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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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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커리 키우는 언니에게

소심한 시민 선우씨는 왜 푸른 것들 키우는 진숙 언니를 찾아갔나…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진숙씨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2차를 꿈꾸며
등록 2011-06-22 16:49 수정 2020-05-03 04:26
‘희망의 버스’의 희망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김진숙은 ‘당연한 폭력’의 산을 넘어 치커리와 상추를 품에 안고 사뿐히 계단을 지르밟고 내려올 것이다. 한겨레21 김경호

‘희망의 버스’의 희망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김진숙은 ‘당연한 폭력’의 산을 넘어 치커리와 상추를 품에 안고 사뿐히 계단을 지르밟고 내려올 것이다. 한겨레21 김경호

그녀의 치커리 때문이다. 강원도에 사는 내가 멀고 먼 부산까지 희망 버스를 타고 간 것은. 그녀 이름 뒤에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라는 직함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나는 민주노총 깃발이 휘날리는 집회장엔 갈 생각이 없다. 수직적 위계가 감지되는 어떤 조직도 나는 부담스럽다. 그러니 그녀의 이름 뒤에 붙어 있는 ‘지도위원’이라는 말은 내 혀에 붙지 않는다. 내게 그녀는 그냥 김진숙씨, 혹은 김진숙 언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쉰두 살 먹은 그 언니가 85호 타워크레인에 오른 지 100일째 되는 날, 크레인 위에서 푸른 것들을 심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 치커리·상추·방울토마토와 딸기를 심었습니다….” 그녀가 허공에서 어린 식물들을 심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미소와 함께 눈물이 터졌다. 어린 싹들과 함께 그녀가 끝내 찾으려 하는 희망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싸워야 하는 깊은 고독이 사무쳤다. 그즈음이었다, 그녀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그래…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기 쉬운데, 진짜로 부산까지 가게 되었다. 퍽 소심한 시민 선우씨는 왜 부산까지 기어코 진숙씨를 보러 갔는가. 라는 책을 통해 그녀를 처음 알았다. 투박하면서도 진실을 향해 곧바로 돌진해오는 글들을 가슴 뻐근하게 읽으며 ‘이 사람, 진짜로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스스로 고공에 오르고, 사연 많은 85호 크레인 고공 절벽에서 온몸으로 희망을, 사랑을, 인간에 대한 한 가닥 신뢰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한 여자. 최대한 그녀 가까이 가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둥글게 올려 하트를 만들고 사랑한다고 외쳐주고 싶었다. 힘내라고, 혼자가 아니라고,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버스 안내양부터 안 해본 노동이 없는 진숙씨는 스물한 살부터 조선소의 용접공으로 일해온 노동자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성실하게 일하는 동료들의 땀내 나는 등에서 ‘소금꽃’을 보던 여자. 최악의 조건에서도 노동자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산 한 여자가 홀로 35m 크레인에 올라간 지 160일이 가까워지는데, 대화를 좀 하자는 이 노동자의 요청을 시종 묵묵부답으로 짓뭉개는 거만한 자본이 끔찍해서 갔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래…, 싶은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마음으로 갔다. 절벽 끝에 강아지가 매달려 있어도 살리러 가는 게 인지상정인데, 사람이 매달려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철옹성이다. 해고했으니 나가야 법에 맞는 거고, 사람 쓰다가 수지가 안 맞으면 버리는 거야 기업 입장에선 당연한 건데, 그런 당연 앞에서 왜 징징거리며 난리냐고 짜증이시다. 자본가들의 계산법이, 그 ‘당연의 세계’가 너무 암울해서 갔다. 그런 ‘당연의 폭력’이 일체의 저항과 회의 없이 그저 받아들여지는 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져서 갔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아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갔다.

사실, 희망 버스가 떠나기 며칠 전 급한 약속이 생겼다. 살짝 고민했다. 그런데 버스가 떠나기 하루 전날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이 조합원들을 두들겨패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갔다. ‘힘없는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힘 가진 자본가의 지팡이’가 되어 폭력을 방관하는 경찰 때문에 화가 나서 갔다. 그러니 소심한 시민 선우씨를 영도조선소까지 안내해 평생 처음 배 만드는 공장을 견학하도록 초대한 배후세력은 진숙씨, 조남호 회장님 일가, 폭행당하는 약자를 지켜주지 않은 부산경찰이시다.

2차는 영도에서 여름 축제로

자본에 착해지라고 요구하는 게 어렵다는 거 안다. 자본의 속성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다는 거 인정한다. 하지만 자본을 굴리는 자본가의 윤리적 각성 정도에 따라 최소한의 완충지대는 만들 수 있으리라는 노력마저 폐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균보다 지나치게 악랄한 자본에 대해 정부 차원의 법적 규제를 할 수 없다면, 시민의 힘으로라도 윤리적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노동자 서민 등골 빼먹기 좋은 나라’의 다른 표현으로 고착되어서야 대다수가 다양한 노동에 종사하는 우리 미래가 너무 암울하지 않은가.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이순신!’이라고 대답하는 역사가 있을 것이고, ‘노동자!’라고 대답하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거북선이 탄생하는 데 노동자와 이순신이 모두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시민인 나는 그 둘이 똑같이 존중받길 원한다. 이런 상호 존중이 자본가의 상식이 되는 게 소박한 시민으로서의 나의 바람이다.

“왜 우리는 만날 지는 싸움만 합니까.” 진숙씨가 울며 물었다. 하지만 진숙 언니! 희망 버스를 타고 다녀오고 나니 저는 드디어 우리도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마음이 큰일을 해냈어요. 첫 번째 버스를 타며 우리가 감지한 희망은 막연하고 아스라해 위태로웠지만 이제 구체적인 희망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700여 명의 희망 버스 시민들을 자본가와 권력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예요. 2011년의 우리가 한마음으로 한곳에 모이면 시민 700명이 7천 명 이상의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할 수 있음을 저들이 눈치챘기 때문일 겁니다.

기다려주세요, 고공 절벽에서 푸른 것들 키우는 진숙씨. 7월9일 우리는 2차 희망 버스를 타고 다시 갈 겁니다. 첫 번째 희망 버스가 그랬듯이 자발적으로 참가비 내고 자기 돈으로 밥 사먹으며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우리 이웃과 희망을 나누고 싶은 시민들이 손에 손에 도시락 싸들고 촛불 들고 전국 각지에서 부산 바닷가로 피서 갈 겁니다. 이번엔 185대의 버스가 갈 겁니다. 당신이 고독하게 싸워온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부산 영도가 춤과 노래와 시와 그림이 어울리는 여름 축제의 놀이판이 될 겁니다. 부산 시민들도 함께할 겁니다. 아이들과 연인들이 더 많아지고, 더 재미나고 유쾌한 놀이가 많아질 겁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러 가는 거니까요.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공감의 능력입니다. (이 글을 먼저 읽으시는 벗들은 인터넷에서 ‘희망 버스’라고 검색해주세요.)

한국 기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부탁이 있어요, 진숙씨. 다음번 2차 희망 버스가 갈 때까지 치커리·상추 열심히 길러주세요. 그날, 우리 모두의 환호 속에 당신, 두 발로 걸어 내려와 그 식물들을 우리에게 전해주세요. 생명에 대한 갈증과 사랑으로 고공에서 길러진 치커리와 상추들 손톱만큼씩 뜯어서 즐거이 나눠 먹고 우리 한판 더 신나게 놀아요. 걸어 내려오는 당신을 조남호 회장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시면 더더욱 좋겠다는 상상까지 하게 되네요. 내가 당신들 귀한 줄 너무 몰랐다고 미안해하는 말 한마디 들었을 수 있었으면! 우리 조금씩 양보하며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자고, 많이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것을 조금 더 내놓으려는 윤리적 자세를 조남호 회장님이 보여줄 수 있다면 그분의 손자·손녀들이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텐데! (조남호 회장님. 대한민국 기업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희망의 버스 한 번만 더 와주면 저도 살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진숙씨가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살리고픈 존재란 걸 평범한 보통 사람들 속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나누며 행복해지는 유전자가 우리 DNA 속에 있다는 것을 희망 버스 사람들이 보여주었어요. 우리 마음속에는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는, 불의에 저항하고픈 여린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조각보처럼 펼쳐 보여주기로 합시다. 진심은 진심을 알아보고, 진심은 진심을 초대합니다. 이런 자발적 마음으로 꽃피워낸 것이 희망의 버스였지요. 이 버스에 탑승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저마다의 진심으로 서로를 초대한 주인공들이었어요. 진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런 마음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아주 망하지는 않고 유지되는 걸 겁니다. 진심의 가치를 서로에게 전해준 우리 모두! 2차 희망 버스 타고 가서 고공의 진숙씨를 지상으로 사뿐, 걸어 내려오게 합시다. 그때 진숙씨,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 보여주세요.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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