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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공약 어디 가고 새마을 타령인가

새마을운동의 실체에 관한 5가지 질문…경제민주화·복지의 대체재가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 처방인가
등록 2013-10-30 13:56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대통령이 1977년 9월25일 인천 경인체육관에서 열린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지방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로서 ‘큰 영애’ 박 대통령은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본뜬 새마음운동을 전개했다. 새마음운동은 ‘박근혜표 새마을운동’이었던 것이다.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1977년 9월25일 인천 경인체육관에서 열린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지방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로서 ‘큰 영애’ 박 대통령은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본뜬 새마음운동을 전개했다. 새마음운동은 ‘박근혜표 새마을운동’이었던 것이다.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월20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축사에서 “새마을운동의 내용과 실천 방식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서 미래지향적인 시민의식 개혁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과거’로부터 끌어낸 ‘미래’에 대한 화두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실체를 되짚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과거와 미래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5가지 질문을 정리해본다.

질문1. 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은 신선하다?

신선하지도, 갑작스럽지도 않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새마을운동의 ‘부활’을 예고한 바 있다. 지난해 선거 하루 전인 12월18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기자회견문을 보자. “다시 한번 ‘잘 살아보세’의 신화를 이루겠다. 그동안 어렵고 힘든 삶, 이제 저 박근혜가 국민 여러분의 삶과 동행하면서 지켜드리겠다.” 새마을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이자 핵심 구호로 여겨지는 ‘잘 살아보세’가, 선거전 마지막 투표 호소 메시지로 선택된 셈이다.

그럼 왜 새마을운동일까? 새마을운동 40주년을 맞아 실시된 2010년 4월 여론조사에선 ‘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정책’으로 새마을운동이 1위(59.1%)에 꼽혔다. 경제개발5개년계획(46.8%)보다 높았다. 2008년 7월 여론조사에서 새마을운동은 ‘한국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3위(14.7%)로 나타나, 한국전쟁(31.7%)과 5·18 민주화운동(31.7%)의 뒤를 이었다. 새마을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는 질문엔, 1위가 박정희 전 대통령(37.8%, )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카드를 꺼내는 것은, 그 시기가 언제가 됐건 갑작스러울 게 없다. 박 대통령의 ‘정치 데뷔전’이었던 1998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땐 유세장에서 가 울려퍼졌다. 그가 이사장이었던 영남대에는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이 있고, 그의 비선 측근으로 꾸준히 거론되는 최외출 영남대 교수는 이곳에서 새마을운동 이론을 가르친다.

재미있는 건 극작가 한운사가 작사하고 김희조 경희대 교수가 곡을 붙인 라는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가 아니라 1962년 5·16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탄생 배경만 보면 새마을운동보다는 5·16 군사 쿠데타의 향기가 훨씬 짙지만,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새마을운동과도 꽤 잘 어울렸다. 결국 이 노래는 5·16부터 10·26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기 전체를 상징적으로 풍미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제2의 5·16을 하거나 제2의 유신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박정희표 정치는 ‘제2의 새마을운동’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질문2.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성패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새마을운동은 공업화로 소외되고 있던 농촌을 겨냥한 운동이었다. 쿠데타 직후인 1960년대 전반만 해도 농가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보다 높았다. 그러나 1965년을 기점으로 도농 간 소득이 역전됐고, 1970년에 이르러서는 농가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촌향도’(농촌을 떠나 도시를 향함) 행렬에 몸을 싣는 농촌 젊은이들은 해마다 늘어났다. 1960년대 전반에 연 19만 명 수준이던 순수 ‘이농’ 인구가, 1960년대 후반엔 연 50만 명 수준으로 늘었다. 박탈감에 서러워하던 농촌 사람들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얼마나 와닿았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새마을운동의 결과 농민들은 소득이 좀 올랐을까? 실제 농가 소득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0~80년에 농가 1가구당 소득은 26만원에서 270만원으로 10.5배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부채는 1만6천원에서 34만원으로 21배가 됐다. 수치만 따지는 명목소득이 아닌, 물가상승분 등을 감안한 실질소득으로는 나아지긴커녕 더 나빠졌다. 그 배경을 이용기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새마을운동에서 소득증대사업은 대부분 영농의 집단화를 통해 단위생산성을 높이고자 한 것인데, 이는 소유와 경영이 개별 농가 단위로 분산돼 있는 조건에서 효과를 거두기 힘든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소득증대사업은 오랜 기간 유지되지 못했고 농민들에게는 대부분 실패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부에선 당시 생산 증대의 신화였던 ‘통일벼’를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도 꼽지만, 박정희 정부는 통일벼 개발·보급을 새마을사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했다면 농촌 인구의 이탈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1968년 전체 인구의 51.6%로 절반 이상이던 농촌인구 비율은 1979년 31.1%까지 떨어졌다. 새마을운동 직후 여론조사를 봐도, 새마을운동이 실생활에 도움이 됐다는 응답은 전체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표 참조). 도시 지역을 빼고 농촌 지역으로 한정시킨다 해도, 그 비율은 절반을 약간 넘기는 데 그쳤다.

질문3. 새마을운동에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이유는?

유신 이후 박정희 정부는 도시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처럼 거의 모든 곳에 ‘새마을’을 붙이며 긍정적 이미지를 꾀했다. 사회적으로는 ‘새마을=좋은 것’이란 여론도 부지불식간에 일정 정도 생겼을 것이다.

당시 새마을운동을 주도하고 참가했던 20~40대 젊은 층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장·노년층을 이루고 있는 현실도 무관치 않다. 나이로만 따지면야 그들이 돌아가고픈 청춘은 새마을운동 시기다. 아무리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사건이라 해도, 누군가에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추억일 수 있다. 게다가 해체된 농촌의 폐허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농민들로선, 그래도 주인공 대접을 받던 그때를 호시절로 기억하는 게 당연하다.

새마을운동에 가시적인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사·작곡한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고 시작한다. 아주 상징적이다. 초가지붕 교체, 마을안길 확장, 농로 개설, 소교량 가설, 마을회관 건설 등 분야에선 애초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일견 마을이 훨씬 개선된 것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새마을운동이 철저히 관 주도의 상명하복식 구조를 띠었음에도, 이처럼 이른바 ‘숙원사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질문4. 도로·교량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주민들이 동원되는 게 옳은가?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은 절실해 보인다. 심지어 정부에서 받아야 할 이익금을 다시 새마을운동에 투입하면서, 마을이 실질적 보상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1973년 9월 대통령 비서실 문서를 보면, 한국도로공사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고속도로 시설개량 및 조경공사’에 인근 마을들을 참여시켰다. 마을들은 도로공사로부터 받은 이익금을 각 마을에서 진행한 마을회관 건립과 교량 건설 등 ‘새마을공동사업’에 쓰기로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 아주 흡족해했다.

마을 단위 새마을운동을 주도한 새마을지도자들조차도 정규 급여를 받지 못했다. 다만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같은 곳에는 대통령과 총리 및 장관들이 와서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농민들로서는 아주 영광스런 자리였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새마을복 차림으로 정부 부처로 가서 “장관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난 경우도 있었다 한다. 우수지도자에겐 훈장과 포상, 특별지원금도 있었다. 하지만 지도자 출신의 한 농민은 “우리나라는 훈장, 상장으로다 새마을(운동) 했어”라고 자조적으로 토로한다.

김보현 성공회대 연구교수의 지적은 이렇다. “근대 국민국가(민족국가)에서라면 관련 국가기구가 조세를 재원으로 수행하리라 기대되는 각종 사업을, 일반 주민들이 거의 무상으로 자신들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금을 염출해 자조적으로 해결해내는 상황을 규범화하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농민들에게 ‘정부에 바라지 말라’고 요구한다. 새마을운동 초기인 1970년 6월10일 ‘권농일 치사’를 보자.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 농민들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가 안 했는가?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부가 도와달라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부가 농촌에 투자를 적게 한다, 곡가를 더 올려줘야 되겠다 등등 요청이 많지만, 그런 것만 해준다고 농민이 잘사는 건 아닙니다. 보다 더 부지런하게, 보다 더 열심히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써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자조정신과 자주·자립의 정신을 가지자….”

사회구조나 국가정책을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만 개조하면 된다, 곧 ‘하면 된다’는 태도, 이게 바로 새마을정신(근면·자조·협동)의 으뜸 덕목인 ‘자조’(스스로 도움)의 실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한 목사에게 “노력만 하면 성한 사람보다 더 잘살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질문5. ‘박근혜표 새마을운동’은 구체적으로 뭘까?
새마을운동은 대를 이어 우려먹는 사골곰탕인가. 서울 도심에 게양된 새마을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탁기형

새마을운동은 대를 이어 우려먹는 사골곰탕인가. 서울 도심에 게양된 새마을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탁기형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월20일 축사에서 △나눔·배려·봉사를 통해 대한민국 공동체 정신의 복원 △문화적 역량을 키워내는 운동 △지구촌 행복에 기여하는 운동 등의 항목을 언급했다. 내용은 아직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오히려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었다. 그 국민운동은 우리 국민의식을 변화시키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규정이 눈길을 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찌그러진 초가집에서 천년의 가난에 찌든” 원인이 “농민들이 자포자기와 체념에 빠져… 스스로 잘살려는 의욕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정신 개조를 해야 한다, 하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했다. 이는 공적·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일에서조차 개인에게 ‘정신머리를 뜯어고치라’고 윽박지를 수 있었던 근거였다.

그러다보니 ‘박근혜표 새마을운동’이 차라리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 게 낫겠다는 이들도 있다. 한때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목소리를 높이던 박 대통령마저 아버지와 같은 태도를 답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참고 문헌
‘유신이념의 실천도장,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용기)
‘박정희 시대 지배체제의 통치 전략과 기술’(김보현)
‘구술을 통해 본 1970년대 새마을운동’(윤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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