법안은 (공동발의 목록에서) 걸러내요.”

ㄱ 보좌관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법안은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법안”이다. 2015년 통과된 종교인 과세 법안(2018년 시행)이나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심사 중인 근로시간 단축 법안(주당 최대 68시간→52시간)이 대표적 예다. 그는 “통과가 되든 안 되든 (국회가) 문제제기를 해주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고 (결국 국회는) 업자들만 와서 민원을 넣는 곳이 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공익 법안보다 현실적으로 직접적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민원성) 법안이 더 많이 발의”(ㄱ 보좌관)되고 있어서다. 20대 국회 들어 1년4개월 동안 제출된 9162건(9월20일 기준·의원 평균 31건)의 법안 중 상당수는 시민 대다수에게 도움을 주는 법안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물론 “경험상 공익 법안이 더 많다”는 13년차 ㄴ 보좌관(바른정당·4급)의 반론도 있다.

여야를 떠나 의원들은 자신에게 표를 던지는 지역구 주민들의 ‘관심 법안’ 통과에 최우선 순위를 두게 마련이다. 국회에 들어와 13년째 민주당 계열에서 근무하는 ㄷ 보좌관(민주당·4급)은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관련 법안은 정말 죽기 살기로 통과시키려 노력한다. 그래서 (때로는) 안 될 법안이 통과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른 보좌관들도 이구동성으로 “지역 민원은 물불 안 가린다”고 맞장구쳤다. 지역구 의원이 지역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역구에 과도하게 매몰되면 ‘국민의 대표자’라는 또 다른 역할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법안 거래, 현실적으로 불가피”</font></font>

소수 집단·지역에만 이로운 법안은 대부분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처리된다. 반면 다수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법안에 관한 국회 논의는 ‘요란한 빈 수레’가 되기 십상이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법안’은 보수·진보 정당이 힘을 겨루는 ‘쟁점 법안’이 되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러나 애초 입법 의도가 온전한 살아남아 본회의를 통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야는 9월1일 시작된 정기국회에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초고소득자·대기업 증세 관련 세법 개정안과 ‘문재인 케어’ 관련 국민건강보험법 등을 두고 ‘입법 전쟁’을 예고했다. 결과는 두고 봐야 하지만, 전쟁의 패자는 시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쟁점 법안의 운명은 여야 지도부 간의 협상에 달렸다. 각 당의 지도부가 정치적 셈법에 따라 찬성 또는 반대 당론(정당의 공식 입장)을 정하면 소속 의원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 헌법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한국 정당은 의원의 ‘자율투표’를 보장하지 않는다.

“미국 정당은 보통 원내대책회의에서 법안에 비협조적인 (상대 정당의) 의원을 파악한 뒤 그를 일대일로 마크(전담)해서 설득하잖아요. 우리는 그게 불가능한 구조예요. 당론으로 (해당 법안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예요.”(ㄷ 보좌관)

여론의 지지를 받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안(9월18일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의 통과가 불투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은 공수처 설치에 찬성하지만 자유한국당은 “당론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의석 299석 중 107석을 보유한 제1야당이 당론으로 반대하는 법안은 본회의 통과는커녕 상임위 심사에서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법안을 상임위 심사 없이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때도 여야 합의는 필수적이다.

‘입법 교착’ 상태에 빠진 쟁점 법안을 처리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거래’다. 여야는 지금껏 “서로 관심 있는 법안을 주고받기식으로 통과”(ㄷ 보좌관)시켜왔다. 2015년 5월에는 박근혜 정부가 원했던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야당이 추진하던 국회법 개정안을 연계해 통과시킨 전례가 있다. 당시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수정·변경을 요구하면 정부가 이를 따르도록 강제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 보좌진들도 “원칙적으로 (법안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야당 보좌진들은 문재인 정부 들어 이렇다 할 공익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문재인 정부와 여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18년차인 ㄹ 보좌관(국민의당·4급)의 지적이다. “(당·청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야 하는 법안에 대해 야당의 동의를 구하려면, 야당이 중점을 두는 분야와 관련한 카드를 내놔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다.” 정의당의 ㅁ 비서관(12년차·5급)도 “여당의 국회 전략이 없는 것 같다”고 공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주의 기운’ 받은 ‘공익 법안’ </font></font>

공익 법안의 탄생을 가로막는 독소조항도 있다. 현행법은 소수 정당에 극히 불리하다. 정의당은 모든 보좌관에게서 “공익 법안을 선도하는 정당”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상식이 된 친환경 무상급식, 주민소환제, 주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 1만원 등은 정의당과 그 전신인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제안들이다. “정의당이 선도적으로 법안을 내놓은 뒤 3~5년간 논의가 무르익으면 민주당이 그와 유사한 법안을 내서 성과를 챙긴다”고 ㄹ 보좌관은 말했다.

그러나 의석이 6석인 정의당은 단독으로 법안 제출조차 할 수 없다. ‘의원 10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안을 발의할 수 있다’고 규정한 국회법 때문이다. “정의당은 지렛대가 없어요. (우여곡절 끝에) 법안을 내면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올려야 하는데, 교섭단체(의원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정당)가 아니다보니 법안 심사를 받기도 쉽지 않아요. 늦게라도 우리 법안이 통과되면 일단 세상에 이로우니 다행이긴 하지만 우리가 정치적 성과를 못 가져가는 건 아쉬워요.” ㅁ 비서관의 말이다.

법안 통과는 때로 정당의 의지와 능력을 벗어나기도 한다. ㄷ 보좌관은 “냉소적으로 말하면 법안이 통과되느냐, 안 되느냐는 정부에 달려 있다”고 잘라 말했다. “법안이 발의되면 각 상임위의 전문위원들이 (입법 배경과 이해관계자의 입장 등을 정리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때 갓 입법고시를 통과한 20~30대 입법조사관들이 검토보고서를 써요. 그런데 이를 정부 사무관들이 가서 대신 써줍니다. 이렇게 한번 부정적인 검토보고서가 나오면 이를 되돌리는 데 (법안을 발의한 의원실에서)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합니다. 결국 정부가 요리를 다 하는 것이죠.” 시민이 원하지만 예산이 들거나 기존 관행을 깨는 법안, 정부 권력을 감시·견제하는 법안 처리를 정부가 막을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다. ㄴ 보좌관도 “그래서 정부, 공공기관, 이익단체가 전문위원에게 가서 ‘잘 봐달라’고 입법 로비를 한다”고 거들었다.

이런저런 난관을 뚫고 기적적으로 빛을 보는 공익 법안들도 있다. ‘우주의 기운을 받은’ 법안이다. “국회가 구성되는 4년마다 계속 발의하고 간절히 원했는데, 운 좋게 때를 잘 만난”(ㄱ 보좌관) 경우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2년 뒤 반쪽짜리이기는 하지만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 제정됐다. 2015년에는 공직사회의 부정·비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 속에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시민단체 등의 요구로 오래전부터 발의돼 있던 법안이 어떤 계기를 통해 공론화되면 갑자기 통과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지금은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등으로 청소년 처벌을 강화하는 소년법 개정안들이 막 올라오고 있어요. 이런 법안 논의는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습니다.”(ㄹ 보좌관)

문재인 정부에선 우주의 기운을 받은 법안이 얼마나 탄생할까.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청산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100대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 중 91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647건(법률 465건, 대통령령 등 하위 법령 182건)의 법령을 새로 만들거나 고쳐야 한다. ‘4년 안에 465건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보좌진들은 “헐” “어이구”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여소야대에 4당 체제라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만만치 않다”(ㄷ 보좌관)는 이유에서다. 사실상 양당 체제로 유지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견줘 다당제가 된 지금은 국회가 풀어야 할 고차함수가 더 복잡해졌다. 지난 9년간 여당이던 바른정당의 ㄴ 보좌관도 “국정과제는 (저 멀리 존재하는) 등대로 그쪽을 향해 가겠다는 거지 전부 다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했다.

물론 국정과제 중에는 정당들 간에 이미 공감대를 이룬 정책도 적지 않다. 대선 당시 민주당과 한 곳 이상의 야당이 내놓은 공통 공약은 62개, 5개 원내정당이 모두 발표한 공통 공약은 17개다. 그러나 “미묘한 각론 차이가 있다”거나 “정치적 이유”로 협상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완성도로 승부해야 </font></font>

핵심은 디테일이다. ㄱ 보좌관이 조언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재인 케어’ 모두 좋은 가치를 담고 있어요. 다만 이를 현실화하는 과정에 걸릴 부분, 빈구석이 너무 많이 보여요. 내용의 완성도를 높이면 야당이 세게 시비를 걸고 싶어도 문제 제기할 여지가 줄어들겠죠.” 법안을 튼실한 내용으로 채우는 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법안에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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