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은행이 6월4일 출범 100일을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이자놀이를 하지도 않으며, 돈을 갖고 있으려 하지도 않고, 문턱은 없지만 아무한테나 돈을 빌려줄 수는 없는 은행. 죗값으로 받은 벌금을 형편이 어려워 미처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치소(노역장)에 갇히는, 해마다 줄잡아 4만 명에 이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 은행이되 문전성시를 꿈꾸기는커녕 하루빨리 폐업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은행. 법 앞에서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하지 못하는 현행 벌금제의 모순을 혁파하고자 지난 2월25일 문을 연 장발장은행이 백일잔치 겸 입법 청원 행사를 열었다.
이날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해 정의화 국회의장,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 등 여야 국회의원 3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카메라 기자들 수십 명의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분위기만으로는 이달 안에 제도 개선이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장발장은행을 만들고 운영하는 이들도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특히 일일 장발장은행장으로서 입법 청원을 위해 국회를 처음 방문한 염수정 추기경이 앞장서면서 제도 개혁에 더욱 힘이 실렸다.
단상에 오른 염 추기경이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 전한 말은 큰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내가 은행장이 되어보기는 처음이다. 누구나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에 살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다. 사랑 없이 정의만 강조한다면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갈등과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100만원, 200만원 벌금을 못 내서 교도소에 가게 된 이들이 장발장은행을 찾아온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들의 사연은 어느 하나 절절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고 사연도 제각각이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따뜻한 동행을 하는 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발장은행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장발장은행의 운명을 더욱 간명하게 설명했다. “벌금제 개혁이 잘 이뤄지고 국가가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하게 된다면 장발장은행이 곧 문을 닫게 될 거다. 문을 닫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 벌금 미납이 곧 교도소 수감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바로잡는다면 장발장은행은 행복하게 폐업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장발장은행의 실무를 맡은 인권연대에서는 오로지 시민 후원으로 대출금을 마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단체에서는 시민 후원금 가운데 단 1원도 운영비로 쓰지 않는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100일간 155명에게 자유 선물100일 동안 장발장은행이 보여준 성과는 뜻있는 시민들이 매일같이 길어올린 함지박 물을 먹고 자란 ‘양심의 꽃’이다. 그동안 981명의 개인·기관·단체에서 모두 3억2천여만원의 성금을 보내주었다. 이 종잣돈으로 9차례 대출 심사를 거쳐 2억8600여만원이 대출됐고 155명이 자유를 얻었다. 6월1일 열린 9차 대출심사위원회에서는 이미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에게도 벌금 미납분을 빌려줬다. 벌금 미납분이 있으면 가석방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더 오래 구금돼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벌금제 개혁은 현행 형법을 개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이 대표발의할 예정인 개정안에는 3가지 내용이 담겼다. 먼저 형법 제62조 1항 집행유예의 요건에 벌금을 추가하는 것이다. 현행법은 3년 이하의 징역·금고형을 선고할 경우에만 1년 이상, 5년 이하의 기간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벌금보다 무거운 형벌인 자유형(징역·금고)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인정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벌인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평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둘째로는 벌금 납입 기한을 연장하거나 분할 납입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다. 현행법은 판결 확정 뒤 30일 안에 벌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개정안은 피고인의 경제적 능력 등을 고려해 벌금을 한번에 내기 어려운 경우에는 납입 기한을 더 늘려주거나 나눠 낼 수도 있도록 했다. 벌금 납입 기한의 연장이나 분할 납부가 가능하고, 이조차 어려운 때에는 벌금형을 사회봉사로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법원과 검찰이 피고인에게 의무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조항도 담았다. 제도를 몰라서 피해를 보는 이가 없도록 국가에 고지 의무를 강제하는 방안이다.
현행 총액벌금제를 일수벌금제로 바꾸는 것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총액벌금제는 피고인의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벌금 총액을 정하는 제도다. 이에 견줘 일수벌금제는 벌금형을 선고할 때 금액이 아닌 일수(日數), 곧 며칠인지를 정한다. 이후 피고인의 소득과 재산 등을 두루 따져서 하루치에 해당하는 벌금액을 산정한 뒤 일수를 곱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부유한 사람에게는 벌금을 더 매기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덜 매김으로써 형벌의 실질적 평등을 담보하는 제도다. 이미 프랑스·독일·스웨덴 등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특히 극빈층에 가까운 이들이 벌금 때문에 삶 자체가 파괴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으려면 일수벌금제의 도입이 절실하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준 의원이 지난해 5월 대표발의한 형법 개정안에는 일수벌금제가 이미 포함돼 있다.
최소한의 자존감을 가르쳐주는 법 개정홍세화 장발장은행장(격월간 인문잡지 발행인)은 “장발장은행이 100일 동안 155명에게 자유를 찾아주었지만 국회의원들은 1만 명, 2만 명은 물론 항구적으로 이런 고통이 없어질 수 있도록 근원적인 대책을 만들 힘과 권능을 갖고 있다. 부디 벌금제 개혁 입법을 통해, 가난한 시민들이 더 많은 고통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김희수 변호사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사람이 처벌받아야 된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자존감이라도 가르쳐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사람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대다. 말할 자유, 드러내지 않을 자유, 모일 자유,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을 자유, 나아가 제대로 질병을 치료받을 자유…. 위협받는 이 시대 자유의 최전방 철책에 ‘장발장’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장발장은행의 모토는 자유다.
우리곁의 장발장
장발장 은행 대출 및 후원 방법
장발장은행의 대출 지원액은 최대 300만원까지이며, 은행 누리집에서 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뒤 필요한 서류를 갖춰 보내면 됩니다.
대출 문의 02-2273-9004
후원 문의 02-749-9004
장발장은행 계좌 하나은행 388-910009-34004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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