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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희망이여 단결하라

희망버스 수괴로 몰려 검거 전담반이 쫓는 시인 송경동… 소년원과 공사판을 전전하던 사내는 어떻게 거리의 시인으로 단련됐나
등록 2011-08-10 08:04 수정 2020-05-02 19:26
제2차 희망의 버스가 부산 영도를 찾은 지난 7월10일 새벽, 송경동 시인이 도로를 막고 선 경찰 차단벽 앞에서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제2차 희망의 버스가 부산 영도를 찾은 지난 7월10일 새벽, 송경동 시인이 도로를 막고 선 경찰 차단벽 앞에서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시인은 수배 중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두 다리 건너 ‘선’이 닿았다. 12시간 만이었다. 이틀 뒤 약속한 장소로 그가 나왔다. 한겨레신문사 근처 서울 효창공원 옆 기사식당쯤에서 몇 번은 마주친 듯한, 털털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지난 7월27일 체포영장이 떨어진 그에겐 수사관 10여 명으로 꾸려진 검거 전담반이 따라붙고 있다. 폼 나는 필화(筆禍)에 연루돼서가 아니다. ‘희망의 버스’를 기획하고, 한진중공업 앞 ‘불법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다. 정부는 그에게 ‘전문 시위꾼’이란 낙인을 찍어둔 지 오래다. 거리의 시인, 송경동(44)이다.

정부는 벌을, 문단은 상을 주고

“체포영장요? 길 떠나는 사람처럼 담담합니다. 기쁘기까지 해요. 똑바로 산다는 칭찬 같아서.”

영장을 받아놓고도 ‘심간 편하게’ 웃는 시인은 이미 여러 차례 경찰서 신세를 졌다. 구속영장이 기각돼 유치장을 나온 것만 3번이다. 2008년 기륭전자 농성을 돕다가 2번, 2009년 서울 용산 참사 대책위에서 활동하다가 1번. 소환당한 횟수는 더 많다. 불법집회를 열고, 폭력시위를 선동했다는 혐의가 대부분이다. 소환장이 세 차례, 네 차례 날아들어도 버텼다. 내 발로는 안 갈 테니 와서 잡아가라고, 집회장 마이크를 잡고 바득바득 악을 썼다.

정부는 벌을 주려는데, 문단은 상을 줬다. 지난해 천상병문학상을 받았고, 올해는 신동엽창작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천상병문학상 시상식 날에는 오전엔 기륭전자 관련 재판정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고, 오후엔 상금 500만원을 받기도 했다. “상금이 200만원밖에 남지 않아 주변에 술 한잔 제대로 못 샀다”는 시인은 “상을 받는 자리는 왠지 불편하고, 심드렁하고, 재미도 없고, 남의 자리에 선 듯 민망하지만 벌을 받는 자리는 내 자리같이 편하고, 재밌고, 신이 난다”고 했다.

문제적 기질은 어릴 적부터 농후했다. 바닷가 꼬막집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집 나가 몇 날째 공산(空山) 달 밑에 숨어 사꾸라의 꿈을 좇고” 어머니는 “멍든 보자기에 초승달만 한 세간을 싸서 이고” 집 나가기 일쑤였다(‘어린 날의 궁전’). 오일장터 똥방골목에서 “포주들 밤 놀잇감 되던 비럼벅수” 거시기를 작대기로 희롱하거나(‘동지섣달 꽃 본 듯이’) “꼬막처럼 닫힌 속살 열지 않던 짜디짠 벌교 가시내” 뒤꽁무닐 쫓으며(‘읍내 형수’) 사춘기를 보낸 뒤, 고교 진학을 위해 광주로 올라왔다. 교내 문예반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장터거리 촌놈의 열등감은 그를 다시 거리로 내몰았다. 부나방처럼 뒷골목을 쏘다니며 주먹을 휘두르고 돈을 뺏었다. 위악과 자학의 나날이었다. 2번의 무기정학으로 고교 생활을 마감했다. 전주소년원에서 2년을 살았다.

출소해서도 ‘반건달’ 생활을 한동안 이어갔다. “어디서도 환대받을 수 없는 낙인찍힌 인생이었다”고 시인은 회고했다. 서울에 올라와 술집 삐끼, 파친코 종업원을 전전했다. 서울 종로 ‘하꼬방’(판잣집) 인쇄소의 ‘조하이공’(인쇄된 종이를 차례대로 모으는 일을 하는 이)으로 달력을 찍어내기도 했다. 일에 지칠 때면 인쇄소 환풍기 창 너머로 종묘 뜰을 내려다보며 “오백 년도 넘게 푸르른 단풍나무들처럼 살고 싶었”(‘나는 지금도 그 뜰에 가고 싶다’)던 청년은 결국 ‘평범한 삶’을 찾아 낙향을 결행한다.

“위악적으로 사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자신한테 미안해지고. 처음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향에 내려갔지요. 근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가까운 순천의 ‘노가다’ 현장에 나갔어요. 건설일용직 노동자가 된 겁니다.”

» 한겨레21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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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이시영, 정희성

힘들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이어지는 아파트 공사장의 형틀 목공일은 20대 초반의 청년에게도 버거웠다. 좀더 수월한 일거리를 찾아 전남 여천의 석유화학단지로 갔다. 배관조공을 거쳐 정식 배관사가 됐다. 용접일도 배웠다. 기술이 생기니 갈 곳이 많았다. 광양제철소 2기 공사현장을 거쳐 종합화학단지 건설이 한창인 충남 서산으로 갔다.

“전국 곳곳에서 1만5천 명이 넘는 노가다꾼들이 서산 간척지로 몰려들었습니다. 용접공, 배관공, 비계공. 그 사람들이 들어갈 기숙사를 허허벌판에 만들어놓았는데, 장관이었죠. 우린 거기를 ‘한국의 엘도라도’라고 불렀습니다.”

남들이 마다하는 잔업·철야를 도맡아 했다. 출근카드 도장 채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빚더미 다방 레지(종업원)’를 만나 짧은 사랑도 나누었지만, “일이 줄고 노임이 깎이고/ 태업을 하자거나 스트라이크를 하자거나/ 수군거리는 소리로 숙소동이 들썩거려도 다 뒷전”(‘그해 겨울 돗곳’)이던 시절이었다.

만근(滿勤) 찍는 보람으로 버티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수로 교통사고를 냈고, 합의금을 지불하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허망했다. 다시는 돈을 좇아 살지 말자 다짐했다. 무엇을 할까. 중학교 때 백일장 숙제로 쓴 ‘봄비’라는 시로 난생처음 선생님께 칭찬받은 일이 떠올랐다. 글을 쓰기로 했다. 바닥생활 이야기, 일하며 만난 사람 이야기. 고향의 아버지한테 4만원을 빌려 서울행 버스를 탔다. 1992년이었다.

서울은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낮엔 5·6·7호선 공사현장에서 용접을 하고, 밤이면 쪽방에 돌아와 촛불 켜고 시를 썼다. 그러다 임헌영(현 역사문제연구소장)이 교장으로 있던 한길문학학교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김남주, 이시영, 정희성 시인에게 2년 동안 시를 배웠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구로노동자문학회였다. 노동시를 본격적으로 쓰면서 사회운동가, 문화활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시절의 친구들을 추억하며 쓴 시가 첫 시집 에서도 절창으로 꼽히는 ‘오거리 뼈해장국’이다.

“네가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리봉으로 와. 아무도 없는 술집에서 뼈해장국 시키면/ 거기 네 설움이 울대째 넘어온 듯/ 퉁명스러운 감자 몇 알이 묻어나올 거야// 때 타고 흙먼지 묻었지만/ 씻겨놓고 보면 말갛던 네 옛 친구들이/ 퍽퍽하니 목에 메일지도 몰라/ 어우러져 한솥 펄펄 끓었어도/ 제각기 자란 토양 달라 한 맛 내기 쉽잖던 시절/ 왜 우린 서로 뼈처럼 단단해지기만을 바랐을까//…”

‘근육이 꿈틀대는 검은 시’

십수 년을 운동단체 실무자로 살면서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에겐 ‘박노해, 백무산을 잇는 현장시인’이란 평가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런 평이 그는 썩 달갑지 않다. 오히려 “반성해야할 일”이라고 말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절대다수가 노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그들의 꿈을 이야기하는 작품과 작가들이 많아져야죠. ‘너밖에 없다’ ‘고생한다’ 이런 말 듣고 기분이 좋다면, 저는 나쁜 놈입니다.”

하지만 그는 박노해와 백무산, 김남주가 시를 쓰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스승 김남주의 장례식을 회상하며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고 고백하는 시 ‘김남주를 묻던 날’에서도 이런 정서가 짙게 배어난다.

“그분들이 시를 쓰던 때는 행복한 시대였습니다. 보이지 않던 노동자계급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고, 그들의 구실이 무엇이고, 꿈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문학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더 민주화되고 더 평등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한 때, 그분들이 선도한 문학적 흐름이 거세돼버렸다는 건 부끄럽고 슬픈 일입니다.”

» 한겨레21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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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의 시를 일러 ‘정직하고 근육이 꿈틀대는 시’라고 말한다. 실제 그의 시 곳곳에선 과도한 수사와 기교에 대한 거부감이 직설적으로 표현돼 있다. 용역잡부들이 탄 승합차를 보면서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 그들을 그릴 수가 없다”(‘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나 “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찬 시들을 보면/ 벌목해버리고 싶은 충동”(‘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를 베어버리라’)이라고 말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 하지만 그가 은유와 상징이라는 시인의 무기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사물의 본질에 육박하지 않으면서 ‘비틀고, 꼬고, 뒤집는’ 말장난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송경동의 시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몸의 시학’ ‘거리의 시학’이다. 그가 쓰고 싶은 시는 구둣방 사내의 무뎌진 손톱 밑에 박힌 “검은 시”이며, 미싱사 가족이 베어먹는 단무지 조각에 스민 “짜디짠 눈물의 시”이고, 급식소 안 노숙인 행렬 속에 숨은 “직립의 시”이자, 저물녘 시장 상인의 ‘떨이요’ 외침 속에 담긴 “절규의 시”다(‘가두의 시’). 그가 김진숙을 외롭게 버려두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김진숙의 삶 속에 자신이 시를 통해 이야기해온 고통과 절규와 자존과 꿈들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가 ‘수괴’로 몰린 희망의 버스도 시작은 단순했다. 김진숙의 농성이 100일을 향해 가던 즈음,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등과 이야기하다가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김진숙은 얼마나 힘들겠나. 장기 투쟁하는 쌍용차, 재능교육, 발레오공조, 콜트·콜텍, 우리라도 가자. 몇 명이 되든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해서 떠난 게 1차에 750명, 2차에 1만 명, 3차에 1만5천 명이었다.

“4차요? 반드시 떠납니다. 4차 버스가 결의되고 떠나는 순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김진숙 살리자고, 한진 문제 하나 해결하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이 사회는 글러먹었어, 안 될 거야 하는 패배주의를 넘어,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자신감, 일하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되찾아주자는 겁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붙여진 ‘거리의 시인’이란 칭호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에게 거리란 어떤 곳인가. 시인의 답변엔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다른 세계를 향한 꿈과 상상, 새로운 법과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는 희망의 공간.”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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