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93-151, 2층짜리 짙은 잿빛 건물 앞에서 차에 시동을 걸어보자. 헤이리 예술인마을 ‘4번 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을 하면 성동네거리가 지척이다.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돌아 직진을 하면 잠깐 만에 성동나들목에 가닿는다.
자유로를 타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보자. 15분 남짓이면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도착할 수 있다. 미리 명단을 통보했다면, 딱히 출·입경 절차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몰던 차량을 내처 몰아 5분이면 북쪽 CIQ다. 그곳에서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에 자리한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까지는 10분이면 족하다.
헤이리서 30분, 그곳에 개성공단이 있다
“여기서 공단까지 차로 30분이면 족하다. 그런 데를 석 달째 바라보고만 있다.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7월2일 오후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는 헤이리마을 매장에서 만난 김진향 케이즈원 대표는 쓴웃음부터 지었다. 20평 남짓한 매장 안에는 정장·등산복·속옷·청바지·티셔츠 등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물품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케이즈원은 성화물산·나인JIT·대명블루진스·팀스포츠·화인레나운·나인모드 등 개성공단에 입주한 6개 의류기업이 공동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개성공단 착공 10년을 맞은 지난 6월30일 인터넷 누리집(kis1.co.kr)을 개설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단다. 회사 이름인 ‘케이즈원’은 ‘Korea is One’의 약자란다. 2008년 2월부터 3년6개월 동안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기업지원부장으로 활동했던 김 대표에게 공단 입주 기업인의 근황부터 물었다.
김진향 대표가 헤이리의 케이즈원 매장에서 사진 촬영에 응했다. 케이즈원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6개 의류업체가 공동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업체다.정용일
“개성공단 통행이 제한된 게 내일(7월3일)로 만 3개월을 맞는다. 입주 기업인들이 많이 아파하고 있다. 말 그대로, 많이 아프다. 다들 몸이 성치 못한 상태다. 심리적 스트레스가 석 달이나 쌓이다보니, 다들 병원 신세를 한두 번씩은 졌다.”
불면과 두통은 기본이다. 등허리가 아파 정밀 진단을 받았더니, 난데없이 디스크 판정이 나온 이도 있다.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다보니, 대부분 50~60대인 기업인들이 ‘스트레스성 증후군’ 판정을 받는다. 김 대표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정말 그렇더라. 다들 쇠잔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인들이 신체적으로 아프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난 4월8일 개성공단 가동 잠정 중단과 북쪽 노동자 전원 철수 방침이 발표된 이후, 입주기업들의 요구는 오로지 하나였다. ‘일단 기업인들의 입·출경을 정상화해라. 재발 방지 대책을 포함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한 당국 간 회담은 그다음이다.’ 벌써 석 달째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공단은 여전히 멈춘 채다. 북도, 남도 기업인들의 애타는 심정을 몰라주기는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정부는 신변 안전 문제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개성공단 체류자 전원 철수 결정 때도, 입주 기업인들의 방북을 가로막는 명분도 신변 안전 문제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노골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기업인들 입장에선 ‘안 보내주려고 별 핑계를 다 댄다’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개성공단에 머물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이윤이 많이 난다고 해도, 신변 안전까지 감수하며 개성에서 사업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통일부 남북협력지구지원단에 딸린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누리집(kidmac.com)에는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의 결합으로 민족 공동 번영의 새 역사를 쓴 개성공업지구”란 소개글이 올라와 있다. ‘새 역사’는 지표가 잘 보여준다. 지난 1월 말을 기준으로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쪽 노동자는 5만3500여 명에 이른다.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누적 생산액도 20억달러를 돌파했다.
김 대표의 말이 아니어도, 개성공단은 한계에 이른 남쪽 중소기업엔 ‘마지막 남은 대안’이다. 공단 입주기업 123곳 가운데 73곳이 의류·봉제 업체인 것도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원이나 인디에프 등 일부 자사 브랜드가 있는 기업도 있지만, 입주기업 대부분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에 집중하고 있다. 6개 의류업체가 ‘케이즈원’으로 뭉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대표는 “최고의 품질에 아름다운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한다면, 그야말로 ‘경제민주화’가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OEM 생산은 그대로 지속하면서, 전체의 10%만이라도 자사 브랜드로 생산을 하는 게 입주기업 대부분이 갖고 있는 꿈이다. 자사 브랜드 생산이 가능해지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마진율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수요에 따라 수급 조절이 가능해지는 게 무엇보다 장점이다. 경기가 좋지 않거나 남북관계가 흔들리면 OEM 주문량이 갑자기 줄어들 때가 있다. 자사 브랜드가 있으면, 주문량에 관계없이 계속 공장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입주기업 대표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의류의 30%가량은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진다. 개성공단 업체들이 생산·납품한 상품에 유명 의류 브랜드 상표가 붙어 판매되고 있는 게다. 착공 10년 만에, 개성공단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최근 몇 년 새 ‘반값 교복’이 화두가 되고 있지 않나. 교복값을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는 비법도 바로 개성공단에 있다”고 귀띔했다.
“교복사업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거대하더라. 지역별로 대리점 등 판매망도 갖춰야 하고, 마케팅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다른 의류제품에 비해 교복의 마진율이 월등히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교복 가운데 상당량이 개성공단에서 생산된다. 통일부와 교육부 등 범정부 차원에서 협의해,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교복을 중간유통 과정 없이 소비자에게 공급한다면, ‘반값 교복’은 생각보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개성공단 정상화를 촉구하는 비상대책위 위원들이 7월3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입주기업 긴급 대책회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한겨레 이정아
7월4일 한국수출입은행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이미 개성공단 입주기업 10개 가운데 8개꼴로 남북경제협력보험(경협보험) 보험금 지급을 신청했다. 123개 입주기업 가운데 30개는 아파트형 소형 공장이다. 이들 업체 대부분은 경협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결국 입주기업 가운데 경협 보험금 지급 신청을 하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보험금을 지급받으면 공단 내 자산 소유권이 정부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보험금을 신청했으니, 입주기업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입주기업 가운데 60%가량은 국내 또는 해외에 따로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다. 나머지 40%는 개성공단에만 생산시설이 있다. 공단 폐쇄 조치가 길어지면서 대체 생산시설을 찾든, 하청공장을 찾든, 재투자를 하든, 어떻게 해서든 바이어를 붙잡아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의류·봉제 쪽은 그나마 버틸 만하단다. 벼랑 끝에 매달린 것은 전기전자·기계금속·화학 등 설비업체들이다. 한 화학업체는 도금용으로 녹여놓은 금만도 30억원어치나 된단다.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는 다른 업체는 마이크로 단위로 정밀한 금형을 따로 제작할 수가 없어 발만 구르고 있단다. 원청업체 소유의 금형을 가져다 생산해온 일부 업체는 “납품을 못하면 금형이라도 돌려달라”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단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46개 설비업체 대표들이 7월3일 성명을 내어 ‘설비 이전 불사론’을 들고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업체 대표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정말 설비를 이전하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밀성이 생명인 기계설비는 습도가 높은 장마철에 제대로 유지·관리를 못하면 고철이 되고 만다. 언제까지 이렇게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기에, 피 끓는 심정으로 설비 이전 얘기까지 꺼내든 거다. 업체 대표들로선, 그야말로 짚을 지고 불 속으로라도 들어가야 할 판이다.”
공단 입주기업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도 엇비슷하다. 협력업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공단 상주인력 800여 명과 지원인력 4천여 명 등 5천 명 남짓이 석 달째 실업 상태다. 개성에 있는 5만여 명의 북쪽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4월 말 철수한 한 입주기업 법인장의 사연을 이렇게 전했다.
“헤어지면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별일 없을 거다. 내일이면 다시 볼 거다.’ 그렇게 짧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 석 달째 못 만나고 있다. 5~8년씩 한데 어울려 지내던 사이다. 한 법인장이 그러더라. 6·25 때 이산가족들도 그렇게 헤어져 한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 아니냐고. 이젠 이산가족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기업인들은 입을 모은다. “남쪽 정부도, 북쪽 정부도 개성공단의 가치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고. 기업인들은 알고 있다. 체험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남북 당국에 이렇게 당부했다.
“초기 입주기업들은 사실 돈을 많이 벌었다. 나중에 입주한 업체들도 돈을 많이 벌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성공단의 가치는 돈이 전부가 아니다. 평화적 가치, 안보적 가치, 통일에 대비한 정치·사회적 가치도 무궁무진하다. 엄청난 순기능을 하던 개성공단을 왜 막아놓고 있는 건가?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필요하다면, 우선 개성공단부터 열면 된다. 다들 개성공단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개성공단 정상화에 남과 북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건가? 왜? 그게 답답하다. 우리 정부가 먼저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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