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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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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공정택? 혹은 노무현?

곽노현 거취 두고 사퇴론·사퇴반대론으로 갈리는 범진보… 검찰에 대한 불신 불거지며 정당별로 정치적 셈법 분주
등록 2011-09-08 15:43 수정 2020-05-03 04:26
10일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로 수감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10일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로 수감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말과 태도가 복잡하다. ‘범진보’ 내부에서 특히 그렇다.

“도덕성 문제라면 이념에 상관없이 진보건 보수건 적용해달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우리 헌법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헌법의 원칙에 대해 존중하면 안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혐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만둬라? 정말 위험한 인간 존엄에 대한 파괴라고 생각합니다.”(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 9월1일 문화방송 발언)

“곽노현 상식적으로 사퇴해야”

“일반 시민 중 상당수는 2억원의 돈을 후보 단일화 과정에 대한 대가성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법원의 판결까지 기다리지 말고 시민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따라 교육감직을 사퇴하고, 자연인 신분으로 법적 판단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2010 서울교육감 시민선택’ 8월29일 논평)

“지금 여러 보도나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정확하게 사실에 기초하는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에 근거해서 사퇴를 하라고 주장하는 건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고 봅니다.”(동훈찬 전교조 대변인 9월1일 평화방송 라디오)

“저희들은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사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정상적으로 수행이 어렵다,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정장선 민주당 사무총장 8월31일 한국방송 라디오)

“우선 사퇴부터 하라는 아우성 속에는 진보 진영 전체를 위한 심려도, 진보 인사에 대한 동지적 애정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다시 검찰-조·중·동 프레임에 놀아나면서 알량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알리바이를 입증하려는 속셈, 혹은 약삭빠른 정치공학적 계산만 엿보일 뿐이다. 그렇게 사나운 사자떼의 공격 앞에 동지를 던져놓고 평온한 풀뜯기로 돌아간다 한들 사자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강기석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편집위원장 8월31일 기고)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10·26 재보선의 주요 변수가 됐다. 그가 대표하는 가치와 정책, 그의 거취 모두 논쟁 대상이다. 그를 비판해온 한나라당과 보수주의자들은 물론, 진보 진영 안에서도 그를 두고 견해가 갈린다. 논쟁은 교육감직 사퇴 여부에서부터 벌어진다.

사퇴론자들은 곽 교육감이 2억원을 건넨 사실을 시인한 상황에서 이미 교육감직 수행이 불가능할 만큼 도덕성에 상처를 입었다는 근거를 내세운다. 지난 8월29일 사퇴 논평을 낸 ‘2010 서울교육감 시민선택’은 지난해 서울교육감 선거 당시 정책 선거를 유도한다는 취지로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좋은교사운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학부모, 교사, 시민단체가 모여 결성한 단체다. 이들은 8월29일 논평에서 “곽 교육감이 추진하고 있는 교육혁신 사업들은 엄격한 도덕성에 바탕을 둔 권위와 이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위에서 가능한 것인데, 지금은 이 근본이 무너진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상황 판단의 근거로 그들은 ‘일반 시민의 눈높이’를 제시했다. 사법부의 판단과 별개로 “시민들이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취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세 연상케 해”

도덕적 원칙주의도 사퇴론에 깔려 있다.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부패를 비판했던 잣대를 곽 교육감에게 적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취지다. 뇌물 수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공정택 전 교육감이 기소되기 전 시점인 2008년 10월께 여러 시민단체, 민주당 등 야당은 공 전 교육감의 사퇴를 주장했다. 등 여러 언론도 사설 등에서 사퇴를 촉구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8월31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 점을 지목했다. “공 전 교육감 비리 때 민주당 지도부가 어떻게 했는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민주당 등 야 3당 의원들이 공 전 교육감을 방문해서 사퇴 촉구도 했고, 청문회를 하지 않으면 국회 교육과학위원회를 열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이 하루 만에 돌변해서 곽 교육감을 비호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다.” 남경필 의원도 “검찰 피의사실 공표는 없어져야 한다”면서도 “이것 때문에 모든 진실 자체가 잘못됐다, 수사 자체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곽 교육감 사퇴를 요구했다.

민주당 내 사퇴론자들은 여기에 정치적 판단을 더한다.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것이 서울시장 보선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고민이 깔려 있다. 곽 교육감의 사퇴를 주장한 정장선 민주당 사무총장은 8월31일 한국방송 라디오에서 주민투표 결과와 곽 교육감 의혹이 재보선에 끼칠 영향에 대해 “무상급식 문제는 야당한테 유리하고 교육감 문제는 여당한테 유리하지 않겠느냐, 이런 훈수들이 많다”고 밝혔다. 사건 초기 손학규 대표, 박지원 의원 등도 곽 교육감을 비판하며 선을 그었다.

‘지금 시점에서 사퇴 반대’ 반론도 격렬하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 전병헌 의원, 최재천 전 의원,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어준 총수 등이 한목소리로 현 시점에서의 사퇴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무죄추정 원칙 존중, 검찰 수사의 정치적 의도 등이 주로 근거로 제기된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9월1일 열린 ‘혁신과 통합 정치투어 콘서트’에서 “유죄가 확정된 바 없는데 사퇴를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정국에 부담이 된다고 사퇴하라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검찰의 수사 발표, 그리고 진보·보수를 막론한 대부분의 언론이 그에 기반해 작성한 기사가 본질적으로 형법상 피의사실 공표죄이며 무죄추정의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취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와 이번 사건을 비교하는 주장이 거듭 나오는 이유다. 백낙청 명예교수도 9월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요즘 검찰과 거대신문들이 함께 그(곽 교육감)를 압박해가는 양상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공세를 연상케 하는 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검찰의 범죄 수사 보도, 경제인 비리 수사 보도 때와 달리, 정치적 사건의 경우 검찰과 언론의 취재 관행이 도드라지게 비판받는다.

등 진보매체에 대한 비난도 나왔다. 김어준 총수는 8월29일 국민참여당이 진행하는 인터넷방송 에서 “진보 미디어가 자기들끼리 물어뜯는다. 미디어 입장에서 ‘우리 편도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미디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피해를 입을까봐) 비겁해서 그렇다”며 사퇴 반대 주장을 펼쳤다. 유사한 취지의 견해가 트위터에 많았다.

‘호재’에 분주해진 한나라당

헌법 정신을 지키자는 목소리 밑에는 이명박 정권 이후 검찰 수사에 대한 짙은 불신이 깔려 있다. 검찰이 돈의 흐름을 인지한 시점이 올해 초인데 무상급식 투표 직후 언론 보도를 계기로 수사가 급하게 진행된 점, 곽 교육감 보도가 나온 직후 검찰이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71)씨를 불러 조사한 점 등이 지적된다. 최재천 전 의원은 곽 교육감 수사에 대해 “한나라당이 하는 다른 방식의 정치, 검찰을 동원하는 정치”라고 표현했다. 표적·기획 수사라는 취지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도 8월26일 트위터에서 “작년 교육감 선거 관련해서 검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보도. 주민투표 직후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절묘한지. 만약 수사가 지지부진하면 검찰 역시 정권 교체의 일등 공신 반열에 들어갈 듯. 아니 이미 여러 차례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으니…”라고 말했다. 그는 “제 말의 요체는 타이밍”이라며 “시장선거를 망가뜨리겠다고 작정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죠”라고 덧붙였다.

곽 교육감은 계획된 일정을 매일 소화하며 현 시점에서 사퇴할 뜻이 없음을 사실상 밝혔다. 곽 교육감 사건이 올해 하반기 재보선과 내년 총선에 미칠 정치적 파급력을 두고 여야의 계산도 덩달아 빨라졌다. 한나라당에서 호재임을 부인하는 견해는 많지 않다.

홍준표 대표는 8월29일 최고위원회에서 “재보선 판이 커졌다. 재보선 기획단을 구성하기로 했다”며 곽 교육감 사퇴를 기정사실화했다. 지도부는 김정권 사무총장과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 주호영 인재영입위원장 등 5~6명으로 재보선 기획단을 꾸리고 5명으로 이뤄졌던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도 진영 의원 등을 추가해 7명으로 보강했다. 이런 움직임은 정국이 ‘오세훈의 패배’가 ‘곽노현의 위기’로 급속히 바뀌었다는 계산에서 나온다. 야권의 단일화 전략도 함께 비판했다. 김기현 한나라당 대변인은 8월30일 브리핑에서 “진보 단일 후보, 반부패 혁신전문가, 법치주의의 전사 등 청렴·쇄신 이미지를 부각시킨 곽노현 교육감은 국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위한 추잡한 물밑 거래를 진행했다”고 비난했다. ‘야권 단일화=더러운 거래’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계산된 비난으로 풀이된다.

야당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야권통합 후보 선출 등을 통해 정국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는 8월31일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사퇴에 반대하면서도 “우선 서울시장 선거에 대해서 이미 지금은 그렇게 무턱대고 낙관하는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았다”고 잘라 말했다. “(곽 교육감을) 감싸지도 내치지도 못하고 문제다”라는 말도 민주당 안에서 흘러나온다. 곽 교육감이 민주당 소속이 아닌데도 그의 발언과 거취가 선거에 영향을 주므로 거리를 둬야 하지만, 검찰의 수사 의도도 믿을 수 없다는 딜레마가 이 발언에 깔려 있다.

민주당, “단일화·복지 밀고 나갈 것”

민주당은 야권 단일화와 복지 이슈 등을 다시 핵심 의제로 삼을 방침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8월30일 열린 의원 워크숍에서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민주·진보 진영 통합의 출발점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며 “야 4당과 시민사회 대표들이 조속히 회동해 서울시장 통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8월3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곽 교육감의 처신을 둘러싼 정치·도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향한 서울시민들의 뜻을 왜곡해선 안 된다”며 “반복지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물리치고 복지의 길을 지켜주신 서울시민들의 뜻을 민주당이 확고히 지켜내는 것이 민주당의 시대적 책무”라고 밝혔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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