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예술가들에게 생계를 위한 긴급 지원을 받으려면 예술활동을 통한 소득과 실적을 증명하라고 한다. 정부가 정한 ‘법적 예술인’ 기준을 증명하는 길이 현실의 예술인들에겐 어렵기만 하다. 지난 1월 서울 홍익대 앞의 한 클럽에서 공연 중인 인디밴드 ‘더문’의 보컬 정문식씨 모습.정문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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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싱어송라이터다. 이미 오래전에 음원과 음반을 발표한 바 있는 뮤지션이고, 음악인들의 노동조합을 표방하는 뮤지션유니온의 조합원이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예술인’에 속한다. 세상이 예술인이라고 하니, 나이 마흔이 되도록 나도 그렇게 믿어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예술인의 ‘복지’를 ‘긴급’ 지원한다. 예술인임을 확인받는 방법엔 세 가지가 있다. 공개적으로 발표된 예술활동(예술활동 실적)이 있거나, 예술활동을 통한 수입이 있거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심의위원회를 통한 심의를 거치면 된다. 궁금해졌다. ‘나도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예술가로 인정받는 건 ‘복불복’음악 강습으로 이미 생계를 해결하고 있는 처지지만 호기심이 들었다. ‘예술인 인증’을 위해 일단 예술인활동증명 시스템에 접속했다. 가입 절차를 거치면서부터 의아함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여러 예술 분야 중 오직 한 분야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음악’ 체크. 실제 활동 분야를 묻는 질문은 나를 혼돈에 빠트렸다. 창작·실연·기획 중 한 가지만 선택하라는 항목이 제시됐다. 나는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며(창작), 노래도 하고(실연), 공연도 기획(기획)하는데 하나만 선택하라니.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나의 영역을 한정해본 적이 없는데 어쩌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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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활동증명에 관한 법 조항에 이르니 더욱 기가 막혔다.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최근 3년 동안’이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었다. 음악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공연에 출연하거나, 음악을 창작·실연을 통해 발표하거나, 지휘를 한 경험이 있어야 했다. 나는 예술가임을 증명할 수 없겠구나. 이제까지 삽질한 건가. 마지막으로 음반 또는 음원을 발표한 것이 2009년이다. 그렇다면 공연은?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원천징수 3.3%를 제한 출연료를 받으며 공연한 적이 최근 3년 동안에는 없다. 불과 며칠 전에도 서울 홍익대 앞에서 공연을 했지만 나는 정부가 마련한 ‘예술인복지법’이 인정하는 예술 공연을 하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 3월31일 시행된 예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안에서 ‘저작권 등록이 3건 이상이거나 창작·저작물을 유통할 수 있는 저작인접권을 등록할 경우’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규정을 삭제하고, ‘공표된 저작물이 있거나 예술활동으로 얻은 소득이 연간 120만원 이상인 경우’ 예술인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예술인의 범위가 너무 넓어 일반인도 포함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회원이지만, 정부의 꼼꼼한 기준에 따르면 나도 그동안 ‘예술인의 범위가 너무 넓어 (예술인에) 포함됐던 일반인’인 것이다.
이쯤 되면 실존적인 질문이 생긴다. ‘누가 예술인인가?’ 만화의 경우 ‘해당 저작물로 인한 수익이 있는 경우에 한함’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만화 창작은 모두 ‘동호회’ 수준의 아마추어 활동으로 보겠다는 의미 아닌가. 영화·연예 시나리오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영화·드라마·잡지 등을 통해 1편 이상 발표했어야 ‘예술인’으로 인정받는다. 현실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분야에선 기획 단계를 지나 제작 구상 단계에서도 무산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알려져 있다. 이럴 경우, 이른바 ‘엎어진’ 작품을 집필한 작가는 예술가가 아닌 것인가. 시나리오작가로서 예술인복지재단의 규정에 의거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건 어쩌면 ‘복불복’인 셈이다.
개정된 시행령에선 이런 부분도 눈에 띈다. “국고·지방비·기금 보조 받아 예술활동 진행한 적 있는 개인, 단체도 예술인에서 제외된다.” ‘너흰 먹고살 만할 테니 복지법에 의한 지원이 굳이 필요 없지 않느냐’는 뜻으로 읽힌다. 내가 오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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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법을 개정한 주무부처의 고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원의 한계와 산적한 현안, 사업의 가치와 우선순위 충돌…. 현실적인 제약이 충분히 상상된다. 그럼에도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생활고와 지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느 시나리오작가의 서글픈 사연이 이 법을 낳았다. 예술인은 기존 복지제도의 틀거리에 포함될 수 없는 특수한 처지에 놓여 있고, 그들의 지위는 전형적 기준과 분류를 통해 정의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며 그들의 예술활동 또한 시장에서의 경제적 성과 등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는 고민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전형성’ 내지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예술가의 정의 또한 그 범위가 넓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월 10만원 안 되는 수입 증명하라니설치·문학, 음악·퍼포먼스를 넘나들며 주목받고 있는 홍대 앞 ‘다원예술작가’ ㅂ(26)씨도 정부 기준에 따르면 ‘법적 예술가’가 되긴 어려운 모양이다. 최근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밟아보려던 그는 정부의 ‘폭력성’ 앞에 발길을 돌렸다. 이제껏 펼친 퍼포먼스·공연 활동에 관한 웹 포스터 파일 등을 모조리 수집해 제출했지만 예술인복지재단의 답신은 황당했다. “첨부 자료에서 활동의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웠으니, 다시 제출해달라.”
다음과 같은 질문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당신은 미술가인가, 음악가인가? 미술가면 전시를 하나, 퍼포먼스를 하는가? 정확히 밝혀달라.” 과연 그는 미술가인가, 음악가인가. 그는 스스로도 하나로만 자신을 규정하기 어렵다 했다. 기존의 장르 개념에서 정형화되지 않은 작업을 이어나가는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작업 내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라는 강요는 무척이나 폭력적일 수 있다.
예술활동 실적을 증명하는 것이 까다롭다면, 예술활동 수입을 통해 예술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다. 1년에 120만원, 3년에 360만원. 정부가 인정하는 ‘수입’이다. 쉽게 생각하면 한 달에 10만원이다. ‘이 정도는 예술활동을 통해 충분히 벌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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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씨는 미술 분야 작업을 통해 수입을 얻은 적이 없다. 그 또한 다른 수많은 ‘홍대 앞’ 예술가들처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 부업을 병행한다. 가끔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음악 공연에서 소액의 출연료를 받은 적이 있긴 하다. 소규모 클럽 내지 카페 공연 무대다. 이런 공연의 출연료를 모아봤자 월 10만원이 되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수입을 증명하려면 계약서와 세무적으로 필요한 서류 등을 작성하고 신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2만~3만원도 넘기 힘든 출연료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 노력을 들여야 할까? 단지 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예술인 증명을 받기 위해서? 이미 스스로 예술활동을 영위하고 있고 홍대 앞 예술계에서 예술가로 자신을 증명하고 있는데 말이다.
1980년 유네스코는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했다. “예술가들이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점을 고려하여 그가 고용 예술가이든 자영 예술가이든 관계없이 그들의 사회보장, 노동 및 세제상의 여건들을 향상시켜줄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고 (중략) 더 나아가 문화활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인정한다 해서 이것이 그의 창작, 표현, 전달의 자유를 위태롭게 해서는 결코 안 되며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위엄과 고결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한국의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가들의 위엄과 고결을 보장하고 있는가.
정문식 뮤지션유니온 조합원·밴드 ‘더문’ 보컬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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