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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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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네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많고, 1인 가구는 더 많고, 주민 평균연령은 50대인 떠날 수 없는 ‘종착역’…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난이 보이지 않으면 가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들
등록 2013-09-18 14:20 수정 2020-05-03 04:27

“수배자 단속 기간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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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0일, 서울역 11번 출구로 나가는 행색이 허름한 사내를 경찰이 잡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사내는 저항하지 않았다. 사내가 걸어간 11번 출구를 나가는 계단은 가파르다. 나오면 후암동 산비탈로 가는 길, 여행용 가방을 곁에 두고 술 마시는 홈리스 두엇을 보기도 어렵지 않다. 동자동 쪽방촌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이다.

추우면 춥다고 오고 더우면 덥다고 오고

이토록 드라마틱한 변화가 서울에 또 있을까. 고층 빌딩이 동자동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서울역 방향을 막아선 벽산빌딩, 건너편 서울시티타워와 STX 건물, 동네의 정면을 가리는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주상복합단지, 30층은 가뿐히 넘는 빌딩들 뒤에 700여 가구 1천여 명 주민이 서울역에서 보면 마치 없는 마을처럼 동자동에 모여산다. 그리고 여기엔 주민공동체 ‘동자동 사랑방’이 있다.

복도 양쪽에 1.5평 쪽방들이 줄지어 있는 건물은 지은 지 40~50년이 됐다. 쪽방촌 옆방은 아파트 옆집보다 부딪칠 일이 잦다. 혼자 사는 이가 많은 곳에서 이웃을 돕는 이들도 있다.

복도 양쪽에 1.5평 쪽방들이 줄지어 있는 건물은 지은 지 40~50년이 됐다. 쪽방촌 옆방은 아파트 옆집보다 부딪칠 일이 잦다. 혼자 사는 이가 많은 곳에서 이웃을 돕는 이들도 있다.

“추우면 춥다고 오고 더우면 덥다고 오고.” 동자동 사랑방 조승화 사무국장이 말했다. 언론은 동자동을 그렇게 다룬다. 주거빈곤, 노인빈곤, 우범지대, 퇴거위기…. 여기도 희로애락이 있을 터인데, 문제적 관점으로 동자동을 다룬 글은 이미 많으니 동네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동자동은 ‘우리가 몰랐던 동네’가 아니다. 쪽방에 대한 언론의 관심 덕에, 1.5평의 방에 세면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따로 부엌이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많고, 1인 가구는 더 많고, 주민 평균연령은 50대를 웃돈다. 이것도 새삼스럽지만 뉴스는 아니다. 낮부터 불콰한 얼굴로 다니는 이들, 욕을 섞어가며 싸우는 사람들, 거기에 가면 만나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마치 의 꼬리칸 사람들처럼 몸을 겨우 누일 공간에 살지만, 여기도 사람이 산다. 꼬리칸 사람들이 기차 안 쪽방에 산다면, 동자동 사람들은 기차 밖 쪽방에 산다.

“이거 먹어.” 지난 9월9일 저녁 8시, 동자동 사랑방에 몸피가 작은 할머니 한 분이 큼직한 사과를 한 알 가지고 왔다. “아니, 어머니 드세요.” “집에 반쪽 있어. 어여 먹어.” 올해로 64살인 김옥분(가명)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 “근데, 우리 옆방 할아버지가 3일째 안 들어와” 그런다. “팔십이 넘은 할아버지라 내가 가끔 들여다보고 하거든….” 조승화 사무국장은 “오늘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는 할아버지 같은데” 하면서 할머니에게 물어서 뭔가를 열심히 적는다. 그냥 들여다보았던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생면부지의 할아버지에게 밥도 대접했다. “열사흘을 밥을 안 잡숴서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도 드리고 했지.”

사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래 알아온 사이가 아니다. 함께 사는 남편이 있는 할머니는 지난 4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나마 자리잡고 살던 쪽방에서 5월 말까지 나가라고 했다. 갑자기 날아온 통고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보증금이 부족했다. “집을 보러 다니다가 주저앉아서 울었다”는 할머니는 “방 때문에 눈이 짓물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족한 보증금은 월세에서 떼어 보태기로 하고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사흘째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와 5월30일 이웃이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 밥을 대접한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나도 옛날에 부모님 모셔봤잖아”라고 답했다. 그렇게 예순의 할머니는 여든의 할아버지를 부모처럼 대했다.

9월11일, 그들의 아침상에 미역국이 올랐다. 동자동 쪽방촌 9-119번지 6호에 사는 정용수(51·가명)씨는 1호에 사는 형님을 위해 생일상을 차렸다. 2호에 사는 형님, 1호에 사는 동생, 정씨는 1살 터울의 형·동생과 피붙이는 아니지만 매일 밥상을 나눈다. 모두 심한 당뇨를 앓는 이들은 아침 8시, 점심 1시, 저녁 6시, 식사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메뉴는 대부분 우거짓국에 두부·호박 등의 반찬이다. 부식비는 한 달 46만8천원을 받는 정씨의 수급비로 충당한다. 매달 방세 17만원을 내고 가끔씩 약값도 빠지면 남는 돈이 없지만, 정씨는 “다들 어려워 식비를 따로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씨는 그나마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매달 수급비라도 받지만, 다른 한 명은 아예 수급권자도 아니고 나머지 한 명도 최근에야 수급을 받게 됐다. 그래도 정씨는 “혼자 먹다가 함께 챙기려니 힘들지만, 혼자 먹을 때보다 더 즐겁다”고 말했다.

남을 도우니 자신도 돕게 되네

이들은 지난 3월,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같은 병실에 입원한 사이로 만났다. 정씨는 폐기종에 천식에 관절염이 심해서 겨울과 봄이면 더욱 힘들다. 2호의 형님은 당뇨 합병증으로 심혈관 기관에 이상이 생겼다. 1호의 동생도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이 나빠져 부종이 심하다. 동생은 가끔 혼수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어떻게 밥을 나누게 됐느냐고 물었다. 정씨는 “급식소에 가지를 못하니까”라고 답했다. 정씨도 발목이 부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지만, 나머지 둘은 가까운 급식소에 걸어갈 힘조차 없다. 원래 같은 쪽방촌 건물에 살았지만, 서로 모르고 지냈던 이들은 퇴원 뒤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가까이 있기 위해 다른 층에 살던 형·동생이 정씨가 사는 1층으로 이사왔다. 동부시립병원 이보라 내과과장은 특별히 이들을 불러 모아 식이요법 정보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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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쪽방촌 초입의 식당가와 그 뒤로 보이는 고층 빌딩들. 골목을 올라가면 바로 쪽방촌이 나오는 변화가 매우 ‘드라마틱한’ 동네다(위). 정용수씨가 당뇨가 심한 이웃을 위해 국을 끓이고 있다. 함께 밥을 나누기 시작하니 몸도 정신도 모두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한다.

동자동 쪽방촌 초입의 식당가와 그 뒤로 보이는 고층 빌딩들. 골목을 올라가면 바로 쪽방촌이 나오는 변화가 매우 ‘드라마틱한’ 동네다(위). 정용수씨가 당뇨가 심한 이웃을 위해 국을 끓이고 있다. 함께 밥을 나누기 시작하니 몸도 정신도 모두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한다.

생면부지였지만, 함께하니 힘이 났다. 정씨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한다. 부엌이 따로 없어 흔히 ‘부르스타’라고 부르는 휴대용 가스렌지 하나로 1.5평 방에서 요리를 한다. 냉장고가 작아서 김치도 한 달에 세 번 담가야 한다. 그래도 정씨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까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하루 종일 형광등도 켜지 않고 방에서 혼자 누워 있던 날도 많았다”며 “사람과 관계가 생기니까 우울감도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자살을 생각하지 않고 우울증 약도 줄였다.

동자동 사랑방에 가면서 생긴 변화다. 정씨는 “나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누군가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니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랑방에서 현미에 채소를 먹는 식이요법 강의도 들었다. 정씨는 “우리 얘기가 동네에 퍼져서 다른 이들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몇 달, 소금과 설탕을 넣지 않은 음식을 먹으니 건강이 좋아졌다. 가끔 혼수 상태에 빠지던 동생도 요즘은 괜찮다. 셋이 서로를 챙니기 술도 많이 줄었다. 한 명은 담배도 끊었다. 남을 도우니 자신도 돕는 상태가 된 것이다. 남대문 쪽방에서 10년, 동자동에서 4년을 보낸 정씨의 일상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

생의 끝에 선 이웃을 돌보는 손길도 있다. 고독사는 쪽방촌 사람들의 공포다. 쪽방촌 주민의 90% 이상이 혼자 산다. 중병에 걸린 이도 적잖다. 동자동 사랑방 사람들은 9월 초 치른 장례식 이야기를 전했다. 사연은 요약하면 이렇다.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의 이사 한 명이 말기암 환자를 위해 헌신적 간호를 했다. 자기 일도 뒷전으로 미루면서 병원까지 가서 간호했다. 심지어 아픈 이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 싫다고 집에 돌아오자 극진한 간호를 이어갔다. 환자가 숨진 뒤에는 성당을 알아보고 화장터를 물색해서 장례 절차까지 마쳤다. 조승화 사무국장은 “아예 아프면 그분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다.

“친구도 있고 적도 있고, 왜 가?”

동자동 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에는 2011년 1월에 치른 장례식 이야기가 있다. 기사는 “쪽방 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례를 치르고 함께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훈훈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월5일,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마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장례는 쪽방에 살던 가까운 지인들 몇 분이 상주 역할을 자청하였다”고 시작한다. 이어 주민의 애도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이렇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면서 ‘마귀야, 먼저 가서 내 자리도 만들어놓고 기다려라. 나는 좀 있다 가려 한다. 마귀야 잘 가라’ 하며 눈물 담긴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시던 마귀 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형님의 노래 소리가 흐린 눈 내린 하늘 위로 날아가서 편안한 배웅을 했으리라고 본다.”

세상을 뜨면서 마침내 쪽방촌을 떠나는 이들이 있지만, “여기가 막장”이라고 하면서도 쪽방촌을 떠나기 싫어하는 이도 많다. 지난 9월10일, 동자동에 있는 서울역 쪽방상담소에 20명 가까운 주민이 모였다. 서울시 쪽방 리모델링 사업의 영향으로 살던 방에서 갑자기 이사해야 했던 이들이다. 이날 이들과 마주한 상담소 관계자는 “일부 주인과 관리인의 횡포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상담소는 쪽방 리모델링 사업을 지원하는데, 이 지원을 받는 집주인이 리모델링을 위해 주민에게 갑자기 퇴거를 통고한 것이다. 그래서 주민 30여 명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쪽방을 나왔다. 주민들이 문제제기를 하자 서울시와 상담소는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며 보상을 약속했다. 이날은 피해 주민 개별 면담을 거쳐 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날이었다. 상담소는 “현금 지원은 할 수 없다”며 매입임대주택 우선 입주를 약속했다. 매입임대주택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다가구주택 등을 구입하고 수리해 저소득층에게 임대하는 것이다. 상담소 관계자는 “매입임대주택 보증금 100만원을 무상으로 빌려준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한결같이 “누가 들어간다 그래”라고 반응했다. 상담소 직원들이 “원룸의 월세가 8만~10만원이고, 수도요금·전기요금 다 합쳐도 15만~18만원이면 된다”고 설득했지만, 주민들은 현금 보상을 요구했다. 결국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상담소 쪽이 “개별 면담을 통해 현금 보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만남은 끝났다.

이상한 일이다. 동자동 쪽방의 월세가 17만~20만원이니 상담소 제안이 솔깃할 만했다. 그러나 주민들 생각은 달랐다. 이날 만남에 주민과 함께했던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이태헌 조합장이 ‘열 받아서’ 이야기를 쏟어냈다. “아니, 친구도 있고 적도 있고 여기가 좋지, 왜 가? 가면, 주변 사람들한테 눈총 받지. 매입임대주택이 주택가 군데군데 박혀 있다고. 게다가 삼진 아웃이야. 전기요금이라도 못 내고 술 마시고 소리라도 질러봐, 3번이면 그러면 쫓겨나. 아니, 멋모르고 난방이라도 펑펑 써봐. 도시가스비만 10만원 나와. 나한테도 입주하라고 통지서가 오는데 안 가. 아까 들었지? 다 서울 외곽이야. 거기 가면 교통비도 들고, 막일 나가기도 힘들어. 혼자 있다가 고독사하기 십상이야.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니까.” 말을 쏟아내는 그에게 대안이 뭐냐고 물었다. “어디 산이라도 깎아서 임대주택을 짓고 한꺼번에 이주하게 해달란 말이야. 그러면 가지.” 동자동 쪽방촌에서 10년을 살아온 그는 ‘우리가 몰랐던 사정’을 말했다.

‘수급비는 집구석에서만 딱 먹고살기 좋다’

가난한 이들의 사정은 가난한 이들이 안다. 서로 욕하고 때로 주먹질해도 쪽방촌 주민이 도심에 모여사는 이유가 있다. 가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 비슷한 이들이 모여살고, 어디를 가도 교통이 편리하고…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이 비록 못났더라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느끼는 위로는 생각보다 컸다. 세상은 가난을 해체해서 가난이 보이지 않도록 하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가난이 보이지 않으면 가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내는 . 10여 차례 나온 신문에는 외롭고 웃기고 슬프고 눈물 나는 동자동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내는 . 10여 차례 나온 신문에는 외롭고 웃기고 슬프고 눈물 나는 동자동 이야기가 담겨 있다.

9월11일, 오전에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친 오후의 쪽방촌에 은근한 활기가 돌았다. 쌀포대를 이고 끌고 가는 이들이 여럿 보이고,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동자동 새꿈어린이공원 주변엔 자리잡고 앉아 얘기를 나누는 여성들도 보였다. 지나는 이의 손을 잡고 “떡 먹고 가, 언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쌀은 대한적십자사에서 나눠주는 추석맞이 지원 물품. 쌀인심 덕인지 동네에 화기가 돌았다. 이날 다시 만난 이태헌 조합장은 자신이 사는 쪽방 건물 앞에서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틀 전에, 불콰한 얼굴로 “아니, 돈도 안 주면서 이거 사오래” 하면서 1.5ℓ 두유병을 들고 가던 사람도 보였다. 저혈당에 시달리는 이 조합장이 혈당이 떨어질 때마다 마시는 두유를 사가지고 가던 친구였다. 10년을 한방에서 살았다는 이 조합장은 건물 3층을 가리키며 “저기가 내 방이야”라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은 폭이 8m를 넘지 않았다. 이 조합장은 “여기에만 46개, 옆 건물에 30개 쪽방이 있지”라고 말했다. 자리에 앉아 다리의 상처에 앉은 딱지를 떼는 그에게 “하지 마세요” 하자 그는 “할 일이 없잖아”라고 답했다.

수급권은 쪽방촌 주민의 생명줄이지만, 발을 묶는 밧줄이 되기도 한다. 수입이 있으면 수급을 받지 못하거나 수입만큼 수급비가 깎이기 때문이다. 2011년 5월에 발간된 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주민2: 수급비 자체는 집구석에서만 딱 먹고살기에 좋아. 그런데 수급비로는 자기 생활을 못한다는 거지. 집 외의 세상을 구경할 수가 없어. 전혀 안 되지. 돈이 없는데. 가고 싶은데 못하고. 나가서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을 찾아볼 수 없는 거지.” 2011년 11월에 발간된 에도 수급권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민 A씨: 수급자가 수급비 45만원을 받더라도 100만원 정도 되는 일을 하더라도 수급비가 깎이지 않고 수급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봐. 100만원 되는 일을 보장한다면, 이로 인해 수급비에서 몇만원 깎인다 하더라도 그 일을 왜 못하겠어. 현재 제도는 정부 정책에서 일하는 걸 막아버리니까.” 보건사회연구원 통계에 바탕하면, 쪽방촌의 기초생활수급자는 60%에 이른다. 여기엔 일을 하기 싫은 이들뿐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들도 포함돼 있다.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에 후원금을 보태 동자동 사랑방은 명절이면 동네 잔치를 벌인다. 올해도 한가위 전날인 9월17일, 동자동에서는 음식을 나누고 노래를 자랑하는 잔치가 열릴 것이다. 옆방 할아버지가 사흘째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한 김옥분 할머니도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한 끝에 “명절날 노래방 하는가”라며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구성진 가락을 뽑았다. 그리고 동자동의 누군가는 오늘도 꿈꾼다. 의 꼬리칸 사람들이 앞으로 집단이주를 단행한 것처럼, 위아래 없는 마을을 만들어 가난이 가난을 보고 웃으며 살아갈 내일을.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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