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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세는’ 민주주의 벗어나자

정부예산 시각화, ‘오픈 국회’ 프로젝트 등 정부 투명성 강화 위한 창의적 작업 하는 열린 플랫폼 ‘거브제로’ 설립자 치아량카오
등록 2016-04-07 17:55 수정 2020-05-03 04:28
기획연재


와글이  만난  '몽상가들'


① 스페인 시민참여 싱크탱크 ‘라보데모’ 설립자 - 야고 아바티
② 데이터 시각화 의사소통 도구 ‘폴리스’ 설립자 - 콜린 맥길
③ 캐나다 ‘오픈노스’ 설립자 - 제임스 매키니
④ 대만 ‘거브제로’ 설립자 - 치아량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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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와글’이 주최한 캠프에 참여한 대만 ‘거브제로’ 설립자 치아량카오. 와글 제공

지난해 12월 ‘와글’이 주최한 캠프에 참여한 대만 ‘거브제로’ 설립자 치아량카오. 와글 제공

2014년 3월18일, 대만 학생 시위대가 집권 국민당이 일방적으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 비준안을 통과시킨 데 항의하며 대만 입법원을 점거했다. 점거는 24일 동안 이어졌고, 결국 대만 입법원은 점거 시위대의 핵심 요구 사항이었던 양안 협력 감독 장치 선 법제화 뒤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에 대한 재심의를 약속했다.

3월31일에는 약 50만 명의 시민이 희망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들고 “서비스 협정 철회, 민주적 절차 수호” 등을 외치며 타이베이 총통부에 모여들었다. ‘해바라기 운동’이라고 불리는 대만 청년들의 직접행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픈소스(open-source), 직접행동(hands-on), 시민기반(public-spirited)이라는 세 가지 가치 지향을 지닌 대만의 오픈소스 커뮤니티 ‘거브제로’는 해바라기 운동에서 온라인 공간에서의 분노를 오프라인에서의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오픈소스 디지털 툴의 사용을 통해서다.

‘해바라기 운동’의 숨은 기여자

거브제로는 대만 청년들이 입법원을 점거한 뒤 매일 일어나는 일을 오픈소스 데이터 집적 플랫폼 핵폴더를 통해 공유했다. 매일 현장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도 핵폴더에 올라온 정보를 보고 그날그날의 상황을 알게 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루미오’나 ‘폴리스’ 같은 의사결정 플랫폼 역시 해바라기 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사용됐다.

거브제로는 2012년 만들어졌다. 이해하기 힘든 정부예산 시각화 작업, 의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시민에게 공지하는 ‘오픈 국회’ 프로젝트, 국회의원들의 연설, 청문회 등의 영상을 실시간 제공하는 ‘의회극장’(Congress Cinema) 등 선출 권력이 하는 공무 정보에 대한 시민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게 다양하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실험하고 있다. 20년 경력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거브제로 창립자인 치아량카오를 ‘와글’이 만나, 그들이 하는 일, 그들의 지향점에 대해 들었다.

거브제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2012년 시작된 커뮤니티다. 당시 정부가 만든 40초짜리 경제부흥책과 관련한 광고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 광고는 어떤 정보도 없이 단조로운 ‘후렴’을 반복했다. “여러분, 경제는 정말 복잡해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여러분이 알 필요는 없어요. 그저 정부를 따라오기만 해요.” 이 광고는 유튜브를 통해 엄청나게 번졌다. 대만 시민들은 시민을 바보로 여기며 정부가 가진 데이터나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정부의 나태한 태도에 분노했다.

나와 몇몇 개발자가 모여 거브제로(www.g0v.tw)라는 오픈소스 온라인 플랫폼을 열었다. 정부(government)라는 영어 단어에서 알파벳 오(O)를 숫자 0으로 바꿨다.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정부의 원형을 만들어서 협업과 숙의의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보자는 뜻이다. 정부의 모든 자료를 공개하는 ‘대안정부 홈페이지’로서의 성격이 거브제로에 있다.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2012년 12월 거브제로가 첫 공식 행사로 ‘해커톤’을 열었다. 해커톤은 소프트웨어 개발을 뜻하는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이 자리에는 개발자든, 해커든, 학생이든, 교수든 누구나 와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백 명이 참가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두 달에 한 번씩 해커톤을 연다. 평균 120명 정도 참가하고, 매 해커톤에서 제안된 10여 개의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장기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오픈 국회’다. 국회가 생산하는 문서는 굉장히 많다. 각종 청문회 자료, 입법 일정, 제출된 법안, 제·개정된 법안 등 많은 문서가 다양한 형태로 국회 홈페이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이 자료를 한곳에 모아 보기 쉽고 가공하기 쉽도록 하는 일이다. 국회에서 일어나는 실시간 토론 등을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의회극장’ 같은 프로젝트도 해커톤에서 제안돼 진행했다.

최근에는 정치기부금 공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만에서는 정치기부금 내역이 비공개에 가깝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자신의 온라인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자신이 받은 정치기부금이 얼마인지 대략의 액수만 공개한다.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확인하려면 관공서에 가서 자신의 신분증을 제시한 뒤 자료를 신청해야 한다.

거브제로의 몇몇 엔지니어가 ‘이 자료를 공공 일반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 때 투표하기 전에, 내가 선택해야 할 후보자가 누구로부터 얼마를 받았는지 아는 건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다. 그가 어떤 기업으로부터 후원받아 그 기업의 이익에 복무할 수도 있고, 특정 이익단체로부터 후원받아 그들의 이익을 위해 법안을 제출할 수도 있다. 이것을 감시하고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햇빛 프로젝트’(Sunshine Project)라고 불리는 이 프로젝트가 제안되자 엄청난 참여가 일어났다. 곳곳의 사람들이 직접 관공서에 가서 정치자금 기부 내역을 받아 스캔 등을 통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대만 전역에서 9천 명의 사람들이 이 문서에 보이는 숫자를 타이핑해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림을 숫자로 바꾸면 자료를 가공할 수 있다. 통계를 낼 수 있다. 누가, 어디에, 얼마큼 기부했는지 유의미한 결과를 판별할 수 있다.

대만 거브제로 사이트의 ‘정부예산 시각화’ 작업. 500쪽짜리 PDF 자료를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인터랙티브 원그래프를 통해 시각화했다. 거브제로 홈페이지 갈무리

대만 거브제로 사이트의 ‘정부예산 시각화’ 작업. 500쪽짜리 PDF 자료를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인터랙티브 원그래프를 통해 시각화했다. 거브제로 홈페이지 갈무리

두 달마다 열리는 ‘해커톤’에서 제안 샘솟아 오픈소스란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

오픈소스는 요즘 소프트웨어 산업계에서 작업하는 표준화된 방법이다. 레스토랑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이다. 일차원적 관점에서 보면, 혹은 식당의 관점에서 보면 공개가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오픈소스는 시야와 가능성을 확장한다. 누구나 ‘최신의 기술’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동일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다.

아랍의 봄, 그리고 미국 월가 점령 사태 이후 전세계 시민들이 똑같은 문제에 당면해 있다. 이제 거리에서 수백만 명이 모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면 가능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수백만 명이 한 가지 의사결정을 평등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나리오에 기반해 서로 다른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경우 오픈소스를 통해 선행 결과와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면,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문제 해결 역시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를 ‘디지털민주주의’가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당신에게 정치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만 교과서는 정치를 ‘공공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한국에서도 그렇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설명하면 타인이나 사회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더 ‘정치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나는 정치를 자원 배분 문제라고 본다. 사람들의 돈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이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뭘까.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역사는 매우 짧다. 한국도, 대만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투표권을 한 사람이 한 표씩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일부일 뿐이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일, 정책을 결정하는 일 등이 다 민주주의에 포함된다. 이것을 하려면 단순히 표 세는 민주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의사결정을 할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 소수자의 의견까지 배려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술을 사용한다면 이런 민주주의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노하면 참여한다 ‘시빅테크’(시민을 위한 기술)가 아시아 지역 전반으로 퍼져나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아시아 차원의 글로벌 민주주의를 위한 협력이 가능할까.

대만 사회에서만 보자면, 다양한 ‘시민을 위한 기술’이 사회 전반으로 번져나가는 데 ‘분노’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앞서 말한 정부의 ‘너희는 몰라도 돼’ 같은 어처구니없는 태도의 정책광고가 개발자를 비롯한 학생,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움직이게 했다. 기술은 온라인상의 분노를 오프라인으로 옮겨오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게 아시아 차원으로 확대되려면 다양한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아시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상당히 분절적이다. 일단 언어의 격차가 크다. 서로 다른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 지역 전체를 관통하는 ‘시민을 위한 기술’은 조금 더 간문화적(cross-cultural)이어야 할 것 같다. 각자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거브제로는 대만의 이야기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부터 시작하고 있다.

인터뷰 와글 서정규 jk.suh@wagl.net
번역·정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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