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의 위험성은 너무 많이 떠들어서 지겨울 정도다. 그럼에도 한국의 가계부채는 늘어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며 다른 나라들의 가계부채 비율은 줄어들고 있음에도 말이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위기감이 만성화된데다 나만 빚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시한폭탄 시계는 째깍째깍 간다. 가계부채가 커질수록 더 빨리, 더 걷잡을 수 없이. 제윤경 대표는 가계부채 폭탄이 터지는 시기를 “경제지표로 보면 올해 안”이라고 전망했다. 생활비 부족 탓에 악성 대출이 늘고, 이자 연체율이 오르고, 월평균 300만원 이상 소득자의 개인회생이 많아지고, 다세대·연립 경매가 증가하는 현재의 경제 현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무디스의 한국 가계부채 걱정
직장인 김형만(35·가명)씨는 매달 25∼30일만 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월급 230만원이 25일에 들어오면 신용카드사가 잽싸게 결제금을 빼간다. 늘 적자다. 세 식구 생활비가 250만원이 넘는데다, 24평형 아파트 담보대출 이자만 매달 108만원씩 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쪼들려 매달 빚을 더 내야 하고, 덩달아 이자가 늘어 생활비가 다음달에는 더 부족한 악순환이 이어진다. 결혼생활 5년 만에 대출금은 1억3천만원으로 늘었고, 급한 불을 끄느라 보험약관 대출(600만원)에 카드론(300만원)까지 받았다. 더 암담한 현실은 아파트 담보대출의 경우 이자만 내는 거치기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점이다. 이자만으로도 허덕거리는데 원리금을 상환하자니 앞이 깜깜하다. 아파트를 처분하려 해도 시세(3억원)가 자꾸 떨어지고 거래도 뚝 끊겼다.
‘가계부채 1천조원 시대’를 맞이한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국내 가계부채는 911조4천억원으로 집계됐다. 2000년(267조원)의 3.4배, 2005년(522조원)의 1.7배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81%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73%)를 훨씬 웃돈다. 유럽 재정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는 그리스(61%)보다 20%포인트나 높고, 스페인(85%)과는 비슷하다. OECD도 지난 5월24일 한국의 가계부채가 피그스(PIIGS·포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보다 높아 대책이 시급하다고 경고했다.
더 심각한 건 증가 속도다. 오름세가 가파르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6월19일 “한국의 가계부채가 걱정스러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며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금융시장 쇼크에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2006년 이후 낮아졌던 증가율이 2010년에 다시 높아져 2009년 대비 2.4포인트 오른 9.8%를 기록했다. 2010년 GDP 성장률(6.3%)보다 높을 뿐 아니라 OECD 국가 중 그리스(12.1%)와 터키(10.8%)에 이어 셋째로 높은 증가율이다. 게다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영국 등 대다수 국가가 가계부채 비율을 줄였는데도 한국은 역주행하고 있다.
가계소득이라도 늘었다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그렇지도 않다. 선대인경제전략연구소의 선대인 소장은 “이명박 정부 4년여 동안 놀랍게도 실질 가계소득은 거의 단 한 푼도 늘어나지 않았다. 부동산 부양책을 통해 부동산에 계속 돈이 잠기도록 만들고, 인위적 고환율 정책 등 재벌 독식 경제 구조를 지속했다. 외환위기 이후 소득 격차는 더 벌어져 대기업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는 동안 서민 가계는 대부분 더 가난해졌다”고 말했다.
은행이 주택대출 연장 안 해주면?
그 결과 금융권의 주택대출 만기를 연장해 이자만 내는 가계가 전체 주택대출 가계의 79%에 이른다. 7개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액 230조5천억원 가운데 182조원은 원금 상환을 하지 못하고 이자만 내고 있다. 김형만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5년의 거치기간이 끝나면 원리금 상환을 미뤄야 할 처지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25평형 아파트를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 선대인 소장은 “현재 수준의 분기별 주택대출이 지속된다면 2012년께는 거치기간 만기 도래액이 분기당 25조원을 넘어선다. 2009년의 2배 이상이 된다. 또 2015년 말에는 분기당 39조8천억원의 만기 도래액이 발생하게 된다. 만기 도래액이 한꺼번에 몰려 금융기관이 더 이상 만기를 연장해주기 어렵게 되면 원리금 상환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가계가 속출해 엄청난 주택 가격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게 뻔하다”고 전망했다.
탈출구로 제윤경 대표는 소비생활 구조조정과 빚 다이어트를 제시했다. 김형만씨의 재무 상태를 살펴본 제 대표는 소득 대비 소비지출이 비합리적으로 많다고 진단했다. 김씨가 소비를 줄이려면 월급날 빠지는 뭉칫돈, 신용카드 결제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다. “신용카드가 주는 결제 편리성이란 결국 한 달의 결제 지연일 뿐이다. 할부 구매, 리볼빙 결제 등은 빚을 늘리는 독이다. 순간의 짜릿함을 위해 마구 구매하고 후회만 남기는 악순환이다.” 최대한 현금·체크카드 결제를 우선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신용카드를 사용한다는 소비 원칙을 세우라고 조언했다. 처음 몇 달간은 예금 잔액이 부족해 체크카드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겠지만 매월 카드 결제금이 줄어들어, 어느 날 인생에서 결제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외식하는 습관도 버려야 한다. 특히 피자·통닭 등 배달 음식은 엄청나게 비싸다. 쌀 10kg을 한번에 먹어치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건강에도 좋지 않다. 또 고정 지출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정수기 등 렌털 제품 수만 줄여도 매월 5만원이 넘는 돈을 아낄 수 있다. 사용하는 전자제품이 줄면 덩달아 전기요금도 절반이 된다. 대형마트도 멀리하는 게 좋다. 마트에 가면 모든 게 필요해 보이고 모든 게 싸 보인다.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구매량이 늘고 구매 질은 떨어진다. 나중에 버리는 물건도 많아진다. 필요한 물건이 생길 때마다 생협에서 사는 게 소비 질은 높이고 충동구매는 줄이는 길이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저축을 통한 소비 구조를 만든다. 휴가비 통장, 자전거 구입 통장, 전자제품 교체 통장 등 이전에 할부로 했던 소비를 모두 단기 저축통장으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제윤경 대표는 “저축은 본래 미래 소비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제한하는 일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미래 소비를 계획하며 설레는 그 순간이다. 여행 가는 날보다 여행 가기 전날이 행복한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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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보지 못한 돈을 벌었다는 착각
소비 구조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빚 다이어트도 절실하다. 김형만씨의 경우 우선 종신보험부터 없애라고 컨설팅했다. “보험료를 매월 30만원씩 내면서, 보험 약관 대출을 받아 이자까지 내고 있다.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카드론은 신용등급에 영향을 주기에 빨리 갚아야 한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대출 이자율이 올라갈 수 있다.”
대출 담보가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아파트도 유지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4억원짜리 집을 2억원의 빚을 끼고 샀다고 치자. 그 집값이 2억원이나 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 2억원을 만져보지 못했다. 대신 100여만원의 이자만 꼬박꼬박 지불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20년 가까이 더 갚아야 한다.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벌었다고 착각한 채 매월 이자로 허덕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이자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보통 사람은 투자로 돈을 벌 수 없다. 값이 오를 때는 더 오를까봐 못 팔고, 내릴 때는 예전 향수에 못 판다. 바닥이라는 공포감을 느꼈을 때에야 손을 뗀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마찬가지다. 우리가 투자하지 않아야 승자들도 더 이상 돈을 벌 수가 없다. 자산투자 시장은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머니게임 시장이기 때문이다.”(제윤경 대표)
머니게임에서 탈출한 보통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소비 구조를 바꾸고 투자는 물론 소득의 일부를 포기했다. 외국계 보험회사의 컨설턴트인 윤용찬(43)씨는 한때 월급이 2천만원이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 밤 12시를 넘겨 집에 오는 생활이었지만 돈은 엄청나게 벌었다. 문제는 고통스러운 인간관계였다. 관계 맺는 사람들을 경제적 이득을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며 살았다. 가족이든 친구든 상관없이. 소득이 늘어나니 씀씀이도 커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가까운 사람이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그는 생활을 확 바꾸었다. 퇴근은 가능하면 일찍 하고 주말도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월급은 500만원대로 줄었다. 신용카드를 다 없애버렸다. 불필요한 금융상품도 해지했다. 그런데도 희망제작소에 매년 100만원 이상 후원금을 내고 있다. 윤용찬씨는 “예전처럼 소비하지는 못하지만 훨씬 여유롭고 행복하다. 보험 약관과 보험금 지급 규정 등을 쉽게 풀이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머니게임에서 탈출하면 행복하다대기업 디자이너로 일하던 이순희(37·가명)씨는 2010년 8월 직장생활 10년 만에 남편과 함께 사표를 냈다. 더 늦기 전에 가슴이 뛰는 삶을 시작하고 싶어졌다. 스쿠버다이빙을 좋아하는 부부는 사표를 낸 뒤 인도네시아 오지로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을 볼 수 있는 섬에서 한 달간 쉬며 수중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하루 4∼5번씩 다이빙하며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수중사진으로 엽서와 달력을 만들고, 2011년 12월12일 결혼기념일을 맞아 작은 카페에서 사진전도 열었다. 수익금은 기부했다.
또 ‘소유를 위한 소비’에서, ‘경험을 위한 소비’로 바꾸었다. 이를테면 책은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외식을 줄이고 요리하는 즐거움을 선택했다. 이순희씨는 “일상을 여행처럼 호기심을 갖고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쉼표를 찍고 나니 더불어 사는 삶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는 “생명과 교감하고 사람과 소통하며 자연에 돌려주는 삶”을 살아갈 계획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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