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더 이상 스스로를 치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공안 정국이 위풍당당하게 빼어든 증오의 칼날 앞에서 그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고 있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바꿀 ‘민주적 역동성’은 이제 이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것인가, 2015년을 열며 이 지식인에게 차례로 묻습니다. 고통과 치욕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 이 사회를 치열하게 진단해온 역사학자 김기협이 첫 번째 답을 보내왔습니다. _편집자
나이 60대로 접어들며 조그만 ‘병’ 두 가지를 달고 살게 됐다. 당뇨와 목 디스크다. 증세를 깨닫고 처음에는 ‘어떻게 고치나?’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서 더불어 살 생각으로 돌아섰다. 그러는 동안 ‘건강’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이란 것을 ‘병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 생각으로는 너무 절대적인 관념이었던 것 같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완벽한 건강 상태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 속의 어느 개체도 따져보면 무슨 문제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 아닌가. 각자가 자기 문제를 짊어지고도 자기 역할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상대적 기준으로 건강을 생각하게 됐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완벽한 건강 상태란내 몸의 건강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사회의 건강에 대한 생각도 다시 짚어보게 됐다. 새삼스러운 생각도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사회의 질병을 걱정하고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기도 하다. 정말 큰 의사는 천하의 질병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한 옛날 어느 명의(名醫)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사실이 2014년을 지내는 동안 분명해졌다.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가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이 넘쳐나고 있다. 걱정이 크고 깊은데도, 치유를 위한 노력은 혼란스럽다. 집권세력은 ‘종북’ 척결로 ‘100% 대한민국’을 만들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병을 도지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선무당 사람 잡는 짓을 말려야겠는데, 똑같이 목청만 높여서는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없다. 목청 큰 놈 이기는 줄만 알고 더 목청을 높일 테니 사회가 더 어지러워지기만 하겠다. 치료에 나서기 전에 진단을 확실히 하고 자신 있는 처방을 내놓아야 무당에게 홀려 있는 구경꾼을 돌려세울 수 있다.
의사의 진단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병력(病歷)이다. 나타난 증세만 살펴서는 관찰이나 판단이 어려운 문제를 병력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사회의 질병은 개체의 질병보다 복합적인 현상이므로 그 진단에서 병력의 비중이 더욱 크다. 어느 사회에서나 역사의 탐구가 중요한 활동인 이유가 여기 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제국주의 사관을 강요하고 대한민국 독재정권이 현대사 연구와 교육을 가로막은 이유도 그렇다. 이 사회의 문제점과 과제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식민통치와 독재정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한국 사회는 의사 얼굴도 못 보는 환자 신세였다. 1987년의 민주화로 그 신세에서 겨우 벗어나게 되었고, 그 뒤 현대사 연구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 사회의 병력이 많이 밝혀지게 됐다. 병력을 모를 때는 ‘가난’ 하나만을 문제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빈곤 문제도 하나의 큰 병에서 파생된 여러 증세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제적 부(富) 외의 다른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단의 혼란을 아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가 집권세력의 선무당질을 도와주는 뉴라이트 역사관이다. 경제적 부에만 가치를 두고 ‘자본주의 문명’만을 유일한 문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독재정치는 물론 식민통치까지도 ‘근대화’의 기준으로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역사관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는 정책 노선을 뒷받침하려는 정략적 의도가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살 만한 확실한 진단이 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진단과 처방이 보인다면 어설픈 푸닥거리에 사람들이 꼬일 리가 없다.
개항기 이래 고장 상태의 면역체계나는 조선 망국 100주년을 맞으며 망국의 의미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충분히 새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안타까움을 느끼고 를 썼다. 그 뒤에는 1945년의 해방을 맞고도 민족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를 썼다. 그리고 금년에는 냉전 종식 뒤에도 민족 문제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며 를 썼다. 그 일련의 작업을 통해 얻은 판단은 우리 민족사회가 개항기에 걸린 큰 병에서 지금까지도 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5년간의 작업을 통해 내가 진단한 질병에 이름을 붙이라면 ‘근대병’(近代病)이라 하겠다. 1860~70년대 개항기에 서양 근대 문명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처음에는 감기 증상처럼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0~90년대에 걸쳐 밖에서는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가 무너지고 안에서는 전통 질서가 해체되면서 열병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20세기 내내 여러 가지 증세를 보이며 이 사회를 휘어잡고 있었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병의 기본 증세는 면역력 결핍이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물질을 흡수한다. 흡수하는 물질 중에는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것도 있다. 그 위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내는 능력이 면역력이다. 한 사회가 외부의 영향을 받을 때 그 내재적 기본 질서를 지켜 구성원들이 큰 위협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능력을 면역력에 비유할 수 있다.
면역력 중에는 모든 생명체가 타고나는 자연면역력(innate immunity)도 있지만 복잡한 환경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적응면역력(adaptive immunity)이다. 근 1천 년간 한민족은 주로 중국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적응면역력을 키워왔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닥친 근대 문명의 충격은 종래의 경험 범위를 벗어나는 너무나 이질적이고도 강한 것이었다. 이 충격 앞에서 면역체계 자체가 큰 손상을 입었다.
면역력 부족으로 인한 가장 일반적인 증상은 가치관의 혼란이다. 가치체계는 사회질서의 뼈대다. 개항기 이후 이 가치체계가 해체되는 한편 근대 문명의 가치체계가 제대로 이식되지도 못했다. 근대적 가치관이 일부 들어왔지만 안정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집권세력이 민주제도 교묘하게 이용가치관의 혼란을 제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엘리트 계층의 향배다. 어느 사회에나 힘을 많이 가지는 엘리트 계층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계층은 사회질서의 방어에 앞장서는 것이 정상이다. 기존 질서의 수호가 계층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일본 식민통치 세력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기존 질서를 등지고 사익(私益)만을 추구하는 친일파를 육성했다. 남한에서는 해방과 건국을 거치면서도 친일파의 자세를 이어받은 집단이 사회의 주도권을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다. 이 집단은 지금도 외부 세력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평화를 등질 정도로 극심한 외세 의존성을 보이고 있다.
2014년이 많은 국민을 절망감에 빠트린 것은 면역력 결핍의 확인 때문이다. 4월에 겪은 참극 앞에서 뭔가 크게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각계각층의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그런데 사회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인 국가는 연말을 앞둔 헌법재판소의 추태를 통해 이 사회의 회복을 위한 아무런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1910년에 잃어버렸던 국가를 이 사회는 아직까지도 온전하게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 엘리트집단(힘만 갖고 도덕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은 사회 내에서의 상대적 우위에 도취해서 사회의 문제점과 과제를 외면한다. 친일파의 속성 그대로다. 1987년까지는 독재권력의 그늘에 숨어 있던 그들이 지난 30년 동안 국가기능을 장악하고 언론의 힘까지도 대부분을 수중에 넣으며 문민독재 체제를 구축해왔다.
식민통치 아래서는 민족독립에, 군사독재 아래서는 민주화에 희망을 걸어왔던 이 사회가 지금 상황에서는 어디 희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민주화가 미흡한 데 문제가 있다며 더욱 철저한 민주화만을 다짐하기에는 집권세력의 민주제도 이용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다.
지금 이 사회의 문제의 뿌리가 150년 전 개항기부터 뻗어 내려온 것이라고 본다면 그동안 떠올려온 ‘처방’이 타당한 것이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 천황 아닌 한국인 대통령이 권력을 맡는 ‘민족해방’이 충분한 해결책이었는가? 1인1표의 다수결로 권력의 소재를 결정하는 ‘민주화’가 만족스러운 길이었는가?
민족독립도 민주화도 필요한 처방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처방은 못 되었다. 당장의 증상을 다스리기 위한 대증(對症)요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근대병’의 근본적 치료 없이는 목전의 증상이 가라앉아도 같은 병에서 파생되는 다른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면역력 회복을 통한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는 가치관의 전면적 재점검이 필요하다. 집권세력의 경제지상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나 인권처럼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치들 중에도 지나친 절대화로 인해 가치체계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 계몽주의에서 유래하는 ‘근대적 가치’에는 모두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본다.
인간사회 조직 원리를 전면 재편할 과제가이런 반성의 기준으로 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우선 생각한다. 자연의 속박을 부정하는 것이 근대 문명의 한 가지 특징이다. 그래서 ‘천부인권’을 말할 때 만물의 영장,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오만은 인류 발생 이래 특이한 현상이었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숱한 선현들의 노력으로도 어쩌지 못했던 문제를 이제 와서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벅찬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근대병’을 우리만 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증세에는 차이가 있어도 모든 인류사회가 이 병을 앓아왔다. 이 병에 대한 인식이 이제 충분히 확산돼 여러 사회의 노력이 합쳐질 수 있는 단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인류 차원에서 근대병의 대표적 증세는 자연과의 조화를 거부하는 오만이었다. 그런 오만한 이념을 가진 사회는 길게 못 가고 망해버리게 마련이다. 근대 문명이 300년이나 지속된 것은 획기적인 기술 발전 덕분이었다. 이제 그 약효가 다 떨어져 환경과 자원 문제가 코앞에 닥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연의 속박을 부정하던 근대적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인간사회의 조직 원리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과제가 인류 앞에 닥쳐 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증세들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과 함께 인류사회의 자기치유 노력에 동참하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이 사회가 고통과 치욕의 역사를 벗어나기 바란다.
이 진단과 관련된 생각을 최근 에 ‘자본주의 이후’란 제목으로 8회에 걸쳐 올렸다. 1985년 동서교섭사 연구를 시작한 이래 30년간 문명사 공부를 통해 다듬어온 생각이다. 이 생각의 근거를 더 소상히 밝힘으로써 독자들이 믿고 참고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2015년의 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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