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판 막노동, 버섯농장 잡부, 보험설계사, 상조회 지점장, 인테리어회사의 영업 담당, 커피 원두 판매…. 지난 6년 동안 김수경(52)씨가 거쳐온 직업은 한 손에 꼽기도 힘들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2009년 5월까지만 해도 김씨는 어엿한 쌍용자동차 직원이었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입대를 앞둔 아들과 식사하러 가는 길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직장(상급 관리자)은 “정리해고 대상자로 선정됐다”고 통보했다. 회사는 경영 위기를 겪으며 전체 인력의 37%에 해당하는 2646명 인력감축안을 그해 4월 발표한 터였다. 1989년 입사한 쌍용자동차는 그에게 첫 직장이자, 평생 일터였다. 코란도에 유리를 끼우는 작업을 2년6개월 동안 하다가, 부품 수출부서 물류팀으로 옮겨 20년 가까이 일했다. 날벼락 같은 해고 통보였지만, 차마 아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해고된 사실을 모르고 입대했다. 그 뒤 정리해고에 반발해 노동자들이 77일간 경기도 평택공장 점거농성을 벌일 때 김씨가 함께했다는 사실도 아들은 까맣게 몰랐다.
사실 김씨에게 77일간의 점거농성은 여러모로 버거운 상황이었다. 2005년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나서 그는 비장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면역기능을 조절하는 장기가 없으니, 경찰이 최루액을 난사해대고 온갖 유해물질이 가득한 공장 안에서 77일을 버티는 것 자체가 위험할지 몰랐다. 정리해고 직전에 분양받아 입주한 아파트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1억4천만원을 융자받았는데, 이자만 월 71만원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점거농성을 풀고 공장 밖으로 나온 8월6일 이후에 온갖 직업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다. 생활비와 이자 등으로 그는 지금도 빚에 허덕인다. 함께 정리해고된 동료들이 단식, 고공농성 등 복직 투쟁을 할 때도 몇 년간 그는 동료들 곁에 있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6년의 꿈,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회사는 애초 2646명을 정리해고하려던 계획 대신에 희망퇴직 등으로 1666명을 퇴사시킨 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 중이던 2009년 6월8일 최종적으로 980명(관리직 6명 포함)을 정리해고했다. 그리고 8월6일 정리해고자 가운데 상당수를 무급휴직자와 희망퇴직자로 전환하기로 노사합의했다. 공장 점거농성을 푸는 대가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정리해고자는 165명(관리직 6명 포함)이었다. 이외에 징계해고자도 44명이나 됐다.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었다.
회사는 김씨를 정리해고했지만, 김씨는 아직 회사를 정리해고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쏘 자동차에서 ‘I ♡ SSANGYONG(쌍용)’이라는 스티커를 떼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회사는 2009년 파업 이후 김씨가 일했던 부서를 외주화했다. 설사 복직한다 해도 돌아갈 일자리가 없다. 하지만 지난 6년간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한 번도 버린 적은 없다.
근거 없는 희망도 아니다. 회사의 주인이 중국 상하이자동차에서 2011년 인도 마힌드라로 바뀐 이후, 쌍용차는 경영 정상화의 궤도에 올라섰다. 쌍용차는 올해 생산 목표 대수를 15만 대로 잡고 있다. 2003년 이후 최고치다. 내수시장 점유율도 4%대로 올라섰다. 회사는 지난해 무급휴직자와 일부 징계해고자 등 480여 명을 복직시켰다. 내년 1월 신차인 소형 스포츠실용차(SUV) ‘X100’ 출시도 앞두고 있다. 파업 이후 2011년 코란도C에 이은 두 번째 신차다. “2013년까지 어떠한 신차도 출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2008~2009년 당시 안진회계법인과 삼정KPMG는 쌍용차 재무제표상 손실액을 계상하고 대규모 정리해고 근거로 삼은 바 있다. 신차 출시로 2009년 8월6일 약속했던 희망퇴직자 복직이 성큼 다가와 있다. 하지만 회사는 김씨를 비롯한 정리해고자들을 항상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다. 막판에 희망퇴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리해고가 부당했다”고 주장하는 ‘강성’ 노조원들과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다.
2천배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던 2천 일153명의 해고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 확인소송’에서 1심은 회사가, 2심은 노동자들이 이겼다. 지난 2월 서울고법 민사2부(재판장 조해현)는 “쌍용차 정리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회사가 경영 위기를 부풀렸고 해고 회피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은 해고노동자들에게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희망이 됐다.
김씨는 지난 11월4일부터 경기도 평택 집에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으로 매일 출퇴근했다. 대법원 판결이 예정된 11월13일까지 ‘공정한 판결’을 촉구하며 매일 2천배씩 절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2천’이라는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첫날 1100배를 하고는 땀에 흠뻑 젖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2천배는 어둑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난다. ‘2천 일’이라는 숫자는 2천배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을 뜻한다. 11월11일로 2천 일을 맞은 투쟁 기간에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등 25명이 숨졌고, 해고자들은 21일간의 집단 단식농성과 오체투지, 3보1배, 고공농성 등 안 해본 싸움 없이 끈질기게 싸웠다.
“자유에 1표, 평등에 1표, 정의에 2표 주실 겁니다.” 대법원 판결이 있던 지난 11월13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응원하러 온 ‘밀양 할매’ 김영자씨가 김수경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난 11월4일부터 함께 2천배를 하고 대법원 앞에서 노숙농성을 했던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김정운 수석부지부장의 고단한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50여 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이날만은 밥벌이도 제쳐두고 대법원을 찾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10명에게만 방청을 허용했다. 밖에서 초조하게 판결 결과를 기다리던 누구는 다리가 떨린다며 아예 주저앉았고, 누구는 가슴이 벌렁거린다며 대법원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서울고법 판결이 있던 지난 2월7일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왔다는 이창근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도 긴장한 듯 법정 안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다.”
단 한마디가 끝이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6년간의 질긴 싸움을, 2천배를 했던 간절한 마음을 대법원은 차갑게 외면했다.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판결이 끝난 직후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운데 누구 하나 악다구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이게 무슨 대법원이냐.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은 어디 가서 호소해야 하냐”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고 울부짖는 ‘밀양 할매’들의 절규만이 경찰 병력으로 둘러싸인 대법원 건물 밖에 울려퍼졌다.
‘누군가 또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어젯밤 사법부가 친자본의 하수인이라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또 누군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6년 동안 벼랑 끝에서 버텨왔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대법원이 다시 대못을 꽂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고된 상황에서도 또 다른 행동과 결단을 해왔다. 반드시 공장으로, 정든 일터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판결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득중 지부장은 “끝까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잊지 말아달라”며 꾹꾹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회사 쪽은 냉정했다. 쌍용차는 즉각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알리는 자료를 내놨다. “2009년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복직 문제는 투쟁이나 정치 공세 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쌍용차 쪽은 항소심 패소 이후에 대법관 출신인 김용담·박일환 변호사와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인 김진권 변호사 등 호화 변호인단을 선임했다.
“법원의 저울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 막대처럼 기울어 있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지난 11월10일 통화한 해고노동자 ㄱ(51)씨는 “판결 선고가 있는 날 대법원에 가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어차피 이길 거란 기대가 없고, 내가 간다고 해서 정해진 결론이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력시장에 나가 공사장 막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예감은 정확했다.
대법원 정문 앞 기자회견이 끝난 뒤 김정욱 사무국장은 누런 서류봉투에서 꺼낸 A4용지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해고자들의 이름을 한 장에 하나씩 출력해왔다고 했다. “이기면 각자 종이를 잘게 찢어서 날려버릴 생각”이었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이게 이제 무슨 소용이야”라며 들고 있던 종이다발을 하늘로 던졌다. 정리해고자 김정욱·김득중·이창근, 징계해고자 김정운·윤충열, 비정규직 해고자 한윤수…. 187명의 이름이 바람에 흩날렸다.
시커먼 사내들은 그제야 참았던 설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동민씨는 “아이들한테 거짓말쟁이가 돼버렸다”는 말을 하다 말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이기면 공장에 돌아가서 일할 거야”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거짓말”이라고 했단다. 아빠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수경씨는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땅바닥에서 찾아 집어들었다. 그는 이날 판결이 걱정돼 새벽 3시부터 눈을 떴다고 했다. “우리가 버텨온 게 노동자들이 계속 패배하고 쓰러지고 있는 도미노를 역도미노로 돌려놓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던 그의 바람은 허망하게 끝났다. 그는 자기 이름을 가슴 앞에 들고서는 “영원한 정리해고자가 됐다”며 웃었다. 김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이날 저녁 평택공장 앞에서 쓴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공장 앞 출근선전전도, 그 다음날인 11월15일 2천 일 투쟁문화제도 이어갔다.
그들의 싸움이 ‘우리의 싸움’인 이유“대법원 판결로 그나마 회사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법적 완충지대는 사라졌다. 이 질긴 싸움이 끝나는 건 이제 3가지 경우의 수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가 포기하는 경우와 우리 모두가 죽는 경우, 그리고 회사가 공장 문을 여는 것. 우리에게 남은 경우의 수는 이 3가지가 전부다.”(11월13일 쌍용차지부 긴급 보도자료) 대법원은 ‘4번째’ 경우의 수를 지워버렸다. 그것도 ‘해고는 살인’이라는 노동자들의 간절한 외침을 즈려밟고, 회사가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길을 더 넓게 터줬다. 이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무기는 쌍용차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기 위해 자유자재로 쓰일 것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이 ‘그들만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가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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