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청년과 광장 사이엔 국가뿐

세월호 집회에서 태극기 불태운 청년은 10년 전 <한겨레21>이 호명한 ‘태극기 세대’… 청년은 어째서 공권력에 대한 분노를 국가 상징을 불태우는 것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나
등록 2015-06-12 00:45 수정 2020-05-03 04:28
은 온라인 매체 와 콘텐츠를 제휴하고 있습니다. 는 4월20일 태극기를 태운 청년을 만나 단독 인터뷰했습니다. 이 글은 콘텐츠를 재료로 삼고, 청년을 직접 만나거나 목격한 사람들을 이 추가로 취재해서 쓴 글입니다. 청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청년은 “기자들이 더 이상 나에게 총칼을 겨누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거절했습니다. 편집자
2002년 월드컵 때 탄생한 ‘태극기 세대’에게 태극기의 변형은 익숙하다. 이들에게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인 동시에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지난 4월18일 한 20대 청년이 세월호 추모 집회에서 태극기를 불태웠다. 이 청년은 태극기 세대의 일원이다. 박승화 기자, 한겨레

2002년 월드컵 때 탄생한 ‘태극기 세대’에게 태극기의 변형은 익숙하다. 이들에게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인 동시에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지난 4월18일 한 20대 청년이 세월호 추모 집회에서 태극기를 불태웠다. 이 청년은 태극기 세대의 일원이다. 박승화 기자, 한겨레

“관심종자?”

동생에게 “4월18일 세월호 참사 추모 집회에서 태극기를 불태운 청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20대 초반 남성. 동생은 청년과 같은 성별이고 20대 후반이다. 비교적 또래인 셈이다. 질문을 듣자마자 네 글자가 툭, 튀어나왔다.

태극기는 수단? 관심이 목적?

‘관심종자’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끄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을 가리킨다. 주로 온라인 공간에서 쓰이는데, 줄여서 ‘관종’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필요로 한다. ‘관종’은 비꼬는 말이다. 오직 관심끌기만을 목표로,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사회적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벌이는 이들을 겨냥한다.

동생은 청년이 세월호 집회보다 관심끌기가 우선인 부류의 인간일 거라고 추정했다. 이때 태극기는 수단이다. 대한민국 모독? 자기한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게 최우선인 사람한테는 세월호 집회나 대한민국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관심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관종’이라는 거다.

청년은 정말 관심종자일까? 인터뷰를 보자(동생은 이 인터뷰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답했다).

-자기소개
“20대 대한민국 남자다.”
-왜 태극기를 태웠나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경찰이 공권력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조차 막고, 최루가스, 마구잡이 연행…. 화가 났다. (중략) 경찰 연행 대기조가 세월호 집회 참석자들을 향해서 접근해오고 있었고, 물대포로 세월호 집회 참석자들을 쏘고 있었다. 그 상황 직후에 우연히 종이 태극기를 현장에서 주웠고,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해서 태웠다.

온라인 매체 <슬로우뉴스>가 지난 4월20일 오후 청년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모습. <슬로우뉴스> 제공

온라인 매체 <슬로우뉴스>가 지난 4월20일 오후 청년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모습. <슬로우뉴스> 제공

인터뷰를 보면 청년은 관심끌기가 목적이 아니었다. 청년은 심신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울분을 덜어낼 창구가 필요했고, 눈앞의 공권력에 던질 메시지가 있었다.

동생의 추정은 틀렸지만, 동생과 청년의 교집합을 하나 더 발견했다. 청년과 동생은 태극기를 대한민국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물론 태극기가 대한민국을 상징한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 상징물을 자기 의사 표현의 수단이자 매개로 인식하는 거다. 그것도 무척 자연스럽고 익숙한 방식으로. 청소년기부터 태극기로 만든 열쇠고리, 스티커, 셔츠 등을 봐온 내게도 익숙하다. 우리에겐 태극기의 ‘문화적·미학적 변형’이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전 ‘태극기 세대’를 기억하시나요

“한 세대가 태극기 휘날리며 몰려오고 있다.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 속에서 자란 1980년 이후생들. 이들의 청(소)년 시절은 대한민국의 영광과 함께 시작됐다. 태극기는 이들의 자랑스러운 깃발이다.” 딱 10년 전인 2005년 3월, 제553호 표지이야기 ‘태극기 세대가 몰려온다’의 첫 부분이다. 태극기 세대는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에서 태어났다. 이 세대에게 태극기는 격조할 대상이 아니다.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

태극기를 불태운 청년도 이 세대의 일원이다. 물론 세대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특수성이 있다. 하지만 세대는 청년과 이번 사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맥락으로 유효하다.

대한민국의 다른 일부는 다른 생각을 한다. 동생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을 50대 대한민국 여성인 어머니께 던졌다. “어떻게 태극기를 태울 수 있어?” 곧바로 본인이 화를 입은 듯 분개하신다. 청년은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태극기를 태웠는데, 대한민국의 다른 일부는 태극기가 타는 모습을 보고 울화가 치민다.

가장 크게 분노한 건 다. 는 4월20일치 1면에 ‘태극기 불태운 시위대’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청년이 태극기를 태우는 장면을 실었다. 사진은 조악하다.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 없어서, 다른 종합편성채널이 통신사 사진을 방송한 화면을 캡처했다. 기사도 완성도가 떨어진다. ‘누가-언제-어디에서-무엇을-어떻게’라는 팩트는 빈약하게나마 있지만, ‘왜’가 없다. 심지어 ‘왜’는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읽힌다. ‘태극기를 불태웠으므로 대한민국을 모욕한 것이며, 대한민국을 모욕하려고 태극기를 불태웠다’는 기묘한 도돌이표가 등장한다.

언론에 이어 여당이 엄정 처벌을 요구하고 나선다.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국민을 불태운 것이나 똑같은 것”(김진태 새누리당 의원), “자기 나라의 태극기를 불태운다는 것은 살아 있는 부모를 불태우는 것과 똑같다”(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 법무장관이 호응하고, 검찰총장이 화답한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4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태극기를 태우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김진태 검찰총장도 4월21일 대검 주례간부회의에서 엄정 대처를 주문했다.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들도 각종 논평을 내고 검찰에 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 경찰은 청년의 신원을 파악 중이라고 발표했다.

배후에 반국가 세력 있다?
<조선일보> 4월20일치 1면 기사와 2005년 발간된 <한겨레21> 제553호 표지.

<조선일보> 4월20일치 1면 기사와 2005년 발간된 <한겨레21> 제553호 표지.

이 모든 게 청년이 태극기를 태운 지 사흘 안에 벌어진 일이다. 집권 세력을 비롯한 보수 집단의 대응은 기민했다. 태극기 소각은 이들에 의해 세월호 추모 집회의 폭력성, 반정부성을 드러내는 가장 ‘핫’한 스캔들로 활용된다. ‘성완종 리스트’보다 중요한 국가 기강의 문제로 활용된다.

“평범하다.” 청년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 청년의 지인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왜 평범하다고 판단했는지 물었다. “(4월20일 오후에) 청년을 만났을 때 무척 불안해 보였다. 언론이 자신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정치인, 장관, 경찰이 목소리를 높이는 데 불안해하지 않으면 그게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거지. 운동권 대학생이나 명문대생일 거라는 일각의 편견과도 맞지 않았다.”( 민노씨)

일부 보수 언론은 청년의 ‘배후’에 반국가 세력이 있을 거라고 추정했다. “세월호 추모를 명분으로 삼아,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 세력이 대중 선동을 목적으로, 태극기를 불태우는 일종의 ‘쇼’를 기획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년이 속한 단체, 정당을 찾으려 했다. 없었다. 청년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청년실업률이 치솟는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학력·학벌이란 ‘스펙’도 없이 안정적인 밥벌이를 찾아야 했다. 경찰은 ‘주거 불분명’이라고 표현했지만, 청년에겐 집이 있었다. 주거비를 나눠서 낼 다른 청년들과 함께 살아서 ‘청년만의 집’이 아니었을 뿐이다. 취업 교육을 서울시청 근처에서 받았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세월호 농성장을 알고 있었다. 세월호 집회에 어쩌다 한두 번 개인으로 참여했다. 4월18일도 그랬다.

태극기 세대의 특성이다. 청년은 국가를 거리의 정치로 직접 대면한다. 청년과 광장을 매개하는 건 국가뿐이다. 중간 지대의 공동체는 없다. 10년 전 은 태극기 세대를 가리켜 “개인과 국가 사이에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라고 진단했다. 여전하다.

청년은 인터뷰에서 경남 밀양을 언급했다. “경찰이 공권력을 남용하는 상황을 그동안에도 많이 봐왔다.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상황이 많았다. 특히 세월호 이후에 그런 모습을 많이 봐왔다. 관련해서 밀양과 같은 사회문제들에서 공권력을 남용하는 상황을 봐왔다.” 밀양과 세월호를 잇는 키워드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이다. 청년의 대한민국은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한다. 그런데 청년이 목격한 공권력은 물대포를 뿌리고 캡사이신을 쏘고 시민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청년은 어째서 공권력에 대한 분노를 태극기라는 국가 상징을 불태우는 것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나. 청년이 태운 태극기는 청년의 것이 아니다. 다른 시위 참가자가 A4용지에 인쇄해왔다가 경찰차에 붙인 것이다. 태극기는 청년이 집었을 때 물대포에 맞았는지 젖어 있었다. 현장에서 청년을 목격한 사람들은 청년이 태극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러니까 아직 태극기에 불이 붙지 않았을 때, 이미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7명 이상 청년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전했다.

청년은 인터뷰에서 굉장히 큰 카메라를 든 사람이 자신을 향해 “그렇게 붙이면 안 붙죠. 라이터 뒤를 누르고 있어야 붙죠”라고 말했다고 했다. 태극기가 물에 젖어 불을 붙이는 데는 5~10분이 걸렸다. 최용근(가명)씨는 청년과 10~20m가량 떨어져 있다가, 태극기에 불이 붙은 걸 보고 달려가 태극기를 바닥에 떨어뜨려 자신의 생수통에 든 물로 불을 껐다고 했다. 용근씨는 “기자들이 많아서 청년의 의도가 무엇이든 나중에 분명 악용될 거란 생각에 청년을 보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청년이 태극기에 불을 붙이려 할 때 그의 옆에 기자들이 아닌, 다른 동료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청년이 국가와 맺는 양자 관계를 완충해줄 공동체가 있었더라면.

현행법상 태극기를 태우는 행위가 범죄로 성립하려면, 태극기를 태울 때 “대한민국을 모욕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형법 제105조). 청년에겐 그런 목적이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해서 벌인 일이다. 태극기 세대로 자란 청춘이 맞닥뜨린 세월호 참사는 태극기에 분노를 표출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청년에게 진정한 애국이란 태극기 휘날리며 세월호 유족들을 모독하고 짓밟는 게 아니라, 그같이 애국을 참칭하는 태극기 모독자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일이었다.

-어떤 의도였나.
“국가나 국기를 모욕할 거창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 태극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고 본다. 순국선열들이 죽음으로 지킨 가치, 상징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특히 4월16일부터 제대로인 게 없었다고 생각했다. 극소수 권력자들이 공권력을 남용하고…. 내 취지는 그렇게 공권력을 남용하는 일부 권력자들은 순국선열이 피로써 지킨 태극기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청년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경찰은 5월29일 청년을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까지 신청했으나, 법원은 기각했다. 법원은 기각 이유로 “피의자가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우발적·충동적으로 국기 소훼 행위에 이른 것으로 보이고 계획적 또는 조직적으로 범행을 했다는 소명은 부족한 점, 자신의 경솔한 행동과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점, 범죄 전력이나 수사받은 경력이 없는 점”을 들었다.

청년의 변호를 맡은 정민영 변호사는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었는지는 당사자의 머릿속에 있는 문제라 법원에서는 주변 정황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청년이 미리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목적이 없었다고 법원에서도 판단한 것 같다. 1992년 법무부에서 국기모독죄의 적용 범위를 ‘공용의 국기’로 제한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에 청년이 태운 건 종이에 인쇄된 태극기라 쟁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9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국기모독죄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삭제 의견을 내기도 했다.

태극기 소각 사건을 시민사회 공론장에서 품지 못하고 법의 영역에 넘겨버린 일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다. 청춘이 공권력에 의해 불타서 시들어버리는 일은 이제 더는 없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태극기 상식 하나, 대한민국국기법에서는 태극기를 더 쓸 수 없을 경우 지체 없이 소각해 폐기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태울 땐 태워야 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