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소속 기장이 3cm가량의 수염을 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 가까이 비행에서 배제돼 논란이 일고 있다.
상황설명서 “이미지 실추 않도록 잘 관리하겠다…”이 입수한 자료를 종합해보면, ㅇ기장은 2014년 9월12일 오후 김포공항 화장실에서 안전운항담당 임원과 마주친다. 당시 기장 턱에 자리잡은 3cm가량의 수염에 대한 임원의 지적이 있었다. 장기 휴가를 낸 김에 자연스럽게 기른 수염이었다. 수염을 기른 외국인 기장들을 본 적이 있었기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시아나항공 ‘임직원 근무복장 및 용모 규정’엔 “수염을 길러서는 안 된다. 다만 관습상 콧수염이 일반화된 외국인의 경우에는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허용한다”고 돼 있다. 외국인 조종사에겐 수염이 허용되지만, 한국인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임원과 마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염을 깎으라는 지시였다. 사규를 확인한 기장은, 내·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규정이라며 수염을 밀고 비행을 하라는 팀장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팀장은 지시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이날 예정된 비행 스케줄을 다른 기장이 맡도록 조처했다. 그날 이후 10월6일까지 비행정지가 계속된다. 면담, 지상 근무와 훈련을 거쳐 다시 조종석에 앉은 건 10월17일이었다.
기장은 왜 굳이 면도를 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일까. 회사 쪽에 낸 상황설명서를 보면, 외국인과의 차별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따로 붙인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나는 수염을 제한하는 건 과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회사가 지킬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있었다.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수염을 잘 관리하겠다는 약속이 덧붙여졌다.
인사위원회를 거쳐 비행정지가 진행된 것은 아니다. 담당 팀장이 사규를 어겼다며 근무에 투입하지 않았다. 비행정지가 하루하루 늘어나면서, 기장은 9월 말 수염을 제 손으로 밀고 빨리 업무에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회사에 전했다. 그로부터 열흘 정도 지나서야 업무 복귀가 이루어진다. 기장은 ‘용모 규정 위반 및 지시 불이행’을 이유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돼 있다. 추가적인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일정 비행시간을 채워야 받을 수 있는 수당도 받지 못했다.
“용모를 이유로 비행을 못한단 얘긴 처음”용모 규정을 이유로 기장이 비행정지 처분을 받은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또 다른 민간 항공사 기장은 “수염이 유독 빨리 자라는 사람이 있다보니, 길러진 상태로 비행하는 경우도 있다”며 “대개 사고가 난 경우, 비행을 시키지 않는다. 용모를 이유로 비행을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노조는 2014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염을 금지한 ‘임직원 근무복장 및 용모 규정’ 조항이 남성 직원들의 행복추구권 등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한다며 진정을 냈다. 또 다른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는 “회사에서 백인뿐 아니라 일본인·중국인 기장도 수염을 기르고 있다”며 “사규상 조종사는 승객과 대면하지 말도록 돼 있어 엄격한 용모 규정의 필요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12월4일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 관련해 사기업은 조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각하, 헌법 제11조 평등권 관련해서는 해당 규정이 내국인에 비해 외국인을 불합리하게 우대하는 규정이라기보다는 상대적 소수인 외국인에 대한 차이를 인정한 규정으로 보인다”고 답변했다. 항공업계는 경쟁력 강화와 기업 이미지를 이유로, 복장 및 용모 규정이 엄격하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줄곧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다. 2013년 인권위는 아시아나항공에 “여성 승무원 복장을 치마로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바지를 선택해 착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지난 12월9일 ㅇ기장은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일방적으로 비행정지라는 인사 처분을 통보하고, 임금상 불이익을 준 것은 인사권 남용”이라며 구제신청을 냈다.
“외국인에게 허용, 수염과 조종사 업무는 무관”노조 관계자는 “수염을 금지하는 사규를 직원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인사규정 절차를 통해 시정을 요구하거나 징계 처분을 한 것이 아니라 수염을 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관리자가 비행중지를 결정하고 급여까지 지급하지 않은 사안”이라며 “직원들의 인권을 짓밟는 처사”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강민주 노무사는 “근본적으로, 외국인 기장에게 수염을 허용한다는 건 수염과 조종사 업무의 무관함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러한 사규는 신체를 과도하게 구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아시아나항공은 “조종사 개인에게 사정이 있어도 비행 스케줄 조정이 가능하다”며 “사규를 위반한 조종사를 비행에서 제외한 건 부당하지 않다. 유니폼을 안 입은 조종사를 비행에 투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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