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일도 불분명한 사랑방이 대강 20살을 먹었다.”
‘인권운동사랑방 20년 그리고 내일’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에 실린 인권운동사랑방(사랑방) 창립 활동가 류은숙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금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독립한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로 사는 그는 얼렁뚱땅 지었다는 사랑방이란 이름에 대해선 “단체 이름 같지 않은 그런 이름을 지은 건, 처음엔 단체를 만들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체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기저기 닥쳐오는 인권 문제들은 있으니 ‘사랑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어느새 20년이 되었나봅니다.
여전히 급진적이되 새롭고자 했던…한국 인권운동 20년을 기사로 정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역사를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짧고 굵게’ 정리할 수 있나, 방황을 하다가 ‘짧고 굵게’ 정리한 글로 대체하자,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역시 류은숙 활동가의 글을 빌려옵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를 계기로 국제인권에 눈을 떴고, ‘군부독재정권하 인권 문제’를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인권을 생각하게 됐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접하면서 아동과 청소년의 인권을 도발(?)하게 됐고, ‘도덕교육을 인권교육으로’란 당돌한 구호를 외쳤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자유권만이 아니라 사회권이라는, 인권의 잃은 날개를 찾아헤맸다. 탈출자와 출소자와의 조우 때문에 수용시설의 인권을 제기하면서 피해자들에게나 당국에게나 이중으로 원망을 들어야 했다. 불심검문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성공 덕에 경찰들이 제일 싫어하는 인권단체가 됐고, 인권영화제란 걸 열어서 국정원(당시 안기부)직원까지 동반된 사무실 압수수색도 받아봤다. …13년 동안 낸 인권신문 은 13년 동안의 밤샘을 의미했다.”
인권운동사랑방 역사(특히 초기 10여 년)가 잘 정리돼 있네요. 다시, 1993년을 생각해봅니다. 네, 최근에 시작한 tvN 드라마 처럼 농구대잔치에 열광하던 시절이었지요. 저는 농구를 보는 시간이 아니면, 우울을 떨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은 서태지 노래 가사처럼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랑방 역사를 정리한 구석진 활동가는 에 실린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90년대 초반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이 잇달아 무너지고 한국 사회에서도 ‘문민정부’가 등장하는 등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공론장이 열리면서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민운동의 주류는 기존의 민중운동과는 선을 그으면서 독자적인 활동가 조직으로서 전문성으로 무장한 정책 중심 활동을 주요한 정체성으로 삼게 된다. 사랑방은 이러한 시민운동 주류의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인권운동의 전문화, 국제화, 대중화를 통해 일종의 전문적인 역량으로서 사회 변혁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20주년 기념 기사를 쓴답시고 인권활동가들을 만나면 이렇게 농담했습니다. “그러니까, 운동의 급진성을 잃지 않으면서 형식의 새로움은 추구하던 사람들이 양손에 쥐고 싶어 했던 떡이 인권운동이죠.” 사실 인권운동을 ‘편애하는’ 마음이 그랬단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권운동이, 퀴어운동이 없었다면 오늘 20주년 기사를 쓰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인권운동은 누군가에게 숨통 같은 구실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운동을 존중하지만, 우리의 삶은 갈수록 노동과 통일로는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인권운동은 그 틈새를 채우는 담론이었던 거지요.
기자들 필독지였던언젠가 이화여대에서 사랑방 활동가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에 실린 ‘20년의 발자취’를 보니, 1996년 제1회 인권영화제가 열렸던 곳이네요. 영화가 끝나고 집기 정리를 하는 사랑방 활동가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구나…’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제2회 인권영화제가 열렸던 홍익대 정문을 봉쇄한 때는, 가봐야지 하면서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경찰이 철수한 다음에 보았던 다큐 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저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아옌데, 아옌데, 민중이 당신을 지켜주리라!” 쿠데타의 그림자가 드리운 거리에서 사람들이 너나없이 구호를 외치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렇게 인권영화제는 세계로 열린 창이기도 했습니다. 첫 직장인 광고회사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1999년 말부터 15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에 실린 응원 메시지에도 썼지만, 기자(記者)는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기록할 장소와 사람을 찾는 하이에나, 기자에게 사랑방이 발간하던 은 정보의 보고였습니다. 가장 섬세하게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내고 날마다 발빠르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을 열심히 챙겨보고, 사랑방 활동가들이 갔던 곳을 다시 가고, 그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렇게만 해도 기사가 됐습니다. 나중에 에 칼럼을 쓰게 됐을 때, 진정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가끔씩 사랑방을 들락거리면서, 청소년 인권 기획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에 “좋지요”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방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인권연구소 ‘들’을 만들어 독립한 배경내 활동가는 학생 인권에 오랫동안 주력했습니다. 그는 1996년 대학 캠퍼스를 지나다 인권영화제 포스터를 보고 ‘저기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다고 합니다. 대안교육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인권이 “내가 간질간질했던 것을 설명해줄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사 논문을 끝낸 다음날 바로 사랑방으로 출근했다는군요. “모든 것을 말하기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인권을 채우고 싶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청소년 인권운동이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로 결실을 맺었을 때, 그는 가장 기뻤답니다. 2012년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서울시 의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농성장에 우연히 있었는데요. 마흔에 접어든 그가 울먹이자 제 코끝도 찡했습니다. 사실 학생인권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나이가 계급인 사회에서 너무 급진적인 의제였죠. 그래서 사랑방이 아동·청소년 인권을 말하는 것 자체가 당시엔 도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권운동은 감옥 인권, 학생 인권, 성소수자 인권 같은 의제를 통해 김정아 활동가의 말처럼 “존엄이 없다고 여겨온 이들에게 존엄을 부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랑방에서 오래 일했던 김정아 인권중심 사람 사무처장은 스스로 “평등파도, 자주파도 아닌 자유파”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꿈꾸던 그는 인권영화제 활동을 하러 왔다가 지금껏 인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권운동은 소수의 신념이 다수의 가치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이상한 이들이 하는 주장으로 여겨지고, 까칠하다는 소리도 듣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고립에 대해 말하다 “어떻게 미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미치지 않는 것보다 지치지 않는 것이 쉽지 않다”고 답합니다.
불심검문 거부, 소수자 연대, 그리고 서준식이야기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 세기가 바뀔 무렵, 불심검문 거부운동이 생각납니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감히 거부할 수 있다고 왜 진작에 생각지 못했을까요? 불심검문 거부가 법적 권리란 사실을 알리는 책자를 읽고, 가방에 배지를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요. 우리는 그렇게 공권력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있었습니다. 사랑방 최장수 활동가 최은아씨는 ‘인권침해 감시단’ 조끼를 입고 다니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21세기가 되자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인 ‘자유권’ 대신에 일할 권리와 건강할 권리를 말하는 ‘사회권’ 이야기가 부쩍 늘었습니다.
푸제온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은 다른 약에 내성이 생겨 푸제온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푸제온은 약가를 이유로 한국에 시판되지 않았습니다. 2008년 한겨울, 가브리엘이 쇠약한 몸으로 푸제온을 만든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지사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명숙 같은 사랑방 활동가들이 함께했습니다. 청소년 인권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사랑방 활동가가 됐다는 명숙은 사회권 팀에서 벌인 청소노동자 권리찾기 캠페인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를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꼽았습니다. 2000년대 후반, 사랑방 활동가 미류를 만났던 기억도 있어요. 미류를 만나서 ‘도시 재생’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사랑방은 주거권 운동의 현장으로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활동하고 있었나봅니다. 자료를 보니까 그래요. 요즘 하는 연재 ‘우리가 몰랐던 동네’에서 다룰까 하는 곳인데요, 오래전 남발했던 취재 부도수표 하나를 이제야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추리에 가지 않은 것은 게으름 탓이었습니다. 평화바람 오두희 활동가가 평택미군기지 반대운동 초기에 “대추리에 한번 와주면 좋겠다”고 전화를 했지만, “제가 문화팀이라서…” 하면서 엉덩이를 뺐었죠.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대추리를 “우리의 전성기”라고 말해요.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나왔고, 인권활동가들이 가장 뜨겁게 활동했던 때라는 거지요. 경기도 평택 대추리, 서울 용산, 제주 강정, 경남 밀양으로 이어지는 거점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요.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이 무산된 사건은 한국 인권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 단체가 아니라도 다양한 인권단체들이 반차별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으니까요. 퀴어퍼레이드에 사랑방 활동가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반차별 운동이 인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는 방증 같았어요.
지난 9월28일, 인권운동사랑방 20주년 행사는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집회처럼 치러졌습니다. 이날 유일하게 축사를 한 문정현 신부는 “사랑방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조심을 해야했다”고 돌이켰습니다. 자칫 편견이 조금이라도 비치면 득달같이 따지고 드니까요. 문 신부는 “소수자, 소수자 하는데 난 아직도 못 알아듣는 것도 많아. 배울 여지가 많다고.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 가르치려면 더 분발해야지”라고 당부했습니다. 발언 중간에 “딱 생각나는 사람, 서준식 선생” 이야기도 했지요. 1998년 당시 사랑방 서준식 대표가 쓴 는 지금도 인권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글로 남아 있습니다.
불안정 노동 현장으로 하방하기‘움직여야 모일 수 있고 모여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에서 ‘회동’으로 20주년 모임 이름을 정한 사랑방 활동가들은 이제 경기도 안산의 반월·시화 공단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올해부터 중심 사업으로 정했답니다. 가장 낮은 불안정 노동의 현장에서 고공전이 아니라 지상전을 시작하겠다는 겁니다. 20주년 기념 책자 이 사람을 조직하는 조직책이 되기를 바란다는 그들의 오늘은 이렇습니다. 류은숙 활동가는 앞서 인용한 ‘사랑방 20주년에 부치는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을 잃고 또 새로운 사람을 얻으며 그렇게 20여 년이 갔다. 끊긴 관계의 끈 저편에 있는 사람들의 땀과 고뇌를 오늘 아프게 기억한다.” 통일과 평등에 인권의 가치를 더한 그 시절 이후를 저는 1993년 체제라고 불러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규정짓는 사회적 의제의 지형이 만들어진 때이니까요.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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