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이다. “힘이 자꾸 빠지는 흐린 봄날에는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작은 꽃밭 하나”(김수복 ‘꽃밭’)를 갖고 싶고,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는 일은 몸에 도망 온 별 몇을 숨겨주는 일”(장석남 ‘꽃밭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꽃밭은 그런 것이다. “태어나 처음 본 것이 검푸른 바다 빛이거나 짐승의 윤기 흐르는 잔등이 아니라 과꽃이 진보라 빛 향기를 흔드는 꽃밭”이어서 “다행”(도종환 ‘꽃밭’)이다. 꽃밭은 때로 희망의 끈이고, 때론 위로의 품이며, 때론 생명의 씨다. 꽃밭은 그런 것인데, 꽃밭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꽃밭의 ‘활용’을 넘어 ‘오용’ 혹은 ‘악용’이 한창이다. 찬란한 5월의 꽃밭이 ‘미추의 경계’에 섰다.
식목일은 살려야 할 것을 심고 가꾸는 날이다. 지난 식목일 전날(4월4일) 서울 중구청은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뽑아낸 자리에 언젠가 갈아엎을 꽃들을 심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강서 신부가 “한국에서 가장 추악한 꽃밭”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이다. 천막 설치(2012년 4월5일) 1년을 하루 남기고 철거된 쌍용자동차 해고자 농성장은 지난 5월14일 사람으로 넘쳐나는 대한문 앞에서 어색하게 부유했다. 천막을 잃고 왜소해진 농성장은 꽃밭에 등 떠밀리고 행인에게 앞 떠밀렸다.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는 외국인들의 호기심과 기념촬영 중인 여고생들의 발랄함이 꽃밭 위에서 몸을 섞었다.
근래 지방자치단체와 기업들의 ‘꽃밭 애용’ 사례가 늘고 있다.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봉쇄하는 바리케이드로서다. 대한문에서 현대자동차 서울 양재동 본사로, 다시 제주도 강정마을로, 꽃밭은 홀씨를 날려 바리케이드를 퍼뜨리고 있다. 연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꽃밭 바리케이드’의 역사는 최소 수십 년을 거스른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젊은 넋 스러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학우여 보았는가 한 맺힌 눈동자.”
30여 년 전 서울대 교정에서 울려퍼진 노래다. 군가 곡조에 노랫말을 실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서울대 중앙도서관과 행정관, 인문대와 학생회관 사이를 아우르는 2천㎡ 넓이의 광장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에 분노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토론했고, 저항했으며, 울부짖었다.
1982년 4월 아크로폴리스가 장미밭으로 변했다. 학교는 “조경사업의 일환”이라며 장미 1천 그루를 심었다. 학생들은 “장미 가시로 시위를 막겠다는 뜻”이라며 반발했다. 빨간색 장미도 하얀색 장미도 아닌 ‘정치색’ 장미가 필 것이라며 학교를 비판했다. 학생들은 광장의 활짝 핀 장미를 ‘정치장미’라고 불렀다.
꽃의 아름다움 오용한 ‘공간 정치학’2년 뒤 학원자율화 조처가 시행됐다. 4월3일 학생들의 교수·학생 간담회 요구를 학교가 거부했다. 학생들이 아크로폴리스로 뛰어들었다. 피 흐르는 맨손으로 장미를 뽑았고, 뽑히지 않는 장미는 불태웠다. 학교 직원들이 뽑힌 장미를 손수레에 실어 쓰레기장으로 옮겼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이던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대)가 ‘장미전쟁’을 회고했다. “학교가 학생운동의 터전을 빼앗자 분노한 학생들이 장미를 뽑아버렸다. 그 뒤로 지금껏 아크로폴리스엔 장미가 없다”며 “화단을 이용해 집회를 막으려는 현재의 ‘공간 정치학’ 역시 꽃의 아름다움을 오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전국 농성장에서도 ‘꽃밭 전쟁’이 한창이다. 30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아크로폴리스 장미가 꽃 이파리를 바꿔 되살아나고 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기동성은 향상됐다. 크고 작은 화단에 담겨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하고 농성자들을 밀어낸다. 꽃밭에 시위를 차단당한 ‘원조’임을 자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철거민들은 항의 시위를 나갈 때마다 맞닥뜨렸던 ‘화단 방패’의 경험을 호소하고, 6월11일이면 복직 투쟁 2천 일을 맞는 재능교육 해고자들은 2010년부터 계속해온 ‘꽃과의 싸움’을 잊지 못한다. 정호희 민주노총 대변인은 “우리 사회가 30년 전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했다.
계절이 무르익자 대한문 꽃들도 왕성하게 몸을 부풀리고 있다. 큰 꽃과 작은 꽃이 ‘형’과 ‘형’을 겨루고, 붉은 꽃과 노란 꽃이 ‘색’과 ‘색’을 다툰다. 꽃들은 뿌리내린 것의 의무라는 듯 사력을 다해 화려해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반발과 문화재보호법 위반 논란에도 대한문 꽃밭은 확장하고 있다. 지난 4월17일 덕수궁 서까래 공사를 마친 뒤 중구청은 꽃밭을 넓혔다. “공사용 담장을 제거하면서 생긴 공간이 농성장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한 조처”라고 노동자들은 보고 있다. 쌍용차 해고자 유제선씨는 “화단이 덕수궁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는 문화재청 발표 직후부터 경찰이 화단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이날도 20여 명의 경찰이 농성장과 화단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등은 꽃밭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연행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 화단보안법’이란 조어가 탄생했다. 해고자들은 트위터에 “화단에 핀 꽃이 너무 아름다워 슬프다”고 썼다.
제주 강정마을에도 꽃밭이 침범했다. 강정마을 꽃밭엔 꽃이 없다. 서귀포시는 5월10일 주민들의 해군기지 공사 감시 천막을 없앤 뒤 흙을 붓고 돌덩이로 막아 70여m의 꽃밭을 조성했다. 꽃밭이라고 만들었으나 듬성듬성 심긴 것은 몇 그루의 나무뿐이다. 서귀포시는 나무 사이에 철쭉을 심으려고 시도하다 실패했다. 주민들은 ‘나무화단’은 막지 못했으나 철쭉은 막아냈다. “평생을 고기잡이로 귤농사로 살아온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눈물로 호소합니다. 마을을 잃고 싶지 않다고, 바다를 잃고 싶지 않다고, 이 따스한 모든 것을 죽여선 안 된다고.” 주민들은 각각의 나무 앞에 구속자 이름과 공사 중단 호소문을 새긴 팻말을 세웠다.
지난해 11월10일 기지 공사장 맞은편에 친 천막이 정확히 6개월 만에 강제 철거당했다. 주민 1명과 경찰관 2명이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홍기룡 제주군사기지 저지 범도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농성 천막은 공사 감시를 위한 것인 동시에 주민들의 자존심이었다. 주민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짓밟고 만들어진 화단이다. 강정의 피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꽃에서 좋은 향기가 날 리 없다”고 했다. 나무화단 현장을 지키고 있는 평화활동가 박성돈씨도 말했다. “화단을 보고 있으면 서글퍼집니다. 강정 주민들에게 화단은 꽃으로 휘두르는 채찍입니다.”
‘천막 농성장 자리 점령’이 목적인 화단은 생김새부터 엉성하다. 화단 아래 강정천은 서귀포 시민 70%가 식수로 사용하는 일급수 수원지다. 주민들은 비가 오면 토사가 유실돼 강정천이 오염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홍 집행위원장은 “서귀포시가 절대보존지역에 미칠 환경성 검토나 주민 동의 없이 화단을 만든 데 따른 검찰 고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대책위는 해군기지 공사를 감시할 민관 합동초소 설치를 시에 요구한 상태다.
5월15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도 꽃밭이었다. 현대차 건물을 넘어 농협 하나로클럽 부지 앞 전체 400여m 인도에 가로 3.5m, 세로 1.5m 정도의 직사각형 화단 40개가 줄지어 있었다. 하나로클럽 인도 한켠에선 현대차 정문 쪽에서 밀려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24일째 노숙농성 중이었다. 지난 5월6일 연행된 농성자들이 경찰서에서 밤을 보낸 뒤 이튿날 현장에 돌아오자 처음 보는 화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해고자는 “이제 꽃은 쳐다보기도 싫다”며 화단을 외면했다. 어떤 이는 화단의 모양새를 빗대 “노동자의 관”이라고 표현했다. 서초구청 쪽은 “현대차 쪽에서 놓은 화단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화단이 위치한 현대차 사옥 밖의 땅이 현대차 사유지인지 국공유지인지는 파악 못했다”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우리가 화단을 설치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만 했다.
“꽃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해고자현대차 정문 오른쪽 분수대 주위도 둥글고 네모난 대형 화분들로 촘촘했다. 콘크리트 바닥엔 나선형 철조망이 깔려 있었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통로는 건물 외벽과 같은 색깔의 컨테이너를 벽처럼 세워 이동을 막았다. 현대차 직원들이 화분과 화분, 벽과 벽, 컨테이너와 담장 사이를 날카로운 철조망으로 얽어매고 있었다. 꽃과 철조망 사이에 완전무장하고 앉은 20대 초반의 전경들이 때 이른 더위와 나른한 꽃향기 속에서 지친 몸을 기대고 졸았다. 이날 현대차 울산·아산·전주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상경투쟁이 있었다. 사옥 정문을 가로막은 수십 대의 차벽과 최루액 분사기 및 수천 명의 경찰들 사이에서 20여 명의 노숙농성자들은 옴짝달싹 못했다. 재계 2위 현대차 직원들이 두른 어깨띠에서 “노사관계 선진화로 기업경쟁력 강화”란 문구가 환했다.
김정우 지부장은 대한문 화단을 “꽃으로 치장한 국가폭력”이라고 정의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생존권을 잃고 죽어간 노동자들에겐 치명적인 독”이라고도 했다. 꽃밭이 향기 나는 소통 대신 악취 나는 바리케이드를 피워낼수록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벼랑 끝 사람들’은 꽃과 생사를 다투는 야생의 잡초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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