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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평화·소수자에 인권을 더했어요


성산동 마포 민중의집~망원시장·월드컵시장까지 ‘진보 지도’ 따라 걷기
등록 2013-06-20 13:51 수정 2020-05-03 04:27

흐린 기억 속의 마포는 이렇다.
몇 해 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취재하러 가는 길에 처음 망원역에 내렸다. 사회단체가 있을 만한 동네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주택가, 초행이라 설명을 들었는데도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즈음에 페미니스트들이 이 동네에 따로 또 같이 사는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성산동에 공들여 ‘나루’ 건물을 지었단 기사도 보았다. 마포 민중의집이 문을 열었단 소식도 들었다.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사무실을 서대문에서 망원동으로 옮겼다고 했다. 올해 차별금지법 좌초에 대응하는 무지개행동 긴급번개가 열린 곳도 서교동 여성노동자회 건물이었다. 홍대 근처에 가면 주눅이 드는 아저씨 일상에 자꾸만 마포가 침입했다.
주눅 들던 홍대, 일상을 파고든 마포
마포의 동쪽인 공덕동에 있는 문화연대부터 서쪽의 망원동까지 줄줄이 사회운동 단체들이 이사를 왔고 자리를 잡았다. 특히 망원동·서교동·합정동 일대에 ‘끼리끼리’ 모이는 단체가 많았다. 성적소수자문화센터에 이어 동성애자인권연대, 연분홍치마 같은 성소수자 운동 단체가 줄줄이 모였다. 사람만 친구 따라 마포 가는 것이 아니다. 단체도 친구 따라 마포 간다. 언니네트워크, 여성민우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운동 단체도 밀집했다. 전쟁없는세상에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도 근처에 있으니 평화운동의 한 축도 여기에 있다. 지난 6월5일 오후 3시, 사회단체가 어떻게 이어져 있나 거리를 걸어보았다. 얼기설기 그린 마포의 진보 지도를 따라간 마실이다. 성산동 마포 민중의집을 출발해 연남동 방향으로 걸어가니 100m 지나지 않아 시민공간 ‘나루’가 나왔다. 1층 카페, 2층 환경정의, 3층 여성민우회, 5층 함께하는시민행동. 간판에 입주한 단체 명칭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마포진보지도

마포진보지도

올해 민중의집은 점심시간에 인근 단체와 점심을 나누는 ‘만나는 밥상’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여성민우회와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두 단체 모두 여성농구팀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게임 할까? 이런 분위기로 모임은 끝났다. 나루를 지나 걷다 우회전하면 도로가 나온다. 여기부터 성미산 마을지도가 시작된다. 성미산 마을카페 ‘작은 나무’가 먼저 나오고, 길을 따라가면 두레생협·되살림 가게가 나란히 있다. 조금 지나 성미산 마을밥상도 나온다. 여기서 홍대부속여중고를 지나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으로 이어지고, 홍대부속여중고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인권중심사람’이 있다.

이날 인권중심 사람에서는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판결을 계기로 ‘소비자운동과 표현의 자유’ 토론회가 2층 다목적홀에서 열리고 있었다. 토론자인 조국 서울대 교수도 보였다. 건물 입구에 선 간판은 이곳이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날 저녁에는 장애여성공감과 전쟁없는세상이 공간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운동이 서진하고 있다”

5층에는 섬돌향린교회 사무실이 있다. 아직 공사가 채 끝나지 않아 전기톱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인권중심 사람에 들어서 김정아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을 만났다. 그는 “운동이 서진(西進)하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단체 사무실이 2000년대 초반 종로에 많았다면, 2000년대 중·후반에는 서대문 일대로 많이 옮겨갔고, 이제는 마포에 자리잡은 역사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그가 활동한 인권운동사랑방도 대학로→충정로→창전동 궤적으로 공간을 옮겼다. 대학로 시절에는 국제민주연대 같은 단체가 인권운동사랑방과 같은 건물에 있었고, 서대문 시절에는 인근에 민주노총 등이 있었다. 김 사무처장은 “동양 고전을 봐도 중원으로 가려면 북진과 동진을 하지 않느냐”며 “서진하고 있다는 것은 탈권력을 상징한

다”고 말했다.

2000년대 민주정권 시절을 거치며 사회단체가 정부를 비판하고 협의하는 ‘거버넌스’가 중요했다. 그것이 청와대, 언론사와 가까운 종로에 있어야 할 이유였다. 김 사무처장은 “이제 운동이 정치·제도의 파트너 되기에서 생태·환경의 생활 실천 중심으로 바뀐 것”이라고 마포로의 이동을 설명했다. 아마도 머나먼 망원동 물난리가 사회단체 홍수를 불렀을 것이다. 집세가 오르면서 가난한 단체들은 세가 싼 곳을 찾았다. 종로에서 마포로, 사회단체의 디아스포라가 이어졌다. 여기에 여의도 국회가 가깝다는 장점도 더해졌다. 김 사무처장은 “인권중심 사람이 오면서 여성·평화·소수자에 인권 장르가 더해졌다”며 웃었다. 지난 6월5일, 인권중심 사람에 민중의집, 동성애자인권연대, 언니네트워크, 사람과마을 등 마포 지역 활동가들이 모였다. 마포구 인권조례 초안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포구 인권조례 긴급대응 모임을 만들어, 제대로 된 조례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포에 진보 단체가 많지만, 마포구 행정은 다르다.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신청한 ‘우리가 여기에 있다’ 현수막의 게시를 마포구청은 거부했다. 그러나 그 문안 그대로 성북구·은평구 구청에 신청하자 설치 허가가 났다. 이렇게 마포구의 ‘후진’ 행정을 주민 수준에 맞추기 위해 마포의 사회운동 단체가 애쓰고 있다. 사실 서울에서 지역운동은 형용모순에 가까운데, 마포는 서울에서 지역운동이 가능한 곳이다. 마포에 유난히 굵직한 일이 많았던 것은 이런 이들이 있으니 일이 만들어졌고, 일이 있으니 사람이 더 모이는 선순환을 보여준다.

우쿨렐레, 인권영화제 티셔츠, 자전거…

다시 망원시장, 월드컵시장 골목으로 나섰다. 입구에 안심축산,친절야채 가게가 있는 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망원시장 방향으로 걷다가 가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였고, 인권중심 사람에서 상근하는 정욜씨다. 그는 “저녁에 인권중심 사람에서 박래전 열사 추모식이 있다”며 “준비할 것이 있어 시장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도 집이 여기에 있는 동네 주민이다. ‘우리 동네 燕 떡방아’에는 동물의료생협 ‘우리동생’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자 자전거 앞바구니에 우쿨렐레를 싣고 지나는 남자가 보였다. 그가 입은 티셔츠는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래된 서울인권영화제 기념 티셔츠다. , 어떤 책의 제목이 겹쳤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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