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울지 않는다. 소녀도 울지 않는다. 엄마도 울지 않는다. “아빠가 저 위에 있는데 불안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예슬(16)이는 야무진 얼굴로 답했다. “이것보다 안 좋은 일도 많았는데요.” “예전에 아빠가 구속되고 그랬을 때요?” 고1 예슬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982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이래로 해고 2번, 구속 2번을 당한 아빠, 박성호씨의 딸인 예슬이는 조용한 얼굴로 묵묵히 크레인 앞을 지킬 뿐이다. 박성호씨는 박영제·신동순·정홍형씨와 함께 크레인 중간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을 지키고 있다.
울지 못하는 가족들
제3차 희망버스가 부산에 갔던 7월30일, 슬옹(15)이도 누나 예슬이와 함께 아침에 크레인 앞으로 왔다. 아빠와 잠깐 통화도 했다. 경남 김해의 한진중공업 사원아파트에 사는 줄 알고 물었다. “친구들이 아빠 얘기 물어보지 않아요?” 슬옹이는 “지난해 남해로 집을 지어 이사 와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해의 집은 짓다가 말았다. “정리해고 때문에”라고 슬옹이는 말했다. 짓다 만 집에 “그래도 살 공간이 있다”고 덧붙였다. 아빠는 지난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인터넷 기관지에 기고한 글에서 “어릴 때는 어떤 집회든지 마다하지 않고 다니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절대 따라가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썼다. 그랬던 슬옹이도 요즘엔 꼬박꼬박 엄마를 따라 크레인 앞에 온다.
엄마 정만심씨는 크레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애들하고 오면 (남편)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갑니다”라고 말했다. 가족이 자리잡은 크레인 앞에서 목사님·신부님·스님들이 차례로 예배를 드리고, 미사를 보고,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경찰의 봉쇄에 막혔던 스님들이 크레인 앞에 나타나자 엄마는 합장한 손을 얼른 풀어서 박수를 쳤다. “정말로 좋다”고 탄식하듯 혼잣말도 했다.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의례가 이어지는 가운데 잠깐 앞으로 불려나간 엄마가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빚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소녀도 소년도 엄마도 울지 않았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선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이날 운 좋게 85호 크레인 앞에 갔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희망버스를 타고, 중간 집결지인 부산 영도 성당에서 가장 먼저 나선 덕분에 경찰의 봉쇄를 피했다. 그래도 두어 번 검문에 걸렸지만 기자 신분증을 이용해 통과했다. 85호 크레인 맞은편, 신도브래뉴아파트 입구에서 200여 명의 사람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서 박성호씨 가족을 만났다. 이날 저녁 7시께 먼저 개신교 목사들이 예배를 드렸다. 목사는 “예수님의 기막힌 반전, 부활”을 말했다. 그는 “김진숙씨와 정리해고 문제도 그처럼 기막힌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 일어나 “김진숙님, 사랑합니다”를 외치자 85호 크레인 위에서 작은 불빛이 큰 원을 그렸다.
다음은 예불을 드릴 차례였으나 경찰 검문에 막혀 스님들이 오지 못했다. 신부들이 먼저 미사를 올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이끄는 미사가 한창인 가운데 돌아간줄 알았던 스님들이 도착했다. 신부가 “업종 변경해야겠다”고 말하자, 스님이 “우리가 미사의 일부”라고 답했다. 어렵게 도착한 85호 크레인 앞에서 신부는 “교황 바오로 2세가 처음 방문하는 곳에 가면 땅에 키스를 하듯이 나도 여기에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모두들 어렵게 모인 곳에서 종교의 벽을 넘어선 희망의 염을 지폈다.
종교의식이 끝나고 크레인 위에 남편을 둔 사람을 또 만났다. 크레인 중간에 올라간 ‘사천왕’ 중 한 명인 신동순씨의 아내 조은순씨였다. 마침 이날은 한진중공업이 해고자 가족에게 사원아파트에서 나가라고 한 때였다. 조씨에게 “쫓아내지 않더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퇴거 통지서가 왔는데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쌍용자동차 사택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한진중공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대책위원회 도경정 위원장은 “서울에서 출발한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이 희망자전거를 타고 김해의 사원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던 날, 이를 울며 지켜보는 이웃이 2명 있었다”고 전했다.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떠나는 이웃의 ‘언니들’이었다. 도 위원장은 “그분들은 ‘다시는 이런 일 없이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전했다.
딸의 연행, 아들의 면회지난 7월9일 제2차 희망버스가 온 날은 가족들도 ‘잊지 못할’ 날로 남았다. 엄마와 딸은 연행되고 아들은 아버지를 면회하러 왔다. 2차 희망버스가 온 날, 정만심씨와 예슬이는 경찰에 연행돼 다음날 새벽까지 경찰서에 있었다. 엄마는 “경찰차 안에서 예슬이가 묵비권을 행사하니 경찰이 ‘25살로 추정되는 여자’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당시 중학생 아들 슬옹이는 경찰의 물대포에 놀라 멀리 대형마트 앞까지 도망갔다. 손이 떨려서 엄마한테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 조은순씨는 “입대 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2차) 희망버스가 온 날 여기에 왔다”며 “군대 간 아들이 크레인에 올라간 아버지를 면회온 셈”이라고 말했다.
미사를 마친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 그들은 제3차 희망버스 승객이 모인 곳으로 떠났지만, 가족들은 크레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어두워 크레인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도 차마 떠나지 못했다.
부산=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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