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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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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성장 후 분배’는 쓰레기통으로

더 이상 빠른 성장이 불가능한 한국 경제, 10년 전 추세 인식해야 했음에도 미적대는 사이

분배 더 나빠져… “그래도 성장 먼저” 말한다면 분배는 외면하고 싶다는 뜻
등록 2014-07-16 15:12 수정 2020-05-03 04:27
2011년 6월 폐기물 야적장에 난 불로 잿더미가 된 서울 강남구 포이동 1226번지 재건마을의 어둠 뒤로 타워팰리스 등 고층 주상복합건물이 불빛을 뽐내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1년 6월 폐기물 야적장에 난 불로 잿더미가 된 서울 강남구 포이동 1226번지 재건마을의 어둠 뒤로 타워팰리스 등 고층 주상복합건물이 불빛을 뽐내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맥락이나 정치적 입장은 달라도 데이비드 리카도나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리고 현대적 성장이론가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정체된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9세기에 토머스 칼라일이 경제학을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불렀던 까닭이기도 하다.

<font size="3">피케티가 매달린 게 고작 ‘능력주의’? </font>

토마 피케티는 자신의 핵심적 주장, 즉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다는 명제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러하였음을 충실한 데이터로 보여줄 따름이다. 연평균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이라는 집단기억을 지닌 한국 사회에서 “성장률을 올리면 될 것 아니냐?”라는 반응이 충분히 나올 만하다. 투자 의욕을 꺾는 ‘좌파 정권’을 탓하기도 하고 뭔가 모를 ‘창조경제’의 힘이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기도 한다. 실은 많은 경제학자가 생각해본 것들이다. 누구는 ‘기업가정신’이나 ‘혁신’을 강조했고, 또 누구는 ‘지식’에 의한 내생적 성장을 얘기했다. 문제는 마치 블랙박스처럼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심지어 어떻게 열 수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는 데 있다. 그러는 사이 분배는 악화되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곧바로 경제성장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민주주의의 악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기초마저 흔든다. 급진적으로 읽힐 수 있음에도 피케티가 고작(!)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깨질 때 대중은 절망하고 그 절망은 사회의 존립 기반을 파괴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어떠한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980년대 평균 8.1%였는데, 1990년대에 6.2%로 내려가더니 2000년대에는 3.6%로 뚝 떨어졌다. 2007년 이후만 살펴보면 2%대에 불과하다. 만약 이렇게 느린 속도가 유지된다면 1인당 GDP 4만달러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뒤에나 달성될 수 있다. 문제는 노동생산성 증가율도 둔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1인당 GDP 증가율은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1인당 노동시간 증가율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을 보면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980년대 7.16%, 1990~97년 5.46%, 2000년대 이후 4.46%로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물론 1인당 노동시간은 조금 줄어들었다.

표준적인 경제성장이론에 따르면, 1인당 소득의 높고 낮음은 장기적으로 자본산출계수와 1인당 인적자본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산출계수란 경제규모 대비 실물자본의 축적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인데, 분모에 GDP를 사용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피케티가 중시하는 부/소득비율, 즉 β와 비슷한 개념이다. 제1017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비율은 더 이상 상승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높은 수준에 와 있다. 한국은 소득에 비해 자본축적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된 상태다. 이제는 자본축적 속도도 주춤할 수밖에 없고 새로 투자할 곳도 마땅치 않다. 실물자본 축적에 의한 성장은 한계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font size="3">전 국민이 석·박사 학위 따지 않는 한</font>

그렇다면 실물자본 대신 인적자본이 추가적인 성장동력이 될 수 있을까? ‘질 높은 노동력’으로 상징되는 인적자본의 축적은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안타깝게 여기에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는 1950년대 이후 인적자본이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보여준다. 인적자본을 양으로 측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25살 이상 인구의 평균교육연수를 대리변수로 사용했다. 성장이론을 데이터로 검증할 때 많이 쓰는 변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25살 이상 인구의 평균교육연수는 2010년 현재 11.69년으로 이미 유럽과 일본(11.49년)을 앞질렀다. 13.27년으로 가장 높은 미국도 1980년대 초 11.94년을 달성한 뒤 증가 속도가 크게 둔화했다. 즉, 교육연수가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 국민이 석·박사 학위를 따지 않는 한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적자본에 의한 성장동력도 점차 고갈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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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동안 저축도 많이 했고 교육도 열심히 받아 이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빠르게 성장할 수는 없다. 적어도 10년 전쯤에 이러한 추세 변화를 인식했어야 한다. 그런데 미적대는 사이에 분배 구조가 너무 나빠졌다. 을 보자. 한국의 자본소득분배율, 즉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외환위기 이전 20% 내외였으나, 이후 급격히 상승해 이제는 30%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지니계수도 올라갔는데, 이는 자본 대 노동 간의 기능적 분배뿐만 아니라 개인별 소득분배도 함께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최상위 계층으로 소득이 집중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에서 보듯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상승한 한국의 상위 1% 소득점유율은 미국과 영국보다는 낮지만 일본과 프랑스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버렸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최상위 계층으로의 소득 집중 현상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선도했던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심각했다. 첨단금융이 번영을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나라들이다. 그러나 분배를 개선하라는 메시지를 외면하는 사이에 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형태로 경고장을 보냈다. 한국은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또 글로벌 위기에도 상대적으로 잘 버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치른 분배의 악화라는 대가는 너무 크다.

<font size="3">‘창조경제’의 나라 미국에서도</font>

미국의 천재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지난해부터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론’을 설파하고 다닌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1990년대 말 미국 재무부 장관으로 금융자유화를 밀어붙였던 장본인이다. 유명한 주류 거시경제학자인 노스웨스턴대학의 로버트 고든은 최근 ‘미국 경제성장의 종말’이란 제목의 논문을 두 차례나 발표했다. 피케티 역시 망설임 없이 미래의 성장률을 낮춰잡는다. 이렇게 가다가는 성장도 안 되고 분배도 안 되는 미래가 올 것임을 예고한다. 우리도 이미 그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이제 ‘선 성장 후 분배’라는 낡은 시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분배가 극도로 악화된 미국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자. 분배가 그렇게 나빠지는 동안 미국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2%에 불과했다. 애플이나 구글이 있는, 이른바 ‘창조경제’의 터전이 가장 잘 다져진 나라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불평등이 심화된 정도를 볼 때 성장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먼저 성장하고 나중에 분배하자는 논리는 이제 먹히지 않게 되었다. 나눠줄 것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으로 분배를 해결하겠다고 되풀이해 말한다면, 이는 어쩌면 분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니 그냥 외면하고 싶다는 속내를 감춘 것일지 모른다.

사실 성장과 분배 둘 다 쉽지 않은 과제다. 물론 성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장으로 분배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만은 버려야 한다. 성장은 성장이다. 대신에 분배가 악화되면 그것이 도리어 성장을 제약할 수 있다는 논리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장기침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이야말로 재화와 서비스의 대량소비처다. 기업도 이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 크는 것이다. 지출 여력이 넉넉한 부자들의 관심은 축적과 대물림이다(피케티가 간파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사실 자본이 부족했던 자본주의 초창기에는 이들의 축적이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나간 듯하다. 정책 당국은 물론 기업도 이 사실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갖자. 지난 세기 자본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보수주의자’ 케인스의 생각이기도 하다.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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