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언제 오나.
만취자는 걱정이 없다. 인사불성으로 집에 들어간 월요일 밤, 화장실에 갔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잤다. 다음날 만취자는 잠을 깼다. 술도 깼다. 잠들기 전 ‘걱정’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 갑자기 떠오른다. 화장실로 달려가본다. 물을 튼다. 꾸르륵~.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낸 뒤 수도꼭지는 벙어리 삼룡이. 그제야 비명이 솟아난다! 부엌으로 가본다. 세탁기 옆 수도로 가본다. 집 안 수도꼭지를 다 틀어본다. 추워도 너무 추웠고 원인은 명백했다. 서울은 북극보다 더 춥다. 그린란드 누크도 최고기온은 영상인 날이 많다. 산자락 동네는 더 춥다. 산동네 빌라의 2층에 위치한 우리 집은 추위를 못 견디고 겨울잠에 들어간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곰은 몸의 수분을 응결해 대사량을 줄인다. 그런데 그 곰 위에서 벼룩은 살아야 한다.
비상대책, 생수통을 모아라
설비사에 전화를 걸었다. “오후 2시에나 시간이 나겠는데요.” 온 동네에 난리가 났다. 도로 곳곳에 보였던, 흘러넘쳐 그대로 언 물이 그제야 생각난다. 부랴부랴 월차를 내고 목욕탕을 갔다 온다. 아들과 아버지, 2인 1조로 구성된 설비기사팀이 왔다. 주민 한 명은 설비 트럭을 보고 지나가다가 다가온다. “계량기가 터졌다”고 하소연한다. 설비기사는 계량기 여분이 없어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1층과 2층, 3층의 양수함을 열어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지 않았다. 1층 마당을 파고 묻어놓은 계량기를 열어본 설비기사는 더 오리무중이 되었다. 계량기도 얼지 않았다. “다른 층에는 물이 나오느냐.” 1층과 3층에 사는 캐나다 할머니와 홍콩 할머니는 캐나다, 홍콩에 가셨다. 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고, 물이 어디서 얼었는지도 알 수 없다. 설비기사는 “벽에서 언 것 같다”고 말한다.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따뜻한 데 가서 지내시든지, 계량기에서 바로 보일러로 호스를 연결해줄 테니 사용하시라.” 날씨가 풀리면 물은 나올 것이다. 내일 당장 나올지도 모른다. 호스 연결비는 15만원이라고 했다. 동거인(이하 A씨)과 나는 ‘아깝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집주인의 말은 물이 나올 것이란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날씨 정보를 보았다. 토요일에 영상 1℃로 올라간다. 나흘만 지나면 괜찮을 거다. A씨는 요기 좀 하자며 감자전을 부쳤다. 김 빠진 맥주로 감자를 씻었다. 감자전은 맛있었다.
비상대책이 세워졌다. 부엌은 3일째 방치된 설거짓거리로 가득했다. 컵은 2개를 남겨놓고 다 나와 있다. 접시를 불리는 물에는 기름이 떠 있고, 거름망 위쪽은 밥풀로 덮여 있다. 바닥은 여기저기 흘린 음식물로 얼룩져 있다(이렇게 안 해도 될 묘사를 하는 것은 뒤에 나올 더러운 묘사에 대비해 단련키 위함이다). 이건 다 방치하기로 했다. 물이 가장 필요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아침에 눈곱이라도 떼려면 세숫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A씨는 하루라도 머리를 감지 않으면 ‘쑥대머리’가 되는 ‘머릿기름 분비형’이다. 또 하나는 화장실이다. 내 방 옆 화장실은 과음으로 인해 참을 수 없어 분비하게 된 똥으로 이미 더럽혀져 있다. A씨 방 옆 화장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집에는 화장실이 두 개다).
하루 물 사용량 409ℓ vs 10ℓ의 삶재활용으로 모아놓은 페트병을 꺼냈다. 2ℓ 물통 두 개에 1.6ℓ 페트병 3개. A씨가 소유한 경차는 이 싸움을 견뎌낼 중요한 무기다. A씨가 회사에서 물을 받아왔다. 그리고 ‘다운타운’(슈퍼 등이 밀집하고 시내버스가 다니는 지역)에서 생수 6개들이를 샀다.
내일 아침에 쓸 물 3통을 남겨두고, 1통씩 화장실 물 내리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물을 변기 뒤 물통에 부었다. 어라랏. 들어간 1.6ℓ의 물은 바닥에 깔렸다. 레버를 내렸다. 물은 차오르는 듯하다 그대로 멈췄다. 힘없이 내려갔다. 변기 물통은 밑 빠진 독이었다.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화장실 하나에만 집중하자. 다음날 세수하고 머리 감고 난 3통의 물(약 5ℓ)을 A씨의 화장실 변기 물통에 부었다. 여전히 변기통은 맥없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대략의 건더기만 남기고 변기 수면은 내려갔다.
물이 안 나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나는 내가 하루에 두세 번 변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변기는 더러운데, 배는 그것도 모르고 다시 또 배변을 갈구했다. 내려가지 않는 변기에서 다시 일을 보았다. 그 ‘거름통’을 옆에 두고 잠이 들고 깼다. 그대가 보냈던 오늘 하루는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수요일 저녁 집에 들어오자 수도관에서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끓여서 부어보았다. 샤워기에선 생각나면 한 번씩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A씨는 말했다. “우리 선택이 옳았어.” 최고기온도 영하이긴 하지만 따뜻한 햇살이 도움을 준 것이리라. 물을 틀어놓은 채로 잠이 들었다. 따뜻한 햇살의 온기는 그만큼이었다. 물은 더 나오지 않았다.
물을 사 먹으면서 생수통이 배달용 물통으로 추가됐다. 3일 만에 물통은 11개로 늘어났다. 5개의 생수통과 6개의 맥주통에 담겨오는 물의 총량은 19.6ℓ. 2명으로 나누면 각 10ℓ씩이다. 보통의 목욕에는 80ℓ, 화장실 사용에는 10ℓ, 샤워 한 번에 30ℓ, 설거지 한 번에 20ℓ, 세탁기 빨래에 100ℓ의 물이 소요된다. 보통 사람 1명이 하루에 필요한 양은 평균 409ℓ. 2ℓ들이 생수병 204개.
요령이 생기면서 4통의 물(약 5ℓ)로 설거지와 세수와 변기 청소를 했다. 물을 살살 그릇에 뿌린다(0.5ℓ). 붇도록 잠시 놔둔다. 세제로 그릇을 부신다. 부시면서 나오는 물은 모두 한 통에 모은다. 하수도로 물을 내려보내는 것은 대기업 입사시험보다도 엄격하다. 대야에 깨끗한 물을 1통(2ℓ) 붓는다. 헹군다. 다른 대야에도 1통(1ℓ) 붓는다. 한 번 더 헹군다. 부시면서 나온 더러운 물은 그릇이 비워진 싱크대의 더러운 것을 닦는 데 쓴다. 행주를 제일 깨끗한 물로 적시고 주변을 닦는다(식탁도 닦았다). 남은 물에 행주를 씻는다. 세수를 한다(1.5ℓ). 발도 닦는다. 이 모든 물을 모은다. 반쯤을 변기에 붓는다. 변기 뒤 물통에 넣으면 안 된다. 변기를 솔로 닦는다. 남은 물을 변기에 붓는다. 이렇게 3일째 거름통은 다시 변기가 되었다. 남는 물이 생기니 화분에 물도 주었다.
기다리던 ‘영상’의 토요일은 오지 않았다. 최고기온은 영하 1℃였다. 날씨 정보는 다음주도 최고기온 영하 1℃, 최저 영하 14~15℃라고 반짝였다.
열흘째, 물 없는 생활에 단련되다물이 나오지 않는 집에 가장 풍부한 것이 물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는 물 쓸 일을 만들지 말자며 문을 닫고, 물을 마셨다. 물을 적게 쓰는 방법으로 요리해 먹었다. A씨가 만들어놓은 만두소는 만두를 빚으면 물 소비가 많으므로 그대로 전으로 부쳐 먹었다. 더 부지런해졌다. 아침마다 물을 끓여 세수를 하고 커피도 내려먹었다. A씨는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갔다. 컵은 하나씩 정해 그것으로만 먹었다. 설사를 하지 않도록 술은 자제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 회사 화장실을 이용했다. 평소 습관도 달라졌다. 배변 중 여러 번 내리던 화장실 물은 ‘마지막 한 방’으로 줄였다. 오줌을 누고 내리는 물은 아까웠다(그래도 내렸다). 양치질은 컵으로 했다. A씨는 매일 갈아입던 옷을 사흘간 입었다. 빨래는 가까운 지인의 집에서 해왔다.
10일이 지난 현재 아직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럭저럭 살 것 같다. 여하튼 봄은 언제 오나.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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