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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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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없는 ‘권력’이 몰고 온 황혼

등록 2012-12-04 09:36 수정 2020-05-02 19:27

“‘권력은 부패한다’ ‘단독 보수 정권은 금권에 의해 부패되기 쉽다’. 긴 시간 동안 이러한 명제와 검찰의 정의는 함께 일컬어져왔다. 그러므로 검찰에 대한 비판은, 이 정의가 정치권력에 의해 행사되지 못한 경우에 나타났다. …법의 정비, 조직의 개혁을 통해 바라는 것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정의가 아닌 새로운 시대에 즉응하여 발휘되는 살아 숨쉬는 검사의 정의와 열정이다.”

한상대 전 검찰총장

한상대 전 검찰총장

검찰을 우화로 만들어버린 촌극

2000년 최재경 검사는 일본어에 능한 후배 검사에게 한 권의 책을 번역하게 한다.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를 8년간 취재했던 기자가 쓴 책이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검사총장(한국의 검찰총장) 직할 부대는 아니지만, 한국으로 따지면 검찰총장 지시를 받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쯤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책은 일본 검찰의 간판인 도쿄지검 특수부의 위기, 그리고 당연하게도 일본 검찰의 위기를 다뤘다. 라는 제목이 붙었다.

최재경 검사는 11년 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오른다. 이명박 정부 5년이 꽉 차가는 시기였고, 중수부와 검찰은 개혁 대상 1순위에 올라 있었다. 에서 말하는 잘못된 제도에 의한 피로이든, 혹은 인사권을 쥔 청와대와 정치권의 줄세우기가 가져온 피로이든, 한국 검찰은 주저앉아버렸다.

검찰의 황혼을 보는 듯하다. 시대의 저편, 반시대적 촌극은 검찰을 우화로 만들어버렸다. 11월28일 저녁 검찰개혁 문제가 발단이 된 한상대 검찰총장과 최재경 중수부장의 유례없는 정면 충돌은 39시간 만인 11월30일 오전 10시 검찰총장의 사퇴 발표로 일단락됐다. 일선 검사들이 검찰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리고, 검찰총장을 보좌하는 대검 참모들이 총장을 찾아가 사퇴를 요구하자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니들도 같이 나가자”고 고성을 지르며 버티던 한 총장은 결국 “검찰개혁을 포함한 모든 현안을 후임자에게 맡기겠다”고 말한 뒤 물러났다. 앞서 최재경 중수부장도 “공직자로서의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며 사실상 사의를 밝혔다. 후임 검찰총장이 임명될 때까지 채동욱 대검 차장이 총장 직무를 대행한다.

대선을 앞두고 터진 김광준 검사 뇌물 사건, 서울동부지검 초임 검사의 성추문 사건으로 검찰은 궁지에 몰렸다. 몇몇 검사들의 개인적 일탈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간 쌓아놓은 검찰의 덕이 너무 얇았다. 이명박 정권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사가 쏟아져 ‘검찰 불신’이라는 사망탑이 세워져 있었다. 검찰은 지금 손에 쥔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시점이었지만, 한 총장은 그런 큰 그림을 고민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는 평이 많았다.

한 총장은 2003년까지는 법무부와 대검, 서울중앙지검 등 핵심 부서를 두루 거치며 보직 관리에 성공한 검사였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병풍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를 구속 기소했고, 이듬해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한직을 전전했다. 기회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다시 찾아왔다. 고려대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은 검찰의 주요 자리에 고려대 출신들을 잇따라 박아넣었다. 한 총장도 그중 하나였다. 검찰 인사를 쥐고 있는 법무부 검찰국장에 이어 서울고검장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다. 정치 관련 수사를 많이 맡는 서울중앙지검장이 곧바로 검찰총장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낳을 수 있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서울중앙지검장에서 검찰총장으로 직행하는 전례가 거의 없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제도 고치면 ‘제2의 한상대’ 없을까

한 총장은 이 대통령의 ‘배려’에 온몸으로 화답했다. “검찰은 체제의 수호자다. 종북좌익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가 그의 총장 취임사였다. 검찰이 ‘말아먹었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언론의 청와대 개입 사실 보도로 마지못해 재수사할 때도 한 총장은 수사에 딴죽을 거는 걸림돌을 자임했다. 이 대통령 일가의 서울 내곡동 사저 터 헐값 매입 사건 수사 때는 ‘집사’처럼 행동하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테니스 친구로 알려진 최태원 SK 회장에게는 봐주기 구형을 지시하기도 했다. 검사에게 주어진 수사와 기소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한 것이다. 그의 사퇴는 전형적인 ‘MB 검찰’의 퇴장이기도 했다.

최재경 중수부장은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한 총장에게 사실상 사퇴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임기 8개월을 지키려던 한 총장은 자신의 오른팔이자 개혁 대상 1순위인 중수부 수장에게 ‘감찰’이라는 칼을 들이댔다. 최 중수부장이 대학 동기인 김광준 검사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언론이 이른바 ‘검란’이라고 이름 붙인 사달의 출발점이었다.

이번 검란은 검찰총장 대 중수부장의 구도로 좁게 비쳐지기도 한다. 중수부 폐지를 막으려는 특수통 검사들이 일으킨 조직적 반발이라는 것이다. 검찰총장에 맞서 들고일어난 대검 간부 등 검찰의 주요 보직을 꿰찬 인사들도 모두 개혁 대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대 출신인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에서 곧바로 법무부 장관으로 몸을 옮긴 권재진 장관도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도 크다. 이명박 정권에 붙어 검찰을 이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들이라는 것이다.

검찰개혁 방안으로 중수부 폐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나 상설특검 설치, 검찰총장 후보추천회의 설치 등이 거론된다. 경찰과 수사권을 나누는 방안도 나오고 있다. 제도를 고치는 것이 방편이 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검찰이 정말로 바뀔 수 있을까. 제도만 고치면 ‘제2의 한상대’는 더 이상 없을까.

“최근 촉발된 검찰의 중립성 논란과 관련하여 실추된 검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검찰의 수장이 임명권자가 아닌 국민 앞에서 책임 있는 결단을 보여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정치적 사건 처리에 대한 중립성 논란으로 인해, 가정을 희생하고 밤을 낮 삼아 묵묵히 일해온 일선 검사들의 노고로 쌓아올린 국민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수사 일선에서는 검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수사 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시비를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검찰 수뇌부의 의지 부족뿐만 아니라 일부 간부들의 권력 지향적 성향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로, 검찰총장 임명시 인사청문회 실시, 검사 인사권의 검찰총장 이관, 공정한 검사 인사를 위한 독립된 검찰인사위원회 설치 등을 검찰총장이 스스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대선후보들 ‘사유화 않겠다’ 선언해야

검사들이 돌린 연판장 내용이지만, 2012년이 아닌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1999년에 나온 연판장이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 확보를 위한 내부 개혁을 촉구하며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13년 전 내용이지만 지금 상황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적 중립성이 문제고 제도 개혁이 문제라고 한다. 검찰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체 가운데 정치권을 빼놓을 수 없다. 정치권에 줄을 선 것은 검사들이었지만, 줄을 세운 것은 정치권이기도 했다. 대선에 나선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우선 ‘검찰을 권력의 사유물로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부터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검찰 인적 청산과 제도 개혁을 논하는 것이 순서다.

성찰 없는 13년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가져왔고 검찰의 내리막을 가져왔다. 우리나라 사람들, 검찰 때문에 참 피곤하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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