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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버스’는 다시 달린다

희망의 버스 최초 제안자 중 한 명이 말하는 ‘하루에 한 대씩 늘어난 희망’… 머잖아 제2차 희망의 버스 185대가 출발한다
등록 2011-06-22 16:45 수정 2020-05-03 04:26

지난 4월27일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수요문화제에 참가하려고 서울 홍익대 쪽으로 나갔다. 한국 재벌 순위 120위인 박영호 콜트·콜텍 사장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한 뒤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 통지를 보내고 위장폐업을 했다. 4년 전이다. 마침 쌍용자동차 해고 투쟁으로 거리에서 자주 만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한 명이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경동 시인 등과 만났다.

먼저 ‘희망의 봉고’가 있었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로하는 문화제를 두어 달째 진행하고 있었다. 해고노동자 14명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부모의 자살로 고아가 돼버린 남매의 이야기는 세상을 울렸다. 죄지은 바 없이 거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가는 절망을 느꼈다.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와 오늘을 상징하는 이들이 지난 6월11일 ‘희망의 버스’에서 내려 김진숙을 향해 가고 있다. 팔순의 백기완 선생도, 칠순의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 황지익 선생도 85호 크레인을 향해 가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와 오늘을 상징하는 이들이 지난 6월11일 ‘희망의 버스’에서 내려 김진숙을 향해 가고 있다. 팔순의 백기완 선생도, 칠순의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 황지익 선생도 85호 크레인을 향해 가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단지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씨는 부산 영도의 85호 크레인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거제도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철탑 위에서 강병재씨가 목숨을 내걸고 있었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는 서울시청에서,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는 서울 충정로에서, 현대차 비정규직은 울산과 서울 양재동에서, 콜트·콜텍은 인천 부평에서 촛불문화제를 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개별적인 고통으로 남기지 않고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연스레 우리는 구조적 절망을 넘어 어떻게 희망을 만들 것인지를 얘기하게 되었다.

마침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고공농성 129일째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003년 당시 정리해고에 반대해 김진숙씨가 고공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에 올랐다가 129일째 되는 날 해고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열사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85호 크레인은 모든 노동자와 민중의 절망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송경동 시인은 그 129일이 주는 압박감에 힘겨워할 김진숙씨를 위해 희망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모두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야기는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앉은 자리에서 철도 예약은 가능한지, 누구에게 가자고 할지 등으로 이어지며 어떤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절망을 넘어 즐거운 희망을 꿈꾸는 것은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아,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이렇게 신나는 일이구나.

그러나 며칠 뒤 우리는 ‘희망’을 잠시 접어야 했다. 쌍용자동차 농성 현장에 또 다른 희망의 프로그램이 잡혀버린 거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내가 활동가로 일하는 문화연대는 또 다른 희망으로 다른 하나를 접는 방식보다는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질 수 있게 꼬물꼬물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문화연대의 장기를 살려 미디어팀과 미술팀을 모아 작지만 즐거운 현장 작업을 하기로 하고, ‘희망의 봉고’ 한 대를 끌고 외로운 85호 크레인을 찾았다.

저절로 만들어진 밥과 프로그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는 2012년 말까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100만 행진’과 ‘사회협약 제정’ 운동에 나서자고 결의하고 그 첫 사업으로 도심 촛불문화제를 5월18일 재능교육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진행했다. 이때 다시 2차 도원결의가 이루어졌다. 몇 명의 꿈이지만 벅찬 것이었다.

희망의 열차 아이디어는 희망의 버스로 진전됐다. 누구나 탈 수 있고, 무엇보다 해고노동자가 또 다른 해고노동자와 연대하고, 우리가 우리와 연대하는 버스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절망을 넘어 희망을 만들어가는 버스로 운행하자고 결의하고 바로 역할을 나누었다. 버스 대여를 알아보고, 시각 이미지를 만들 사람을 알아보고, 즐겁게 연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며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러 단계를 거쳐 확대되었고, 사흘 뒤인 5월21일 ‘희망 버스를 타러 가요’라는 제안문이 공개되었다. 20여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뒤 어떻게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게 즐겁고 벅찼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무슨 돈으로 차를 빌리지? 참가비를 받자. 버스 빌리는 데 얼마지? 밥은 어쩌지? 참가자 각자가 알아서 먹는 걸로 하자. 잠은 어디에서 자나? 노숙해야지, 뭐. 마음으로 동의가 되는 사람들이 오겠지 했는데 진짜 그랬다. 웹에 만들어놓은 카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신청했고, 좋은 기획 고맙다는 격려 의견도 달아주었다.

희망의 버스 2대가 3대로, 3대가 4대로 하루에 한 대씩 늘어나는 것을 보며 신기해할 즈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정현 신부가 아침밥을 만들어준다고 하고, 갈비연대에서는 수백 명이 먹을 고기를 보내준다고 하고, 파견미술팀은 이미지를 만들어 온다고 하고, 음악하는 사람은 공연을 자청한다. 문인들은 언론에 기고글을 쓰고 책을 후원한다고 하고, 미디어활동가들은 영상 제작 후원을 하고,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한다.

광장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밥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프로그램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스스로가 프로그램이 되고 밥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일하면서 이렇게 즐겁기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일한다는 느낌보다는 즐거운 소풍을 준비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준비하는 모두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6월11일, 출발하기 전날 한진중공업에서 들려온 소식은 침통했다. 회사 쪽에서 출입문을 컨테이너로 봉쇄하고 용역 수백 명을 공장 안팎에 배치시켜 희망의 버스 방문을 차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를 지켜야 한다’던 해고노동자가 다시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우리의 희망 버스가 한진 해고노동자에게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우리의 희망을 짓누르려는 회사 쪽과 경찰의 행태에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185대 희망의 버스를 향하여

드디어 희망 버스 탑승일. 사람들이 안 오면 어쩌지, 버스가 남으면 어쩌지, 불안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6월11일 저녁 6시30분, 서울시청 광장 옆에 있는 재능교육 농성장에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한 무리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늦게 오는 사람이 꼭 있으니 마지막 차 한 대는 조금 늦게 출발하자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일찍 도착해서 삼삼오오 즐거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맑고 밝고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이 해맑음과 선함이, 소박함이 희망이었고, 희망 버스였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절망의 벽 하나를 넘었다. 한진은, 김진숙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러곤 6월15일 오전 10시, 우리는 다시 결의했다. 저 외로운 여성 노동자에게 향하는 2차 희망의 버스를 타자고. 이 절망의 벽을 잠깐 타고 넘을 것이 아니라 아예 무너뜨려버리자고 결의했다. 이번엔 185대다.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희망이다. 희망의 버스다.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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