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님 같은 판사들이 들고일어나는 이른바 ‘사법파동’은 사법부 독립이 문제가 될 때 주로 나타났다. 정권이나 행정부와의 직접적 갈등이 원인이 되거나, 권력에 굴복한 사법부 내부의 자정 목소리가 추동해서 발생했다. 1971년 7월 잇따른 시국사건 무죄판결에 불만을 품은 검찰 공안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항소부 재판장과 배석판사, 참여서기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에 반발해 전국 법관 455명 가운데 3분의 1에 이르는 150명이 사표를 냈다. 당시 서울민사·형사지법 판사들은 ‘사법부 수호 건의문’을 채택했다(1차 사법파동).
합리적 보수 판사의 문제제기
군사정권이 물러난 뒤인 1988년 6월에는 소장판사들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을 냈다. 전국 1037명의 법관 중 280명이 동조했고, 결국 당시 대법원장의 사퇴로 이어졌다(2차 사법파동) 1993년 6월에는 판사 28명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군사정권 시절의 사법부를 비판하는 건의문을 제출해 역시 대법원장이 물러났다. 2003년 8월에는 대법원장의 새 대법관 후보자 제청 내용에 반발해 판사 144명이 대법원장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2009년 5월에는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사건 재판 개입으로 전국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열려 전체 법관 2446명의 20%가 넘는 판사들이 ‘재판권 독립 침해’라고 결의했다.
그런데 사법부 독립 침해가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판사들이 술렁이고 있다. 정부가 맺은 ‘불평등 협정’에 사법부가 나서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지방법원 부장판사의 주장에 170여 명의 법관(12월2일 오후 5시 현재)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불평등 협정이란 국회가 날치기로 처리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말한다. 김하늘(43·사법연수원 22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12월1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제안)한-미 FTA 재협상을 위한 태스크포스팀(TFT) 설치를 대법원장님께 청원하기 위하여 판사님들의 동의를 구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스스로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며”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에게 투표를 했고” “처음에는 막연하게 한-미 FTA를 찬성했었다”는 김 부장판사는, 자신의 글에서 “한-미 FTA는 여러 가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일 가능성이 있고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다. 이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사법권을 위임받아 위 조약을 포함한 법률의 최종적인 해석 권한을 가지고 있는 우리 법원에서 이제라도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려고 한다”고 썼다.
그는 △한-미 FTA로 우리나라의 모든 법률상 장벽은 제거되지만 미국의 모든 법률상 장벽은 그대로 존속 △한국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탓에 간접적으로 입은 손해까지 보상해주는 미국식 재산권 개념인 ‘간접수용’에 의한 천문학적 액수 배상 우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에 의한 사법주권 침해 △네거티브 방식(비개방 목록 표시)에 의한 개방 △역진 방지 조항 등을 들며 “한-미 FTA가 불평등 조약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됐다”고 했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란 법관에게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법관으로 하여금 (제시된 증거물의 확실성 여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할 수 있어야’ 법관은 유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김 부장판사는 85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통해 한-미 FTA가 불평등 조약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으며, 따라서 ‘유죄’라고 판결한 셈이다.
부장판사, “ISD는 사법주권 넘기는 문제”
정부 정책이나 조약도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아무리 관심이 가고 손보고 싶어도 법원이 먼저 나설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 사법적 판단을 받아보자며 법원에 송사를 제기한 다음에야 법원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실상 진두지휘하며 결론을 낸 정부 정책이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이는 한-미 FTA라는 뜨거운 주제를 판사들이 먼저 집어든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앞서 국회가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한 지난 11월22일, 최은배(45·사법연수원 22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이 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다. 공무원인 법관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두고 보수언론이 시비를 거는 와중에, 김 부장판사는 ‘사법주권 침해’라는 본질적 차원으로 논점을 이동시켰다.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최후 관문인 사법부가 한-미 FTA 문제를 손놓고 바라보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외교통상부는 김 부장판사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반박했지만, 김 부장판사는 청원서를 작성해 대법원에 제출하기로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FTA 재검토를 요구하는 판사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관심사다. 대법원은 12월2일 양 대법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법원장회의를 열어 “법관의 의견은 비록 사견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클 수 있으므로 자신의 발언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ISD와 간접수용이 한국 헌법과 충돌한다는 사실이 2007년 1월 를 통해 알려진 뒤에도 일부 변호사와 교수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사법주권 침해 문제를 지적하는 율사들의 목소리는 없었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법률 전문가 집단인 법관들의 이런 움직임은 앞으로 한-미 FTA 개정·폐기 움직임에 든든한 법적 버팀목이 돼줄 수 있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ISD는 우리 국민·기업·정부가 관련된 사건을 제3의 기관에서 다루자는 것인데, 이는 미리 검토를 했어야 한다”며 “사법주권을 넘기는 문제인데 왜 사법부에서 침묵하고 있었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대법관 후보자도 아쉬움 표해
지난 11월7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치른 김용덕 대법관 후보자도 한-미 FTA의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ISD에 대해 “우리 법 규정이 국제적 기준에 맞춰 설정돼 있고, 재판에 대한 신뢰도 역시 낮지 않은 것으로 본다. 우리 법원이 원칙적으로 배제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법원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솔직히 가슴이 좀 아프다”고 했다. 사법주권 침해는 판사들의 ‘밥그릇’ 침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한을 두고 검찰이나 국회와 싸우던 때의 작고 이기적인 밥그릇이 아니다. 전체 법관이 2700여 명에 달하는 점에 비춰 한-미 FTA 재검토를 요구하는 판사들의 목소리는 아직은 작아 보인다. 스스로의 밥그릇을 깨는 ‘파동’은 언제나 작은 물결에서 시작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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