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공고는 ‘특성화 고등학교’다. 지난해까지는 그냥 ‘전문계 고등학교’였다. 과거에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 명칭을 둘러싼 역사적 혼란은 D공고 졸업생의 불투명한 미래와 관련이 깊다.
이름만 복잡하고 내실은 없는 전문계고
일제강점기에 농업·공업·상업을 가르치는 ‘전문 실업학교’가 생겼다.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명칭의 근원이다. 1974년 고교 평준화 도입 이후 산업인력 양성을 위해 공고·상고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일반계 고등학교는 대학입시를 목표로, 실업계 고등학교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궤적을 따랐다. ‘특목고’도 이 무렵에 탄생했다. 금오공고·완도수산고 등 기계·전자·수산 분야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국책’ 고등학교를 특수목적고로 지정했다. 1990년대 이후 과학고·외국어고 등에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원래 특목고는 대입이 아니라 ‘일류 직업교육’을 위해 탄생한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대만 해도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지만, 1980년대 들어 그런 일은 희귀해졌다. 고교과정이 대입교육과 취업교육으로 완전히 분리됐다. 직업교육을 전문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전문계 고등학교’라는 명칭이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옛 이름을 밀어냈다.
1996년 정부는 직업교육 활성화 대책으로 “다양하고 특성화된 소규모 고등학교를 자유롭게 설립·운영”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 ‘특성화 고등학교’가 처음 등장했다. 자동차·로봇·조리 등 특화된 직업 기술을 가르쳤다. 그래도 전문계고의 위상은 높아지지 않았다. 2000년 전국 전문계 고교 졸업생 취업률은 51.4%였다. 2009년 그 비율은 16.7%로 급감했다(표1 참조). 정부는 2005년 “명문 특성화고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특성화고 지정 권한도 지자체로 넘겼다. 특성화고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최근에는 더 높은 이름이 생겼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마이스터고’ 제도를 도입했다. “최고의 기술명장 육성”을 내걸었다. 학급당 학생을 20명 안팎으로 ‘정예화’하고, 최신 기숙사와 장학금을 제공하며, 졸업 뒤 우수 기업 취업과 군입대 연기를 보장하는 등 파격적 특혜를 약속했다. 아울러 특성화 전문계고를 더 확장해 모든 전문계고를 ‘특성화고’로 통칭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전문계 고등학교’라는 명칭을 ‘특성화 고등학교’로 대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현장에선 정부·지자체가 특성화고로 지정한 학교와 그렇지 않은 ‘일반’ 전문계고의 구분이 여전하다.
그 결과, 2010년 현재 전국 692개 전문계 고등학교에는 서열이 있다. 19개의 마이스터 고등학교, 31개의 특수목적 전문계 고등학교, 222개의 특성화 전문계 고등학교, 그리고 420개 일반 전문계 고등학교 등이다. 복잡한 명칭이 생겨난 일련의 과정은 취업률을 높이고 직업교육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피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깊다.
2010년 현재 전체 전문계고 재학생은 46만6천여 명으로, 일반계고 재학생(149만6천여 명)의 30% 수준이다. 그마저도 감소 추세다. 2000년 전국 전문계고 졸업생은 29만여 명이었으나, 2009년에는 15만여 명으로 줄었다. 2004년 기준으로 보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8개국 가운데 한국의 직업학교(고교과정) 학생 비율은 23위(25%)로 최하위 수준이다. 독일(65%), 대만(45%), 핀란드(40%) 등과 비교된다.
핀란드, 취업과 진학에 유리한 ‘직업 자격증’ 부여
한국의 직업교육은 ‘가난한 교육’이다. 소득수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부모 학력을 비교하는 자료는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05년 통계를 보면, 부모의 학력이 대학 중퇴·졸업 이상인 경우, 86.2%가 일반계 또는 특목고에 진학했다. 반면 부모가 중졸 이하 학력을 가진 경우, 52.1%가 전문계고에 진학했다.
직업교육의 모범은 핀란드다. 핀란드는 1996년 직업교육 혁신으로 1990년대 경제위기와 실업난을 돌파했다. 한국의 초·중학교 과정인 기초 의무교육(10년)을 마친 졸업자 가운데 38~40%가 직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런데 전체 고등학생 가운데 직업고 학생의 비율은 64%에 이른다. 일반고에서 직업고로 전환하거나, 일반고를 졸업한 뒤 다시 직업고에서 공부하는 이가 상당한 것이다.
직업고는 학점제로 운영된다. 직업연구·연수가 90학점, 공통핵심과목 20학점, 자유선택과목 10학점 등이다. 공통핵심과목에는 핀란드어·외국어·수학·사회과학·예술 등 인문소양교육이 포함돼 있다. 과정을 마치면 ‘직업 자격증’을 받는다. 핀란드에선 이 자격증이 있어야 해당 분야의 취업이 가능하다. 자격증을 받을 수 없는 일반고에 비해 직업고 학생이 취업에 훨씬 유리하다. 직업 자격증은 ‘대학 입학 자격증’도 겸한다. 대입 자격 시험을 치르지 않았어도 직업고 졸업자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대학은 일반대학과 폴리텍대학으로 구분된다. 좀더 높은 수준의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대학 학생의 70%는 일반고 졸업자다. 직업고 졸업자는 굳이 폴리텍을 다닐 필요가 없지만, ‘직업 자격증’이 필요한 일반고 졸업자는 폴리텍 졸업장이 절실하다. 폴리텍은 석사과정도 운영하는데, 전문 분야에서 3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으면 지원할 수 있다. 직업고 졸업자가 취업 이후 3년이 지나면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곧바로 석사 학위에 도전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핀란드 정부는 직업학교의 관리·감독에 ‘인센티브’ 방식을 도입했다. 평가 결과가 나쁘면 전년보다 지원금의 2~3%를 줄이고, 그 몫만큼 다른 우수 학교에 지원한다. 더 많은 학생을 취업시킬수록, 더 적은 학생이 중도에 포기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직업학교마다 복지사·간호사·카운슬러·교사·목사로 구성된 ‘상담팀’이 있다.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학교를 그만두려 한다면, 일대일 교습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학교와 사회에 복귀시킨다. 전문계고 중도탈락자가 일반계고의 4배에 이르는 한국적 상황은 핀란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다(표2 참조).
정부·기업주·노조가 머리 맞댄 스웨덴노르웨이는 일반고와 직업고 구분 없이 고등학교를 통합 관리하면서, 정규 교과과정에서 다양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직업교육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려는 노력이다. 고등학생의 50% 이상이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선택해 공부하고 있는데, 2년간 학교에서 공부한 뒤 다시 2년간 기업에서 연수를 받는다. 고용계약은 정부·기업·학생이 동시에 맺는다. 정부는 기업주에게 연수학생 1인당 연간 1만2천유로(약 1812만원)를 지급하고, 기업은 학생에게 처음엔 숙련노동자 임금의 30%, 나중엔 80%에 이르는 임금을 지급한다.
최근 스웨덴에선 직업교육을 둘러싼 진보·보수 논쟁이 진행 중이다. 사민당은 직업교육에서도 인문교육 비중을 높여왔다. 보수당은 이론보다 현장 교육 비중을 높이려 한다. 논쟁에도 불구하고, 정부·기업주·노동조합이 공동으로 교과과정을 만들고,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시행하며, 학생들에게 생활수당까지 지급하는 뼈대는 변함없다. 그런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누군들 직업학교를 마다하겠는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