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친구 따라 마포 산다

첫 번째 ‘우리가 몰랐던 동네’, 성소수자·독립생활자·비혼여성들의 거대한 은신처 마포
등록 2013-06-20 11:55 수정 2020-05-03 04:27

그림은 “여기가 내동네”라고 말했다. 태어나서 20여 년 동안 살았던 서울 중산층 동네는 내가 사는 동네란 느낌이 없었다. “생각보다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여기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전감을 느낀다.”
올해 퀴어문화축제 성공의 이면엔 서울 마포 상인회의 협조가 있었다. 퍼레이드가 지나는 곳곳에 상인회 상가에서 내건 깃발이 보였다. 마침 축제가 시작될 무렵, 무지개가 떠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탁기형 기자

올해 퀴어문화축제 성공의 이면엔 서울 마포 상인회의 협조가 있었다. 퍼레이드가 지나는 곳곳에 상인회 상가에서 내건 깃발이 보였다. 마침 축제가 시작될 무렵, 무지개가 떠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탁기형 기자

올해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6월1일 오후 1시,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 공원 너머로 비가 내렸단 소식은 없었지만,우연히도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가 하늘에 떴다. 정말로 떴느냐, 불신하는 자에게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무지개를 보여주는 증인 앞을 ‘퀴어 천국, 불신 지옥,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십자가를 멘 퍼레이드 참가자가 지나고 있었다. 이날 무지개는 하늘에만 뜨지 않았다. 축제가 열린 홍대 걷고 싶은 거리 공원 옆 ‘명품축산’에도, 공원 뒤 ‘수정옥돌 生돼지구이’집에도, 걷고 싶은 거리 중간에 있는 ‘나루수산’에도 ‘2013 퀴어문화축제’라고 적힌 무지개 깃발이 내걸렸다. 퍼레이드가 벌어진 상가에 내걸린 깃발만 70여 개. 서울 종로에서 퍼레이드가 열렸던 지난 10여 년 시절에는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도 없었지만, 무지개 깃발을 내거는 상가도 없었다. 해마다 퍼레이드는 딩숲 사이, 공동화된 주말의 거리를 지나갔다.

그러나 이날 퍼레이드가 벌어진 거리 곳곳에서 무지개 깃발이 보였다. 홍대입구역 출구에서 닭꼬치와 사탕수수 주스를 파는 포장마차에도 깃발은 있었다. 서부지역노점상연합회 회원들이 운영하는 20여 개 포장마차가 깃발을 내건 것이다. 나루수산을 비롯해 70여 개상가에 걸린 깃발은 홍대 걷고 싶은 거리 상인들이 퀴어퍼레이드를 환영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상인들의 환대에는 마포 민중의집을 중심으로 10년 넘게 쌓아온 지역 상인들과 신뢰가 밑거름이 됐다. 민중의집은 망원동 홈플러스 입점저지 운동 등을 마포상인회와 함께했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 상인회 대표는 서교동 주민자치회의에서 주민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경찰도 쉽게 퍼레이드 허가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월드컵공원 옆에 있는 농수산물시장 상인연합회는 퍼레이드 차량을 꾸밀 공간도 내줬다. 퀴어퍼레이드 1부 축제 행사에 나온 정경섭 마포 민중의집 상임대표는 “마포를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외쳤다. 

종로에서는 2볼 수 없었던 풍경

원래 민중의집은 소수자의 집이다. 마포 민중의집은 특히 그렇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리기 전날, 민중의집에서는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마레연) 회원들이 홍보물을 오리고 붙이며 5월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LGBT,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We Are Everywhere)가 원문인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전설적 구호는 마레연 때문에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올해 퀴어문화축제 슬로건 ‘The Queer, 우리가 있다’도 여기서 나왔다. 지난해 마레연은 LGBT 아래에 ‘L 레즈비언, G 게이, B 바이섹슈얼, T 트랜스젠더’라고 친절하게 해설한 현수막을 마포 일대에 걸려고 했지만, 마포구청은 “일부 표현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며 게시를 거부했다. 마레연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냈다.

야심한 밤에, 이들이 만드는 홍보물은사람이 보기에도 좋았다. 판자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 얼굴을 넣을 수 있게 하고, 그 아래에 적은 문구는 ‘나는 에 사는 입니다’. 퍼레이드 참가까지 1박2일 놀러온 인천 사람도, 모임에 처음 온 서대문구 주민도 함께 만들었다. 지난 4월, 마포구청 앞에서 마포구 행정에 야유를 보내는 ‘야유회’를 할 때 만든, ‘한많은 동앗줄’에는 기발한 문구가 가득했다. 크레파스로 뭉크의 같은 그림을 그리고 ‘무서워하지 말아요. 해치지 않아요’라고 쓴 사람, ‘마포주민등록증 89×××××-2100000 공덕동 ×××’라고 마포 주민임을 강조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유일한 성소수자지역모임, 마레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마레연에는 레즈비언이 많은데, 게이 남성이 있어서 “어떻게 모임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30대 후반의 유누는 “마을버스 광고를 봤다”고 답했다. 마레연은 홍대 인근을 다니는 마을버스에 ‘우리 망원시장에서 마주치지 않나요’ 광고를 낸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관심이 생겨 유누는 마레연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염리동에서 30여 년을 살아온 유누는 그렇게 마레연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게이가 많은 모임에 가지 왜 여기에 오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에 오면 사람들이 ‘얘기’를 한다”고 답했다. 술만 마시는 대신 여기에 오면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여성 ‘그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외국유학을 갔다가 2011년 돌아와 마포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요즘엔 젊은이들이 부모의 집을 나와 1인 가구를 꾸리는 일을 독립생활이라 한다. 그림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이미 마포에 살고 있었다. 그림은 “여기가 내 동네”라고 말했다. 태어나서 20여 년 동안 살았던 서울 중산층 동네는 내가 사는 동네란 느낌이 없었다. 그림은 “생각보다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여기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곧 임대차 만기가 다가오지만, 그는 “전세금이 올라서 다른 친구와 합치더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그림은 명상에 관심이 많은데, 여성주의 관점을 가진 상담과 교육 연구소 ‘생기랑 마음달풀’ 같은 공간이 이곳엔 있다는 것이다.

 

게이 모임에 안 가고 마레연에 오는 이유

잠깐, 마레연의 역사를 돌아보자. 원래는 2010년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로 출발했다. 지역 선거에 성소수자 의제를 더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서로 “마포에 사는 사람들 이름 좀대봐” 했더니 100명이 넘었다. 이렇게 출발한 모임은 선거가 끝나고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로 전환했다. 지금은 400명 온라인 회원이 있고, 모임에 나오는 이들은 50명 정도다. 모두 퇴근한 시간, 직장의 프린터를 활용해 선전물을 잔뜩 출력해온 홍이는 “마포구청 때문에 너무 소문이 났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밥이나 같이 해먹자”고 모였다. 갈수록 모임이 흥하더니 이제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이 만나고 지나가는 ‘광장’이 됐다. 홍이도 성산동, 망원동, 합정동 순서로 6년을 살았다. 처음 사회운동을 하는 파트너와 함께 마포 생활을 시작했다. 왜 여기로 왔느냐고 물으니 “이유 없이 당겼다”고 말했다. 첫 집에서는 재건축한다고 1년도 못 살고 내쫓겨 급히 망원동에 반지하방을 구했다. 그는 “집은 우울했지만,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마레연 모임을 하다보면 누가 이사온다, 어떤 단체가 온다, 말을 자주 들었다.

마포 민중의집에서 만난 사람들. 정경섭 상임대표(왼쪽부터 시계방향 첫 번째), 2008년 총선에 레즈비언 후보로 출마한 최현숙씨(시계방향 맨 마지막) 등이 민중의집을 노동자와 소수자의 집으로 가꾸고 있다(왼쪽).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만든 ‘한 많은 동앗줄’, 현수막 게시를 거부한 마포구청에 대한 야유가 보인다. /정용일 기자, 탁기형 기자

마포 민중의집에서 만난 사람들. 정경섭 상임대표(왼쪽부터 시계방향 첫 번째), 2008년 총선에 레즈비언 후보로 출마한 최현숙씨(시계방향 맨 마지막) 등이 민중의집을 노동자와 소수자의 집으로 가꾸고 있다(왼쪽).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가 만든 ‘한 많은 동앗줄’, 현수막 게시를 거부한 마포구청에 대한 야유가 보인다. /정용일 기자, 탁기형 기자

2008년 총선에서 레즈비언 후보로 출마한 최현숙씨도 올해 망원동으로 이사왔다. 그가 출마한 지역구는 종로였다. 총선 뒤에도 종로에 살면서 요양보호사노동조합 만드는 일을 했지만, 지역 주민과 섞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오니 주민과 함께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민중의집을 통해 또래의 중고령 여성 노동자와 만나는 기회도 생겼다. 그는 “망원시장을 지나다 민중의집에서 같이 스트레칭 모임을 하는 엄마들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과 인사를 하면 어느새 레즈비언 커플이 “언니, 어디 가?” 묻는다. 최근 섬돌향린교회가 서교동에 세운 ‘인권중심 사람’ 건물에 입주하면서 영혼의 안식을 구할 곳도 생겼다. 그는 가톨릭 신자지만, 가끔씩 섬돌에 나간다. 임보라 목사가 이끄는 섬돌향린교회는 한국에서 성소수자에게 가장 개방적이고, 성소수자 혐오에 강하게 맞서는 교회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동네 LGBT들도 주말에 모여 위로를 받는다”고 전했다. 그렇게 같이 위로를 받는 사람 중에는 나영도 있다. 퀴어문화축제 1부 행사, 합정동 사는 나영과 상수동 사는 홀릭이 입을 맞춰 사회를 봤다. 드라큘라 복장을 한 나영은 “세계에서 오신 퀴어 여러분 여기에 모였나요?”라고 외쳤고, 홀릭은 스스로를 “마포 부치”라고 소개했다. 부치는 전통적 성별 코드로 보면, 여성성을 위반하는 레즈비언을 말한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 기사는 서울 마포에 대한 기사다. 특히 마포에서도 망원동·합정동·성산1동·상수동·연남동 즈음에 사는 비혼자들, 성소수자들 이야기다. 인종과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이 나뉘는 경우가 있는 서구와 달리 한국은 사회집단에 바탕한 거주 구분이 덜하다. 그러나 이 동네엔 나름의 ‘무지개 마을’이 만들어져 왔다. 먼저 기댈 만한 언덕인 ‘성미산 마을공동체’가 있었다. 그 옆에 따로 또 같이 사는 비혼자가 꾸준히 늘었다. 성미산 공동체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 가족’ 중심이라면, 이들 중에는 비혼여성, 성소수자가 많다. 원래 마포는 오래전부터 살아온 지역 주민이 많은 동네인데, 성미산 공동체는 물론 독립생활자, 독립예술인, 독립출판인 등이 찾아오면서 동네가 좀 바뀌었다.

2010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오김현주 진보신당 후보가 서교동·망원1동 선거구에 기초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아깝게 낙선했지만 득표율은 20%가 넘었다. 성산2동·상암동 선거구에서는 오진아 당시 진보신당 후보가 마포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투쟁을 거치며 네트워크가 엮이다

2010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오김현주 진보신당 후보가 서교동·망원1동 선거구에 기초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아깝게 낙선했지만 득표율은 20%가 넘었다. 성산2동·상암동 선거구에서는 오진아 당시 진보신당 후보가 마포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후보 최고 득표율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동네에는 남성중심·소비문화·경쟁논리 등에서 벗어난 삶을 살려는 이들이 만드는 문화가 있다. 평화·인권·여성 단체도 밀집해 있다. 지난 10년, 지역 문제가 전국 의제가 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이랜드 비정규 노조파업, 두리반 투쟁,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 홈플러스 입점반대 운동, 성미산 파괴 반대 등 굵직한 일들이 이어지며 주민이 연대한 경험이 있다. 정경섭 마포 민중의집 대표는 “다른 곳에도 단체가 많은 지역이 있지만, 여기는 투쟁을 거치면서 네트워크가 엮이고 드러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 때 진보 후보로 나섰던 김소연 선거투쟁본부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낙선인사 현수막을 내건 곳도 이 동네다. 2000년대에 시작된 2세대 여성운동(‘영 페미니스트’로도 불렸다)의 흐름을 잇는 이들이 많이 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제 여기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

6월2일 저녁 8시, 마포 민중의집에서 1인 가구 주택협동조합 첫 모임이 열렸다. 모임의 제안자인 박종숙씨가 “공공이 하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하려 한다”고 말했다. 주택정책에서 소외된 1인 가구가 스스로 대안을 마련하는 실험이란 것이다. 협동조합 출자 방식으로 n분의 1을 보증금과 월세로 납부하는 방법 등이 논의됐다. 박종숙씨는 “100을 내면 50을 대출금 이자로 갚고, 50을 출자금으로 쌓는 것이 우리의 야바위”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라마다 다른 협동조합 원칙도 소개됐는데, 스위스에서는 ‘주택을 떠날 때 최초 가격으로 상환한다. 필요보다 큰 주택을 가진 조합원은 실제 필요에 맞는 집 크기로 옮겨야 한다’고 한다. 제안자의 정리가 끝나자 모임에 나온 다양한 이들이‘오늘 왜 여기에 왔는지’ 밝혔다.

오김현주 민중의집 사무국장은 “마포에서 전세를 찾기도 힘들고, 월세도 올랐다”며 “과연 마포에서 계속 살 수 있는지, 안 된다는 확인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 중에는 공동주거를 꿈꾸거나 실현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게이타운을 모색해온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도 있었고, 성미산의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2호 ‘특집’에 함께 사는 비혼여성도 있었다. 1인 가구 협동조합을 만들려는 이유는 다양했다. 친구사이 전재우 회원은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우연히 페이스북을 보고 친구 따라 왔다는 여성은 “혼자 살기에 지치고 외롭다”고 말했다. 최초의 여성주의 의료생협 ‘은평 살림의료생협’ 회원은 “혈연은 아니지만 언니 둘과 같이 산다”며 “10년, 20년 뒤에도 지속 가능할지 고민인데, 조합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학자금을 대출받지 않았고, 차곡차곡 모아도 몇백만원에 불과하다는 여성은 “지금 청년세대에게 따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합리적이지조차 않다”며 “나의 욕망을 드러내는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30대 청년은 “지금은 월세 내는 것이 두렵지 않지만, 앞으로도 월세를 내야 하는 것은 두렵다”고 말했다. 이렇게 경제적 이유로 주택조합을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바람은 “주택 문제 앞에서 찌질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매월 두 번의 정기모임을 약속하며 이날의 모임은 끝났다.

 

만들었던 이들이 떠나지 않기 위해

모임 뒤풀이에서 스무 살 무렵의 윤희씨를 만났다. 성산동의 대안교육 배움터 ‘공간민들레’ 출신인 윤희씨는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은평구에 집을 얻었다. 민들레 시절부터 마포를 동네로 여겨서 가까이 살고 싶었다. 마포는 집세가 버거워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이면 오는 은평에 터를 잡았다. 보증금 1천만원, 월세 40만원에 방 하나, 거실 하나 있는 집이다. 친구 둘과 함께 세를 얻었지만, 한 친구가 집을 나가게 됐다. 그는 “둘이서 월세 20만원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공동체 식당인 ‘성미산 밥상’에서 일하고, 기타 강습도 뛰고, 에 그림도 그리지만 20만원은 버겁다. 윤희씨처럼 마포에서 생활하고 싶지만, 월세가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이 은평으로 집을 옮기고 있다. 원래 망원동은 침수의 영향 등으로 집세가 저렴한 동네였다. 홍대와 도심이 가깝고, 한강도 바로 앞이라 대안문화와 생태환경을 원하는 이들에게 여기는 살기 좋은 동네다. 그런 젊은이들이 모이면서 이 동네에 한국형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된 지역에 새 집단이 이주해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는 현상)이 생겼다. 덩달아 전셋집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월세가 오르면서, 이 동네를 만들었던 이들이 집세 때문에 떠나는 현상이 생겼다. 오김현주 사무국장은 “20대는 은평으로 가고, 30대는 마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묘사했다.

지난 10년, 지역문제가 전국 의제가 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이랜드 비정규 노조 파업, 두리반 투쟁,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 홈플러스 입점반대운동, 성미산 파괴 반대 등 굵직한 일들이 이어지며 주민이 연대한 경험이 있다.
‘마포FM’은 주민들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왼쪽). 최근 성산동에 자리잡은 `인권중심 사람’. 인권의 마포를 만드는 중심이 되고 있다. /김정효 기자, 손준현 기자

‘마포FM’은 주민들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왼쪽). 최근 성산동에 자리잡은 `인권중심 사람’. 인권의 마포를 만드는 중심이 되고 있다. /김정효 기자, 손준현 기자

수이나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성미산 공동체가 제주 강정을 돕는 다큐를 보았다”고 마포에 살게 된 계기를 말했다. 소비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는 그에게 이 동네는 “구구절절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반포에 살다가 성미산 마을로 이사온 홍서희씨는 “애들 때문에 온 줄 알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에게 그곳의 문화는 이질적이었다. 여기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동네다. “마포가 좋다는 기사 나가면 전세 더 올라요”라는 귀여운 타박으로 뒤풀이는 끝났다.

혹시 들어나 봤나? 비혼 페미니스트 방송 , 레즈비언 주파수의 . 마포FM의 색다른 프로그램은 동네의 비혼여성과 성소수자를 이어준다. 어언 10년 가까이 흘렀다. 2005년 최초의 레즈비언 방송 이 방송을 시작했다. 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방송하는 사람은 바뀌어도 맥은 끊기지 않았다. 을 진행하는 이난·잇지·이제는 “언니들 듣고 있나?” 물었다. 은 매주 프로그램이 바뀌는데 잇지는 첫 주에 길동과 함께 를 진행한다. 독립 생활자가 어떻게 집을 구할지 같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를 전하는 시사 프로다. 잇지는 방송의 장점으로 “급하게 와달라고 하기에 좋다”고 말했다. 방송의 게스트 ‘언니들’이 주변에 많이 살아서다. 이 난은 유일의 장수 프로그램 을 진행한다. 여성 뮤지션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음악방송이다. 경기도 광명에 사는 이난은 “집에선 잠만 잔다”고 말한다. 그처럼 주민등록이 여기가 아니어도 여기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이도 많다. 이난은 동네에서 언니들을 보고 “오늘도 다 나왔네” 할 만큼 익숙하다. 그는 “레즈 커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비비는 흉내를 내면서) 막 이런다”고 전했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 단체 대표로
이제는 마도와 함께 를 만든다. 방송 편성표 소개에 따르면 ‘비혼여성과 관련한 각종 정책, 이론 및 실질적인 생활 정보 등을 심도 있게? 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대학원 국문학 전공인 이제는 ‘비혼여성을 위한 추천도서’ 꼭지에 게스트로 나왔다 진행자가 됐다. 언니들에게 꿀 같은 정보를 전하고 싶지만, 이제는 “막 책을 읽는다”며 웃었다. 이제는 힙합팀 2LP의 멤버이자, 퀴어인문잡지 도 기획한다. 서대문에서 연남동으로 이사온 지 4개월. 연남동은 인근에서 집세가 싼 편이라 요즘 독립생활자가 많이 몰리는 지역이다. 그도 친구 따라 마포에 왔다. 10명 가까운 친구들이 같은 집에 살지는 않아도, 하루에 한 끼는 같이 먹는다. 망원시장이 가까워 장을 보기도 좋다. 자전거 타고 한강에 나가 1천원짜리 노가리 한 마리에 생맥주 한 잔을 마시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는 “신촌 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 동네로 이사하는 친구가 많다”고 전했다. 그도 맨날 여기에 놀러오다 아예 이사한 경우다.
2012년 총선 당시 마레연, 언니네트워크,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이 성소수자, 독립생활자, 비혼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유권자 모임 이름이 ‘보트피플’이었다. ‘투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 담겼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주류 질서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이들의 이름처럼 보인다. 마포는 이들의 거대한 은신처. 퀴어문화축제 당시에 떴던 희미한 무지개처럼, 잘 보면 보이는 동네다. 이렇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마을을 만든 이들이 세상과 더 가깝게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대표는 올해 마포 민중의집 공동대표가 됐다. 같이 대표를 하는 정경섭씨는 “한채윤씨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 이성애자를 포괄하는 단체에서 대표가 되는 것은 처음이 아니냐’라고 말해 감동을 주었다”고 전했다. 퀴어퍼레이드 다음날, 성미산 마을축제에 마레연이 부스를 차리고 만남을 가졌다. 이렇게 마포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무지개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966호 마포 이야기를 첫 회로 은 ‘우리가 몰랐던 동네’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다시 마을이 주목받는 시대, 한국 사회의 오늘을 반영하는 코드가 숨은 동네를 찾아가는 연재물입니다. 남들이 모르는 우리 동네를 소개하고 싶은 분들의 제보(syuk@hani.co.kr)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몰랐던 동네’는 부정기적으로 연재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