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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물도 식히는 사과의 기술

의사소통 전문가가 권하는 후유증 없는 사과법… 변명 덜고, 조건 없이, 신속하게 엎드려라
등록 2013-06-02 16:14 수정 2020-05-03 04:27

사과가 풍년이다. ‘승무원 폭행’ 포스코에너지, ‘대리점주 폭언’ 남양유업, ‘불산 누출’삼성전자, ‘성추행 의혹’ 청와대, ‘물량 밀어내기’ 배상면주가, ‘5·18 역사 왜곡’ 채널A 등이 연이어 사과를 하고 있다. 1인미디어·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확산되면서 힘있는 ‘갑’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입이 많아졌다. 과거였다면 숨길 수 있었던 잘못도 수면 위로 드러난다. 그만큼 사과해야 할 경우도 늘었다. ‘대국민 오디션’만큼 친숙한 ‘대국민 사과’는 2000년 이후 등장했다. 그런데 사과를 받고도 ‘짜증 지대로’인 경우가 허다하다.
미숙한 사과는 되레 피해자들의 상처와 냉소만 깊어지게 만든다. 최근 ‘그들은 과연 쿨하게 사과했을까’란 보고서를 펴낸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업체 스트래티지샐러드 정용민 대표 등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사과하고도 욕먹는 사례를 분석해보았다. 머지않아 고개를 숙일 것으로 예상되는 갑님들에게, 이른바 ‘사과의 기술’을 미리 헌정한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사과하는 기업 경영진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 왼쪽부터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배상면주가 배영호 대표. 한겨레 김정효 기자,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아 기자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사과하는 기업 경영진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 왼쪽부터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배상면주가 배영호 대표. 한겨레 김정효 기자,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아 기자

‘셀프 사과’는, 사과가 아니오

모든 기술엔 기본기가 중요하다. 사과를 왜 해야 하나. 피해를 입힌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사과의 전제 조건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도 맞물린다. 유감 표명은 사과의 시작일 뿐이며 여기에 책임 인정이 덧붙여져야 한다.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정작 상대는 사과를 못 받았다고 하면, 사과한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쏟아붓는 녹취록이 공개돼 물의를 빚은 남양유업의 경우를 살펴보자. 회사는 5월4일 ‘문제 녹취록은 3년 전 내용이며, 해당 사원은 사직서를 냈다’는 감 떨어지는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구체적인 개선책도 들어 있지 않은 급조된 사과문이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5월9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잘못된 관행인 ‘물량 밀어내기’를 인정하고 차단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대책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번엔 사과 상대를 잘못 짚었다. 피해를 입은 대리점주 대신 기자들을 불러다놓고 국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5월10일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한 이남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사과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국민 여러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청와대가 창조한 신개념 ‘셀프 사과’다.

말만으론 천냥 빚 못 갚아요

‘잘못 없다’고 해놓고 불과 4개월 만에 태도를 바꾼다면, 또 ‘잘못했다’고 해놓고 뒤에서 딴소리를 한다면?

눈치껏 ‘다단계 사과’를 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남양유업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여론이 들끓기 전, 이미 ‘사과’는 예측됐다. 지난 1월 전·현직 남양유업 대리점주들이 ‘본사가 상품을 강매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를 하자, 회사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대리점주들을 고소해버린다. 1차 사과 이후에도 ‘밀어내기는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홍원식 회장은 4월18일~5월7일 13차례에 걸쳐 회사 주식을 처분해 70여억원을 현금화해 입길에 올랐다.

“위기 관리를 철저히 했는데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뻔히 알고 있는 기업의 범죄·관행에 대해 죄송하다고 하면 누가 이해해주겠나. 개인정보 유출 사고도 비슷한데, 평소 보안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아놓고, 사후에 ‘죄송하다’고만 한다.”(정용민 대표)

여의도에도 영혼 없는 ‘짝퉁 사과’가 널려있다. ‘김태호 12번, 신재민 14번, 조현오 27번.’ 2010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들이 ‘죄송’하다고 표현한 횟수다.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달갑지 않은 사과다.

사과는 ‘무조건’입니다

“이 방송 내용으로 인해 마음을 다친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광주시민·시청자 여러분께, 만약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드립니다.”(5월21일 채널A 5·18 북한 개입설 보도 관련 사과)밑줄 그은 부분은 간단히 정리하면 ‘네가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가 된다. 사과할 때쓰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이러한 말에는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다→네가 기분 나빠할 정도의 실수나 잘못은 아니다→그럼에도 네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해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된다. 피해자를 ‘옹졸한 사람’ 만드는 사과보다는 공격에 가까운 표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방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순방 기간 중에 청와대 소속 직원의 민망하고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중략)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저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책임질 일이 있다면 결코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5월12일 허태열 비서실장 대국민 사과문 중)

허 비서실장의 사과 서두는 대통령 방미 성과를 강조하며 시작된다. 조건부 사과와 더불어 ‘실수가 있었다’는 수동형 표현도 피해야 한다. 사과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려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건 아니다’란 뉘앙스를 준다. ‘내 책임’이란 말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963호 기획2

963호 기획2

해명은 최대한 아껴주세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해명을 지체한 이유는 대통령의 방미가 계속되었고 일단 민정수석실의 조사를 받는 등 적법한 절차를 받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5월11일 윤창중 전 대변인 기자회견 중)

공개 사과를 하면서 해명이 길어지면, 사과 효과는 감소하고 ‘뻔뻔하다’는 여론이 조성될 수 있다.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문에서 ‘해명’은 전체 문장의 91%에 달한다. 물론 사실과 다른 명백한 오해가 있을 때 해명은 필요하다. 전체 문장의 25% 안팎 정도만 해명에 할애하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사과할 땐 앞뒤의 상반된 내용을 이어주는 ‘그러나’와 ‘하지만’ 같은 접속부사를 피해야 한다. 사과 뒤에 잘못한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면 되레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 사태 해결에 급급한 거짓말은 더 큰 화를 부른다. ‘숨기면 작은 것도 커지고, 밝히면 큰 것도 작아진다.’ 선진 기업의 위기 관리 원칙이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을 밝힌 건, 사건 발생 닷새만인 5월13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전했다. 이러한 조처는 최선이었을까. 김호 대표는 “대통령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여론은 대통령 입장이 궁금했을 것”이라며 “비행기에서 내려 유감 표명과 철저한 진상 조사 약속 등 간단한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분석한다. 조직 내에 세력 싸움이 존재하면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과 타이밍에도 문제가 생길수 있다. 사과 타이밍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대중을 향한 사과는 빠른 것이, 개인적 사과는 ‘상대가 분노를 식힐 시간을 준 뒤’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빠른 사과와 성급한 사과는 다르다. 남양유업과 청와대가 ‘다단계 사과’를 한 것은 성급했던 탓이다. 최악의 타이밍은 ‘사과 이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다.

사과는 누군가가 잘못을 지적해야만 나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잘못을 스스로 ‘털어내는’ 것도 좋은 타이밍이다. 만약 특정 인사가 과의 인터뷰에서 군 면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 대신 사회적 책무를 더욱 충실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가정하자. 시간이 흘러 만약 이 인사가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다면, 군 면제와 관련된 비판이 조금은 덜할것이다.

국회에서는 말뿐인 사과를 자주 볼 수 있다. 지난 4월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인사청문회 당시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 등에 대해 사과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국회에서는 말뿐인 사과를 자주 볼 수 있다. 지난 4월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인사청문회 당시의 불성실한 답변 태도 등에 대해 사과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남 탓’보단 ‘내 탓’ 하세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보자. 진심 어린 사과가 왜 그렇게 힘든 걸까. 사회심리학자들은 ‘잘못을 하고 난 뒤,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암시하는’ 자기합리화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자기합리화를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열어야 한다. ‘내 탓’보다는 ‘남 탓’이 여전히 많은 문화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은 5월13일 직원들에게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당부의 글을 보냈다. 이 메시지를 분석한 김호 대표는 “눈에 띄는 것은 글에 ‘책임’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위기 상황에서 리더가 ‘나는 처음부터 당부할 만큼 당부했는데 직원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비서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는 메시지’가 들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2002년 고 김근태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은 최고위원 경선을 위해 불법 선거자금을 썼다고 고백했다. 법적 처벌을 감수한, 정치인들에게서 보기 드문 사과였다. ‘법정 논리’도 사과를 방해한다. 삼성중공업은 2008년 충남 태안의 기름유출 사고 발생 47일 만에야 신문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였다. 큰 기업이나 고위 공무원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변호사의 조언을 받는다. 이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전략을 세워준다. 우리나라 기업들엔 후진국형 위기가 많아 잘못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도 있다. 정용민 대표는 “오너의 위기, 세금 탈루 등 범죄, 내부고발 같은 일이 터지면 여론이 어떻게 생각하든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집중한다. 이렇다보니 서비스 및 상품 품질과 관련한 문제는 기업 입장에선 ‘해프닝’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썩은 사과는 또 다른 사과를 썩게 한다. 사태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청와대나 남양유업 등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김호 대표에게 물었다.

“대통령·비서실장·비서관들이 모여 개선책을 터놓고 논의해야 한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서로 책임을 떠넘긴다. 이럴 땐 맨 위에서부터 잘못을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한 아랫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도 없다. 남양유업은 경영 개선 노력을 할 때 혼자하기보단 피해자와 여론의 신뢰를 받는 비정부기구(NGO)를 개입시키는 방안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과감한 조처를 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참고 문헌

(김호·정재승·2011), (켄 블랜차드·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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