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쌀 쿠데타’라고 생각한다.”(송기호 변호사)
정부는 지난 7월18일 쌀 관세화 진행을 선언했다. 그동안 닫았던 국내 쌀시장을 열고, 외국 쌀에는 국내 쌀과의 가격 차이만큼 관세를 매긴다는 뜻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시작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쌀시장 개방 압력을 받아온 지 정확히 20년 만에 이뤄지는 변화다. 그러나 법조계·시민사회에서는 정부의 일방적인 쌀 관세화 추진이 기본적인 공론화 절차를 무시했다며 반발했다. 그동안 양곡관리법 등 법률을 통해 쌀 수입을 통제해온 정부가 쌀시장을 개방하면서 법 개정을 거치지 않은 채, 세계무역기구(WTO)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쌀 100가마 가운데 9가마는 수입 쌀
사실 ‘쌀 관세화’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논쟁이다. 그만큼 쌀시장 개방 문제는 복잡하다. 해방 이후 잠시 쌀 수입 전면 자율화를 시행했던 우리나라는 1950년 양곡관리법을 제정한 뒤, 정부가 쌀 수입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그러나 UR 협상에서 우리나라의 쌀 품목은 예외적으로 관세화를 10년 동안 유예받았다. 그 대신 중국·미국·타이·인도·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쌀 수출국으로부터 매해 일정량의 쌀을 수입하는 ‘의무수입물량’이 생겼다. 2004년 12월, WTO와 쌀 관세화 유예를 10년 더 연장하면서, 의무수입물량으로 2배 늘어난 40만9천t을 5%의 관세를 받고 매년 수입하고 있다. 의무수입물량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를 통해 들여온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에서 소비하는 쌀 100가마 가운데 9가마는 수입 쌀이 차지하고 있다.
1
그러나 법조계·시민단체 등은 “9월30일까지 WTO에 쌀 관세율을 통보하고, 내년 1월1일부터 쌀 수입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정부의 통보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양곡관리법을 근거로 외국 쌀의 수입을 제한해왔기 때문에, 정부가 쌀 전면 개방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양곡관리법 개정 등을 통해 국회의 사전 비준 동의를 받은 뒤 WTO 등에 관세율을 통보해야 하는 게 올바른 절차라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쌀 대책팀장을 맡고 있는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수륜법률사무소)는 지난 7월23일 과 만나 “WTO와의 쌀 관세화 유예 종료는 국제조약상의 문제이며, 국내에서 외국 쌀에 대한 관세를 매길지를 정하는 건 법치주의의 문제다. 정부가 9월30일까지 관세율을 통보하게 되면, 국내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국민의 참정권이 배제당하는 상황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정부는 2007년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이미 쌀 수입을 허가했기 때문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관세화를 하기 위해 양곡관리법을 개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쌀 관세화 관련 설명자료를 통해 “현행 양곡관리법(제12조 제1항)은 시장접근물량에 적용되는 양허세율(5%)로 미곡을 수입하려는 자는 농식품부 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사항(관세화시 적용되는 고율 관세 수입)에 대해서는 제한 규정이 없다. 또 관세화는 ‘시장접근물량 이외 물량’의 수입을 자유화하는 것이므로, 양곡관리법 개정 없이 관세화 시행이 가능하며 법률회사 및 법률전문가 자문 결과(4건)도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고 반박했다.
광고
“WTO 등의 눈치를 보는 저자세 대응”이라는 비판 속에서 정부가 쌀 관세화를 서두르는 배경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국 간에 진행 중인 광역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참여를 위해 쌀 관세화 문제 해결 등의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WTO 체제 안에서 관세화를 미루더라도, 그 대가로 늘어날 의무수입물량의 부담을 막을 수 없다는 예상도 있다. 이동필 농식품부 장관은 쌀 관세화를 선언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농업계의 쌀 관세화에 대한 우려를 고려해 국내외 법률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외국 사례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주요국 의견도 타진하며 관세화 유예 재연장 가능성도 검토했으나, 이 경우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물량을 추가적으로 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필리핀 등 우리와 같은 쌀시장 개방의 딜레마를 겪은 해외 사례를 면밀히 참고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UR 협상에서 우리나라와 함께 쌀 관세화 유예를 인정받았던 일본과 필리핀은 현재 전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9년 쌀 품목에 대해 조기 관세화를 진행했으나, 국내산 쌀 선호 탓에 의무수입물량을 초과하는 수입은 적었다. 필리핀은 10년 유예를 거친 뒤, WTO와 재협상해 7년 유예 연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필리핀은 2012년 6월 말 유예 연장 종료에 이르자 의무수입물량을 2.3배 늘리는 조건으로 관세화를 5년 더 미루는 ‘의무면제’(웨이버)를 받았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지난 7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쌀 관세화 해법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정부 등은 필리핀이 관세화 유예로 의무수입물량을 2.3배 늘리는 비싼 희생을 치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의무수입물량이 종전의 35만t에서 협상 뒤 매년 약 85만t이 늘어난 필리핀은 쌀자급률이 약 85~90%로 의무수입물량보다 더 많은 양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라 (의무수입물량의 증가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필리핀의 경우, 어차피 수입해야 할 물량을 대체하고 관세화를 위한 시간을 5년 더 벌었다는 것이다. 장 소장은 또 “필리핀 정부가 쌀 협상 과정에서 농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제대로 의견 수렴을 한 점을 우리 정부도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관세화에 앞서 국내 시장 상황과 농가 등의 실익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40만9천t 의무수입물량은 사라지지 않아이에 대해 정부는 “지난해부터 전문가 및 관계 부처와 관련 쟁점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지역별 설명회·간담회·토론회 등을 통해 농업인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며 내년 1월1일을 목표로 관세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WTO에 알리는 시한이 가까워져서 관세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광고
그러나 정부의 뜻대로 관세화를 진행해도 해마다 들여오는 40만9천t의 의무수입물량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쌀 100가마 가운데 9가마니를 뺀 91가마 중 일부가 관세를 물고 들어온 수입 쌀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세화를 할 경우 과연 수입량이 늘어날 것인지도 관심사다. 이 장관은 “현재 우리 쌀 가격은 80kg(1가마)에 17만원 선, 외국산은 6만5천~7만원 수준이다. 관세율을 300%만 부과하더라도 24만~25만원이 된다. 관세화되더라도 외국 쌀 수입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농업경제를 주로 연구하는 ‘GS&J 인스티튜트’의 이정환 이사장은 지난 7월22일 ‘쌀 관세율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9월30일까지 WTO에 통보할 우리나라의 쌀 관세율이 약 504% 수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같은 토론회에서 “정부가 말하는 쌀 고율관세론은 한-중 FTA와 TPP, 그리고 DDA(도하개발어젠다) 협상 등의 변수가 있어 (관세 인하 등의) 새로운 불확실성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저 고율 관세에 기대는 쌀시장 개방만으로는 제대로 된 대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쌀 관세화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민변 등이 정부를 상대로 쌀 관세율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국회에 쌀 관세율 결정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20년 넘게 이어진 ‘쌀의 딜레마’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검찰, 김성훈 구속영장 청구…경찰 신청 4번 만에야
판사 출신 교수 “경호처 보복 해임, 윤석열 석방 탓…재구속해야”
헌재, 오늘도 윤석열 평의…‘탄핵 심판 선고’ 다음주 넘어가나
[단독] ‘계엄 블랙박스’ 경호처 비화폰 기록 원격 삭제된 정황
광주 5·18민주 광장서 윤석열 탄핵 선고 생중계
“모든 지옥 열렸다”…가자 최소 320명 사망, 전쟁 다시 불붙나
“김건희는?” 질문에, 이복현 “허…” 한숨 쉬게 한 삼부토건 주가조작 의혹
“탄핵당하면 사람들 죽이고 분신”…경찰, 극우 협박글 내사 중
기약 없는 ‘윤석열 탄핵 선고’…민주 “헌재, 숙고 아닌 지연”
‘김건희 황제관람’ 거짓 해명 전직 대통령실 비서관, 차기 국악원장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