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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기 개똥 치우고 고객 이삿짐 날라주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와 함께하는 설치·수리 기사 응원 캠페인 ‘진짜 해피콜’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설치·수리 기사들이 백기완 소장과 ‘가노을빛 세상’을 꿈꾸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등록 2014-09-03 18:17 수정 2020-05-03 04:27
케이블방송인 티브로드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울 광화문 태광그룹 본사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케이블방송인 티브로드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울 광화문 태광그룹 본사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따르릉~. 전화 한 통이면 우리 집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전화, 인터넷, 유선방송을 설치해주고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전자제품도 뚝딱 고쳐낸다. 바로 설치·수리 기사들이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휴일도 없이 일하는 이들은 전봇대와 건물 지붕을 곡예하듯이 오르내리다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삼성전자,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그들의 작업복 위에 붙어 있는 번듯한 대기업 이름은 ‘가짜’다. 그들은 직원이 아니다(라고 대기업들은 주장한다).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따르릉~. 그들이 가고 나면 전화가 걸려온다. 그들을 ‘진짜’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기업들이 “서비스가 어땠냐”고 묻는 고객만족도 조사 전화다. 소비자가 매긴 점수에 따라, 가뜩이나 적은 월급은 더 깎이기도 한다.
설치·수리 기사들은 어느새 간접고용 노동자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부터 여기저기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불안정한 고용 여건을 개선하라는 목소리가 거세진다. 유선방송 씨앤앰과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장 폐쇄와 노조 탄압에 맞서 50일 넘게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와 함께 설치·수리 기사들을 응원하는 캠페인(상자 기사 참조)을 시작한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이들의 노동 현실을 보여주는 기사도 연재한다. _편집자


“여러분 같은 기술자를 우리말로 ‘잰손’이라고 부른다. 재다는 건 빠르다는 거야. 탁월한 몸과 두뇌를 가졌다는 뜻이지. 그런데 깎아내려서 ‘쟁이’라고들 하지. 여러분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뜨저구니’를 부려야 해. 목숨의 소리로, 저항하란 거야. 비정규직이 900만 명이라잖아. 그래야 세상이 바뀌어.”

11개월 되면 폐업하는 협력업체

지난 8월28일 오후 서울 대학로. 삼성전자서비스,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티브로드, 씨앤앰 등 설치·수리 기사인 비정규직 노동자 6명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비없세) 황철우 대표, 박점규 집행위원,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등이 백기완(82) 통일문제연구소장을 찾았다. 평생 노동자 곁을 지켜온 민주화운동의 ‘어르신’은 노란 봉투를 꺼내왔다. 봉투 안에 고이 접힌 한지에는 ‘아, 가노을빛’이라고 적혀 있다. 백 소장이 그날 아침 직접 쓴 붓글씨다. 설치·수리 기사들을 응원하는 저잣거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글씨라도 팔아 보태라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가노을빛은 그립고 그립던 사람들이 갑자기 만났을 때 달아오른 얼굴빛을 이르는 낱말이야. 내가 왜 이걸 썼느냐? 여러분이 죽어라 일하는 노동자인데도 비정규직이라 노동자 대접을 못 받았잖아. 그런데 이제 ‘우리가 노동자’라는 걸 만난 거야. 노동자의 힘을 스스로 만났단 거야. 이게 바로 가노을빛이지 뭐야.”

설치·수리 기사들의 현실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최성근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부지부장(이하 티브로드): 티브로드 본사는 태광그룹이다. 지난해 임금협상 때는 본사가 ‘가짜 사장’인 센터장과 같이 교섭에 나왔다. 그런데 올해는 ‘너희는 우리 노동자가 아니다’ ‘너희 사장한테 가서 해결하라’고 태도가 돌변했다. 서울 광화문 태광그룹 본사 앞에서 노숙하며 파업농성 중인데, 회사는 건물 10m 반경에 접근을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지난 8월19일엔 전북 장수에서 파업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비정규직이 비가 오는데 전봇대에 올라 작업하다가 떨어져 숨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본사는 ‘우리가 채용하지 않았으니 책임 없다’고만 한다. 추석 때는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싶다.

김지수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경기광주하남지회장(이하 LG): LG는 수리기사들이랑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 퇴직금을 안 주기 위해서다. 11개월째 되면 협력업체가 폐업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계약 11개월이 되던 날, 해고 통지와 폐업 신고를 한꺼번에 했다. 다른 협력업체(센터)가 들어왔는데, 노조에 가입한 기사들은 못 받아주겠다고 해서 9명이 농성 중이다. 다른 센터에서도 노조원들에겐 일을 안 준다.

장연의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조직부장(이하 SK): KT에서 일하다 3년 전 SK브로드밴드로 이직했다. 시설이 노후한 SK브로드밴드는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기사들을 더 심하게 착취한다.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조를 설립했는데 탄압이 더 심해진다. ‘너희는 직원이 아니라 도급기사니까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위탁계약서를 쓰라’고 하는 것에 반발해 8월1일부터 거리로 나와 싸우고 있다.

고객 “성과금 수천만원 받으셨던데…”

박석훈 케이블방송 씨앤앰 비정규직지부 부지부장(이하 씨앤앰): 30년 이상 유선방송 설치기사를 했다. 전봇대에서 떨어지고 오토바이 타다가 목숨 잃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법적 보상은 전혀 없다. 지난해 노조가 결성되고 나서야, 3년차 기사들이 월 130만원(세금 포함) 저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투기자본들이 ‘먹튀’하기 위해 직장 폐쇄, 부당 해고하는 것에 맞서 광화문에서 45일째 노숙농성 중이다.

지난 8월28일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오른쪽)이 설치·수리 기사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지난 8월28일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오른쪽)이 설치·수리 기사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위영일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장(이하 삼성): 삼성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말을 들으며 주 72시간씩 일요일도, 휴가도 없이 살았다. 조금만 더 일하면 월세에서 전세로 갈 수 있을 거란 소망으로 살았다. 우리 요구는 별게 아니다. 근로기준법 지켜라, 최저임금 보장해달라는 거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지키라며 분신했던 40여 년 전과 뭐가 달라졌나 모르겠다. 해고, 자살, 구속을 감내한 끝에야 겨우 점심시간 1시간을 단협으로 따낼 수 있었다. 삼성 마크가 선명한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아무도 우리가 하청노동자인 줄 모른다. 어떤 고객은 ‘기사님, 성과금 수천만원 받으셨던데 좋으시겠어요’라고 한다. 엄청난 괴리감을 느낀다. 삼성전자가 소비자 고객만족 품질지수 13년 연속 1위를 했다. 내가 고객한테 욕먹어가며 막대한 이익을 챙겨줬는데, 회사는 문제가 생기면 ‘직원 아니다’라면서 책임을 다 떠넘긴다.

황철우 비없세 대표(이하 비없세): 씨앤앰과 티브로드는 오랫동안 노숙농성하느라 어려움이 더 많을 것 같다.

티브로드: 6월1일부터 현장 업무를 거부하고 있다. 두어 달 지나니까 생활이 점점 피폐해진다. 워낙 열악한 근로조건이라 그동안 저축을 많이 해놓은 조합원이 없다. 아이들이랑 밖에 나가서 밥 한 끼 사먹을 여건이 안 되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배 안 곯겠다고 나와서 싸우는데 배를 곯는다. 노조에서 십시일반 모아서 채권 발행도 생각하고 있다. 원청에선 교섭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너희가 얼마나 버티겠냐’ ‘돈 떨어지면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인다.

씨앤앰: 이렇게 오래 노숙농성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당장 가정형편이 어려운 조합원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농성 대오를 빠져나가고 있다. 7월은 민주노총에서 채권도 발행해주고 마이너스대출을 받아 기금을 마련해서 버텼지만, 8월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고통스럽다.

비없세: 그래도 노조가 설립된 뒤 사람답게 대접받을 조건이 된 것 아닌가.

삼성: 아직 사람 대접은 못 받고 있다. (웃음) 다만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저항하겠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 전에는 인격 모독이나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다 참아넘겼다. 회사도 예전에는 대놓고 하던 잘못을 이제는 숨어서 한다.

진상 고객보다 모든 걸 떠넘기는 회사가 문제

티브로드: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보니 전에는 이직률이 높았다. 3개월간 수습교육을 시켜놓으면, 보름이나 한 달 만에 그만뒀다. 그런데 노조 만들고 1년 지나서 보니까, 우리 법인체(협력업체)에는 그만둔 사람이 없다. 지금은 노조라는 기댈 언덕이 생기니까, 열악하지만 내년에는 더 나아지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거다. 주 72시간 근무시간이 지금은 48시간이 됐고, 예전엔 자기 차량으로 유지비를 받고 일해야 했는데 이제는 회사가 리스차를 구매해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비없세: 고객 집을 직접 찾아가서 서비스해야 하다보니, 친절하게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SK: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자부심이 높았다. 집안에서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어느 순간부터 기술자가 아니라 영업맨으로 전락시켰다. 고객이 이사갈 때 이삿짐을 날라주라는 거다. 그걸 안 하면 고객만족도 조사 전화가 왔을 때 ‘불만족’ 등급을 받고 월급이 몇십만원 차감되는 거다.

LG: 30분을 달려가서 1분이면 끝나는 일이 많다. 컴퓨터 안 켜진다, 텔레비전 안 켜진다고 해서 가보면 설명하고 버튼 눌러주고 끝인 경우가 많다. 전화기 서너 대를 신형으로 바꾸거나, 술 마시고 나서 칼을 들고 협박하는 진상 고객도 있다.

삼성: 애완견 배설물을 빨아들인 로봇청소기를 치워달라고 수리기사를 부른 고객도 있었다. 결국 청소해주고 나서 서비스 요금을 내야 한다고 하니까 화를 내더라. 고객만족도 조사 때 ‘불친절하다’는 답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상’ 처리를 했다. 하지만 결국 ‘불만족’ 등급을 받았다. 무상 처리하면 수리비로 1만 몇천원을 받을 수 있는데, 불만족 등급을 받으면 2천원밖에 못 받는다. 욕은 욕대로 먹고 모든 책임은 뒤집어쓴 셈이다. 진상 고객도 문제지만, 회사가 엔지니어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게 문제다. 고객한테 심하게 폭행을 당하더라도 회사가 반대해 경찰에 고발하지도 못한다.

티브로드: 소비자에게 바람이 있다면, 조금만 너른 마음으로 생각해줬으면 한다. 방문 설치·수리 기사들이 웃는 얼굴로 못 갈 때가 있다. 고객 집에 방문하기 전에 회사에 실적을 쪼이고, 영업 압박을 받아서 아마 웃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기사들한테 짜증 내진 말아줬으면 한다.

“피가 나도록 새장을 물어뜯는 놈이 산다”

1시간 넘게 이어진 비정규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묵묵히 귀기울이고 있던 백기완 소장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여러분이 노동현장에서 겪는 아픔이나 진상 고객 이야기, 그게 다 뭡니까?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인간형을 만드는 겁니다. 다 네 거 아니면 내 거다. 뺏기면 난 굶어죽는다. 사람들 마음이 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회사도 (접근금지니 하는) 쩨쩨한 걸 갖고 노동자들을 꼼짝 못하게 괴롭히잖아. 자본주의 짜임새가 모든 인간미를 파괴한다. 하지만 좁은 새장에 들어가서 ‘물이 떨어졌다’ ‘좁쌀이 떨어졌다’만 고민하는 새는 영원히 새장에서 죽는다. 피가 나도록 새장을 물어뜯는 놈이 있어. 그런 놈이 살아남는다. (설치·수리 기사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이렇게 모였다. 여러분이 생활현장에서, 노동현장에서 겪는 일만 갖고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깨우치고, 노동자들도 몸부림쳐야 한다. 그 순간이 얼마나 감격스럽겠나. 순정의 빛, 눈물의 빛이다. 그게 가노을빛이다.” 이야기를 듣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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