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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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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댐에서 4대강을 보다

경부고속도로·지하철1호선과 함께 박정희시대 3대 국책사업인 소양강댐 담수 40년 맞아
4대강으로 이어진 개발독재 상징
등록 2012-10-12 18:01 수정 2020-05-03 04:26
소양강댐은 흙·모래·자갈을 다져 만든 거대한 둑이다. 댐 제방에서 내려다보면 그 높이가 아찔하다. 제방 반대편에는 19억t에 달하는 물이 고여 소양호를 이룬다. 춘천/김명진 기자

소양강댐은 흙·모래·자갈을 다져 만든 거대한 둑이다. 댐 제방에서 내려다보면 그 높이가 아찔하다. 제방 반대편에는 19억t에 달하는 물이 고여 소양호를 이룬다. 춘천/김명진 기자

“우리는 지난 21일 유신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 여러분들의 절대다수의 압도적인 지지와 찬성으로 확정하였습니다. 특히 우리 강원도 지방 도민 여러분들이 다른 어느 도보다도 적극적으로 많은 지지를 해준 데 대해서 나는 대단히 감명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준공을 보게 된 이 소양강댐도 우리가 추진한 유신 과업 중에서도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신헌법이 통과된 직후 소양강 같은 계곡에 우리나라의 지도를 바꾸어놓을 만한 거창한 역사가 준공을 보게 된 데 대해서 나는 국민 여러분들과 더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력댐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됐다. 10월 유신이다.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활동은 금지됐다.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다. 모든 국민을 정치적 금치산자로 만든 뒤 치러진 그해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은 91%가 넘는 투표율, 91%가 넘는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처럼 장기 집권의 길을 시원하게 뚫어준 국민투표였다.

국민투표 나흘 뒤인 11월25일 오전, 박 대통령은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천전리에 위용을 드러낸 소양강댐 담수(물담기) 현장에서 ‘유신 과업’의 흥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수식 치사는 물길을 막은 거대한 인공물에 대한 감탄, 경제적 효과라는 개발연대의 숭고한 기대로도 가득했다. “여기, 또 하나 우리 인간이 대자연에 엄청난 도전을 하여 인간의 의지로서 자연을 극복하고 개가를 올린 산 증거를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오래전부터 4대강 유역 개발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왔습니다. …이 댐은 사력(砂礫) 공법의 댐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공사가 우리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기술로서 이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데 대해서 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29억t에 달하는 저수량을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담수를 시작한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발전 설비까지 갖추고 최종 완공된 것은 담수 시작 1년 뒤인 1973년 10월15일이다.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1970)·서울지하철1호선(1974)과 함께 박정희 시대 3대 국책사업으로 꼽힐 만큼 개발연대의 상징으로 작용해왔다. 소양강댐은 높이 123m(해발 203m), 제방 길이 530m로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한 사력댐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다. 29억t의 물이 만들어내는 수면 넓이(저수 면적)만 70km², 유역 넓이는 2703km²에 달한다. 하류인 강원도 춘천에서 상류인 인제까지 수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2억t의 농공업용수 공급 능력에 7억7천만t까지 홍수를 조절할 수 있다. 20만kW 용량 수력발전 능력까지 갖췄다(강원발전연구원,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댐 건설을 두고 수자원 확보, 홍수 조절, 전력 생산을 통해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에 기여를 했다는 평가(강원발전연구원 정책메모 ‘소양강댐 축조 40년을 앞두고’)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소양강댐이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원형질을 제공했으며, 이후 수많은 토건 판박이들을 만들어냈다는 비판도 많다. 공공재라고 할 수 있는 물 관리와 전력 생산에서 토건세력과 일부 전문가 집단, 국가의 의지가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필요한 범위를 넘어선 수많은 이주민과 환경파괴를 불러왔다. 물·전력 소비지(수도권·대도시)와 생산지(지방) 역시 과격하게 분리됐다. 이런 관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역시 ‘박정희식 시스템’의 중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3개 군, 6개 면, 37개 리 수몰, 1만8546명 이주
강원도 춘천 소양강댐 물 문화관에서는 댐 관련 사진들이 전시 중이다. 지난 10월2일 한 관광객이 소양강댐 공사 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다. 춘천/김명진 기자

강원도 춘천 소양강댐 물 문화관에서는 댐 관련 사진들이 전시 중이다. 지난 10월2일 한 관광객이 소양강댐 공사 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다. 춘천/김명진 기자

지난 10월2일 오후 2시께 소양강댐을 찾았다. 나중에 한국수자원공사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댐 수위는 184.96m, 저수량은 19억8900만t(저수율 68.6%), 물 유입량은 초당 64.4m³였다. 수치만으로는 별 감흥이 없다. 지난해 12월부터 일반에 개방된 530m에 이르는 댐 제방을 직접 걸어봐야 댐이 밀리지 않으려 떠받치고 있는 19억t짜리 거대한 물덩이를 실감할 수 있다. 커도 너무 커서 40년 동안 수문 개방은 13번밖에 하지 않았다.

소양강댐은 1967년 4월15일 첫 삽을 뜨며 착공에 들어갔다. 춘천 지역에는 이미 수도권의 전기 공급을 위한 춘천댐(1965)과 의암댐(1967)이 들어서 있었다. 담수에만 2년이 걸린 소양강댐이 들어서며 3개 군, 6개 면, 37개 리에서 50.21km²에 달하는 지역이 수몰됐다. 1만8546명(3153가구)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다. 강원발전연구원 자료를 보면, 당시 수몰지 가운데 절반이 넘는 51.9%가 논밭이었다고 한다. 이주민들에게는 가구당 평균 247만원씩 모두 78억원의 보상비가 주어졌다. 강원발전연구원은 “당시 대물보상 위주의 1회성 보상이 전부였고 낯선 곳으로 이주해 생활해야 하는 심적인 충격이 컸을 것”이라며 “보상비도 턱없이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주민이 새로 이주한 도시의 빈민계층으로 전락하게 됐다”고 했다. 수몰지 주변 역시 교통로가 끊겨 ‘육지 속 섬’이 됐다. 인구는 급감했고 낙후된 오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수몰 지역 가운데 하나인 북산면 농협조합장이었던 이승학(93)씨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때 소양강 수심이 어른 키 한 길 정도였어. 그런데 댐이 생기니까 평야는 다 물에 들어가고 높은 데만 조금 남았지. 북산면 16개 부락이 그때 잠기면서 마을 주민들은 원주도 가고 철원도 가면서 뿔뿔이 죄 헤어졌어.” 농사만 짓던 이들에게 갑자기 주어진 보상금 뭉칫돈은 어떻게 됐을까. “그때 보상금이 좋았어. 당시 논이 1평에 200~350원 했는데 평당 500원씩 곱으로 쳐줬어. 다른 데 가서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돈 가지고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은 죄다 실패하고 거지가 됐어.”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정부는 애초 평당 80~330원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이보다 5~8배 많은 보상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반발이 거세지자 일부 지역에서는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공사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주민(76)은 댐 건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았지만 반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금만 올라가면 화천댐이 있어서 댐이 어떤 건지는 사람들도 대충 알았지. 집과 논밭이 물에 잠긴다니까 아쉽기도 했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그걸 어떻게 대놓고 반대했겠나.”

30년 전 내다본 4대강 사업 처참한 결과

개발주의라는 관점에서 박정희 체제를 비판해온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강력한 국가주의에 바탕을 둔 ‘군사적 성장주의’가 소양강댐 건설에 작동했다고 지적한다. “경제성장 목표를 정해놓고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목표를 향해 총돌격”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만이 박정희의 유일한 정당성의 원천이었고, 대대적인 공업화를 위해서는 물과 전기를 대량생산해 싼값으로 공급해야 했다. 물과 전력이 필요했다지만 과연 그 당시에 수많은 이주민과 환경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소양강댐 규모의 초대형 댐이 필요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에는 자신을 ‘지도자’로서 과시하려는 박정희의 선택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홍 교수의 분석이다. 대규모 다목적댐 건설은 수도권 등 성장 거점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 전략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멀리 떨어진 하류의 편의를 위해 댐이 들어서는 상류와 송전탑이 들어서는 중간 지역이 피해를 모조리 떠안는다.

동양 최대라는 주술은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았다. 소양강댐은 가난한 주변부 나라가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훌쩍 높여놓았다. 소양강댐 건설은 이후 하나의 기점이 된다. 안동댐(1977), 대청댐(1981), 충주댐(1986), 횡성댐(2000) 등 대규모 다목적댐이 잇달아 들어섰다. 다목적댐은 현재 15개에 달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사업의 필요성을 떠받치는 거대한 조직과 전문가 집단을 길러냈다. 1967년에 만들어진 한국수자원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가 대표적이다. ‘개발’을 사명에서 떼어냈지만 틈만 나면 ‘물 부족’을 내세우며 대형 댐 건설을 통한 물 공급을 주장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4대강 사업으로 갈아탔다.

댐은 지역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을까. 1984년 춘천시에서 펴낸 를 보면 댐 건설이 지역경기 활성화에는 큰 보탬이 됐다고 한다. “춘천·의암·소양강댐 공사로 막대한 수몰 보상금이 쏟아져나오고 댐 공사 경기가 춘천시내 상가 경기에 파급되어 육림극장 넘어 논밭이 듬성하고 빈촌이 널려 있던 8호광장 일대의 부도심 건설을 재촉하게 되었다. …도시가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춘천 지방 3개 댐 건설이 경기를 주도했고….” 반면 춘천시내가 아닌 수몰 지역은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이승학씨는 소양강댐 건설이 마을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댐이 없었으면 북산면이 여기서 제일 넓었지. 그런데 댐이 들어서고 인구가 10분의 1로 줄었어. 심지어 5~6명 사는 곳도 있어.”

춘천은 댐을 통해 ‘군사 도시’에서 ‘호반의 도시’로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 그렇지만 관광도시로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춘천시가 발행한 통계 및 행정자료들은 댐 건설로 인해 형성된 호수로 인해 관광지로서의 새로운 도시 발전을 기대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곧 현실화되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댐 건설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경관을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관광도시로 정착하기 위해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음을 담론화한다. …1980년대 발간한 는 백사장이 사라지고 들판이 사라지는 등 천혜의 자연자원을 잃게 되어 댐 건설 이전의 자연이 갖는 관광적 매력에 대해 재인식하고 있다.”(유현옥, ‘1960~70년대 춘천지역민의 일상문화에 관한 연구’) 찾는 사람은커녕 관리조차 되지 않아 잡초만 수북한 자전거길과 수변공원으로 상징되는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의 처참한 결과를 30년 전에 내다본 듯하다.

‘국책사업=공익’이라는 여전한 등식

소양강댐 건설 당시를 설명하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주민 이승학씨. 이씨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만들어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춘천/김명진 기자

소양강댐 건설 당시를 설명하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주민 이승학씨. 이씨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만들어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춘천/김명진 기자

소양강댐 건설은 현대건설이 맡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시 건설본부 담당이사였다. 현대건설이 소양강댐 공사를 낙찰받는 과정에서 정치권과의 결탁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1992년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3공 초기는 정경유착보다는 정경합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식 개발독재 체제는 민주화 이후 형태와 방식에서 유순해졌다. 나름의 절차적 정당성도 갖춰갔다. 그러나 이를 떠받치고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시스템에는 변함이 없다. ‘국책사업=공익’이라는 등식이 무조건 성립하며, 여기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 공세로 치부된다. 비대한 조직을 유지해야 하는 한국수자원공사 등은 끊임없이 개발·건설 논리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토건으로 자신의 이력 대부분을 채운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로 22조원을 퍼부어 만들어낸 것이 4대강 사업이다. 녹색연합 녹색법률센터 최재홍 변호사는 “대규모 국책사업이나 정부 예산이 투입된 4대강 사업, 경인운하 등은 사업 타당성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시민·전문가들의 합리적 문제제기마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해버린다”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원전사업 역시 그 필요성이나 위험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밀어붙이기로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건설사 등 토건세력들도 가세한다. 최근 불거진 건설사들의 4대강 공사 담합 비리와 비자금 조성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다. 지난 40년간 정치인·전문가·관료·토건세력이 결합해 만들어낸 비리의 거푸집이다.

‘다 박정희 때문이다’. 나쁜 건 다 박정희 때문이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마구 유통되는 ‘개발주의의 환상’은 박정희 시절 확립된 인프라 구축 방식에 가닿는 것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소양강댐은 단순히 댐이 아니라 박정희 개발독재의 한 상징이다. 소양강댐을 통해 정권이 확보한 것은 물과 전력만이 아니다. 소양강댐으로 대표되는 전력·용수 생산 방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 시스템이다.”(홍성태)

‘고난에서 성공한 용호는 가뭄과 홍수로 폐허가 되고 사랑하던 여인마저 가난 때문에 빼앗겼던 소양강변에 10년이 지난 지금 소양강댐 공사소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1971년 MBC에서는 목요일 저녁 8시마다 드라마 이 방영됐다. 이듬해 KBS에서도 소양강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어느 공구장 집안 얘기를 다룬 드라마 가 방영됐다. 소양강을 4대강으로 바꾸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 들어 주요 방송과 신문들은 4대강 사업을 무비판적으로 홍보하는 데 바빴다.

개발과 속도와 과욕이 사람을 앞선 결과

소양강댐 건설 과정에 37명이 숨졌다. 소양강댐 정상에는 이들을 기리는 순직자 위령탑이 하나 서 있다. 40여 년 뒤 16개 보를 만드는 4대강 사업 과정에서도 20여 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개발과 속도와 과욕이 사람을 앞선 결과다. 그래서 거대한 소양호는 지금 거대한 거울이 됐다. 개발연대의 군사적 성장주의를 고스란히 되비치는.

박정희 체제의 그늘은 결코 준설되지 않는 퇴적물처럼 무겁고 질척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지역 표심을 잡으려고 토건 공약들을 들고 나올 것이다. 걱정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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