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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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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몇번째 죽음을 보아야 하는가

쌍용차 출신 낙인에 재취업도 못했던 희망퇴직자 김씨의 17번째 죽음…죽음이 죽음을 부를까 두려워 세상에 알리지조차 못한 16번째 죽음도 있어
등록 2011-10-19 14:20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10월12일 열린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 김아무개(35)씨의 영결식 도중 한 조문객이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2009년 파업 이후 17명째 쌍용차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세상을 등졌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제공

» 지난 10월12일 열린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 김아무개(35)씨의 영결식 도중 한 조문객이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2009년 파업 이후 17명째 쌍용차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세상을 등졌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제공

수백 개에 달하던 연락처를 지우고 지웠다. 끝내 지우지 못한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 그것이 세상과의 마지막 끈이었을까. 유서는 이미 1년 전에 썼다. 15층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그날 죽음을 결심한 그를 부둥켜안고 내려온 건 어머니였다. 그 뒤로 그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지난 10월10일 새벽 5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밥을 차렸다. 재취업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집을 비워야 했다. 그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비웠다. 오후 3시. 김아무개(35)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집에서였다. 그는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였다.

“쌍용차 이력을 지우라”

친구들이 말하는 김씨는 평범했다. ‘착했다, 명랑했다’는 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가 직업훈련원을 거쳐 2000년 쌍용차에 입사했다. ‘최고의 직장’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를 홀로 키워온 어머니의 자랑이기도 했다. 11년 동안 쌍용차 조립 공정 등에서 일한 김씨는 동료들과 어울리며 더 착하고 더 명랑해졌다. 월급날이면 친구와 동료들에게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사던 그는 우리가 흔히 아는, 동네에서, 직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인생에 단 하나의 사건이라면 2009년 여름, 77일에 걸친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50여 일을 동료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던 김씨는 경찰의 강제 진압이 있기 하루 전날 공장에서 나왔다. 희망퇴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쌍용차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를 추천해준 경찰 출신 지인의 만류와 어머니의 설득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건 짐작일 뿐 김씨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다.

결국 김씨가 동료들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말만 퇴직을 희망한 것일 뿐 그는 원래의 일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퇴직금 2천여만원은 생활비로 소진됐다. 정신을 차린 김씨가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10년 넘는 대기업 경력으로 협력업체에 취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줄 알았다. “차라리 여행도 다니고 쉬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곧 취직할 것”이라며 자신 있게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취직하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쌍용차에서 협력업체를 압박해 인근 지역에서는 취업이 안 된다는 소문으로 그 이유를 짐작할 뿐이었다. 실제로 협력업체에 이력서를 넣었다가 해당 업체에 다니는 지인으로부터 “쌍용차 이력을 지우라”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그 업체에서도 그는 일하지 못했다. 묵묵히 일해온 11년의 경력은 그에게 족쇄가 됐다. 다른 일을 찾으려고도 했지만 30대 중반에 다른 일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 저 세상으로 가버린 동료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동료들에게 “강제 진압 하루 전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나왔다”고 고백했다. 동료들은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달랬다. 하지만 김씨의 고백과 동료들의 위로는 때를 놓친 듯 깊어진 마음의 병은 낫지 않았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

장례식이 끝나고 평택시의 김씨 집을 찾았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씨 어머니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삼갔다.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김씨 어머니는 “지금 와서 무슨 소용입니까. 이제 그만하시죠”라며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평택시의 한 허름한 아파트, 김씨의 집을 올려다봤다. 어머니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은 여전히 ‘금쪽같은 내 새끼’로 돼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심장이 멈춰도 이렇게 아플 것 같진 않아’라는 컬러링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런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에 묻힌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이 벌써 17명째. “소용없다”는 어머니의 푸념이 틀리지 않다. “해서 뭘 어떻게 하겠느냐”는 어머니의 원망에 답하기 힘들다.

16번째의 죽음은 알려지지도 않았다. 지난 10월4일 ㄱ씨는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워 목숨을 끊었다. ㄱ씨는 2009년 파업에서 해고되지 않은 이른바 ‘살아남은 자’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관계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갈라놓으려는 회유와 협박 등이 계속돼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산 자들의 죽음도 이어지고 있다”며 17번째 희생자가 나온 뒤 뒤늦게 보도자료를 냈다.

“연이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것은 아닌지 하는 너무나 두려운 마음에 16번째 죽음에 대해서는 그 흔한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지만 2009년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전염되고 진화한다. 그 상처는 희망퇴직자, 무급자, 정리해고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로 옮아간다. 세상을 등진 사람이 올해 들어서만 6명째다.

지난 4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금속노조가 발표한 쌍용차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52.3%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고, 80%는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2년 전인 2009년 9월 같은 단체가 조사한 결과와 비교해보면, PTSD는 42.8%에서 52.3%로, 중등도 이상 우울 증상자는 71%에서 80%로 높아졌다(869호 포토² ‘차마 잠들지 못하는 희망’ 참조). 김씨와 같은 희망퇴직자는 2026명이다. 정리해고자는 159명, 무급휴직자는 461명이다.

‘함께 서고’의 ‘함께’는 누구인가?

쌍용자동차의 사정은 어떨까. 쌍용그룹에서 1997년 대우그룹으로, 중국 상하이차에서 인도 마힌드라그룹으로 운영자가 바뀌었다. 부침을 겪던 실적은 올해 들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1만 대를 넘어선 이후 5개월 연속 1만 대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끊겼던 수출길도 열렸다. 연말이면 러시아·중남미·중국 등의 수출을 재개한다. 최근 공장마다 슬로건이 걸렸다.

‘바로 서고, 함께 서고, 다시 서자.’

슬로건은 슬로건일 뿐이다. 쌍용차 정문에서는 오늘도 해고자의 1인시위가 열린다. 나아진 사정과는 달리 2년 전 노사협상에서 약속한 무급휴직자 복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회사에 남은 사람이나 남지 못한 사람이나 쌍용차 노조의 단체 문자나 전자우편의 신호음에 불길함이 담긴 지 오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예 확인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죽은 자, 살아남은 자, 그들의 가족들이 겪어온 아픔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평택=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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